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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

꼰대를 이해하자, 어차피 꼰대는 우리를 이해 못하니까

너무나 다른 시대를 살아온 '꼰대'들의 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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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저희 팀장님은 전형적인 꼰대입니다.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이 “위에서 시키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해”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지시를 하셔서 그 이유를 여쭤보면 “위에서 시키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이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시는 식이죠.


그 밖에도 여직원 외모 갖고 트집 잡는가 하면 개인적인 사유로 회식에 불참하면 로열티가 없네 어쩌네 하십니다. 이런 분과는 어떻게 일해야 하죠?


Answer


말씀하신 것처럼 저분은 ‘꼰대’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분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꼰대는 널려 있습니다. 어쩌면 꼰대가 우리보다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아, ‘우리’라고 하니까 좀 그렇네요. 왜냐하면, 나이상으로는 저도 꼰대에 속하니까요. 물론 사고방식으로 보나 라이프스타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저는 꼰대라고 하기에는 아직 좀 이른 감이 있지만… 그건 아마 저 혼자만의 생각이겠죠?


어쨌든, 꼰대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들과 공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꼰대에 대해서 잘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Disclaimer

제가 벌써 40대 중반이니 나이상으로는 꼰대로 불릴 만한 자격(?)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고방식이나 라이프스타일로는 절대 꼰대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꼰대에 대해서는 제가 일가견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꼰대들에 둘러싸여 꼰대와 함께 성장해왔기 때문에 꼰대의 상황과 심정은 잘 알지만, 스스로는 꼰대가 아닌 사람. 뭐, 어쩌면 이것도 저 혼자만의 꼰대 같은 생각일 수도 있구요.


그들은 왜 꼰대가 되었나?

1. 꼰대의 유년 시절


그들이 살아온 세상은 오늘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몇 가지 실례를 소개드리죠.


A. ‘남존여비’는 당연한 섭리다


1980년, 포니 오토매틱 승용차가 나오면서 ‘마이카’를 손수 운전하시는 여성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 가끔씩 말이죠. 그런데 남성분들은 이처럼 앞서가시는 여성분들을 볼 때마다 그들을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아니 무슨 여자가, 쯧쯧쯧.” 하시는 분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심지어 손가락질하시는 분들도 있었죠. 그뿐입니까. 9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녀 간 재산 상속비율이 다른 게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아들이 딸보다 높았고, 장남이 차남보다 높았고.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죠.


제가 대학 다니던 90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어떤 여성분이 탱크톱(속칭 나시)을 입고 지하철에 탔습니다. 그때만 해도 탱크톱이 흔한 시절은 아니었죠. 그런데 한 40대로 추정돼 보이는 아저씨가 그 여성분을 뚫어져라 쳐다보시다가 그분이랑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당황해하시며 언성을 높이시더라구요.

아니, 젊은 여성이 왜 그렇게 야하게 옷을 입고 다녀? 눈길이 가게 말이야!

아니, 누가 쳐다보랬나요? 괜히 민망하니까 오히려 큰소리를 치신 거죠. 여자가 옷을 야하게 입어서 남자들이 불편하다는 논리인데, 지금 기준으로는 좀 많이 이상한 분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많은 분들이 남존여비 사상을 품고 있었죠. 아들이냐 딸이냐에 따라 세뱃돈의 액수까지 달랐습니다. 심지어 <아들과 딸>이라는,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의 드라마까지 있었으니까요.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인 귀남이(최수종)와 후남이(김희애)의 안쓰러운 사연을 다룬 드라마였습니다.

B. 교사는 학생을 마음껏 패도 된다


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80년대에는 학교폭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차이점은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다름 아닌 교사였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그때에는 교사들이 학생들을 마음껏 패도 됐습니다.


중학교 시절 제가 목격한 사건을 하나 말씀드리죠. 당시 주번의 주 업무는 수업이 끝나면 칠판을 지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40대로 보이는 선생님께서 수업 마감종이 울리고 나서 10분이 다 되도록 수업을 안 끝내시는 거예요. 다음 수업시간이 1분도 채 안 남았는데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수업을 마치시자마자 주번이 부리나케 뛰어나가 칠판을 지웠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당신이 교실에서 나가시기도 전에 칠판을 지웠다고 화를 내시면서 갑자기 주번의 머리채를 잡더니 주번의 얼굴로 칠판을 지우셨습니다. 주번의 얼굴은 분필 가루로 범벅이 됐죠. 선생님께서는 그러고서 껄껄껄 웃으면서 나가셨습니다.


1998년에 매우 센세이셔널한 영화 한 편이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당시 교육계 인사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고, 심지어 교총은 영화의 상영 중단 성명까지 발표했죠. 그 영화는 다름 아닌 <여고괴담>이었습니다. 여학생이 귀신이 되어 자신을 괴롭히던 교사를 살해한다는 줄거리가 교단의 권위를 실추시킨다는 게 항의의 주된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귀신 때문에 돌아가신 선생님은 사실 지금 기준으로는 감옥에 갈 만큼 아주 죄질이 나쁜 놈이었습니다. 당시 모 언론사 기자는 이렇게 얘기했죠.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이 죽어서 귀신이 된 다음에야 복수를 한다는 설정 자체가 서글픈 오늘날 교육계의 현실을 나타낸다. 살아있는 학생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까….

한을 품고 죽은 여학생의 원혼이 10년 동안 그 학급에 머물러 떠돌고 있다는 내용의 공포영화 <여고괴담>. 관객수 150만 명으로 98년 한국영화 흥행 순위 2위에 올랐다.



C. 성희롱은… 그런 말조차 없었다


미국에는 예전부터 ‘섹슈얼 해러스먼트'(Sexual Harassment)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용어 자체가 없었습니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된 해가 1987년이니까, 그 전에는 ‘성희롱’에 대한 정의 자체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희롱’, ‘성추행’이라는 표현이 보편화된 것은 90년대 이후로 기억합니다.


제 고등학교는 남녀합반이었는데 선생님 중에는 ‘소림사의 북소리’ 같은 19금 농담을 아주 대놓고 하시던 분도 계셨습니다. 일부 여학생들은 매우 불편해했지만 그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죠. 당시에는 그것이 성희롱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런 단어조차 몰랐겠죠. 아, 그 선생님도 당시 40대였습니다.

성희롱 개념이 막 도입되던 1998년에는 성희롱 사건이 승소한 것에 대한 축하연이 열리기도 했다(…) 참고로 왼쪽 끝에 있는 사람은 현 서울시장이자 당시 피해자의 변호를 맡았던 박원순 변호사.



2. 꼰대의 직장생활


우리의 꼰대들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학창 시절을 보낸 뒤 취업 전선에 뛰어듭니다.


A. 회사가 가정보다 우선이다


또다시 98년. 생애 첫 해외 출장을 가면서 옆에 앉은 동료랑 회사 불평을 좀 했습니다. IMF 사태로 많은 동료 직원들이 해고되면서 사무실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점, 인력감축과 비용 절감으로 업무 환경이 악화된 점, 월급이 반토막난 점 등에 대해서 토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계시던 역시 40대로 추정돼 보이는 아저씨께서 훈계했습니다.

내가 자네들 나이 때는 주말도 없었고 밤낮도 없었어. 일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제 머리를 띵 때린 생각이 무엇이었을까요? 아, 난 정말 복 받은 놈이다 내게 주어진 일에 감사해야지 뭐 이런 거였을까요? 아니죠. 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네네~ 아저씨는 그렇게 사세요. 저는 할 말은 하면서 살래요.’

당시 표정의 사실적인 재현.jpg

물론 그 당시에는 말을 못 했지만요. 그리고 제가 지금 그 아저씨 나이가 됐습니다. 40대. 제 또래들 사이에도 무용담은 참 많죠. 와이프가 출산할 때 회사 일로 밤샜다는 등, 와이프가 유산할 때 역시 회사 일로 바빠 와이프 혼자 보냈다는 등 믿거나 말거나 식의 무용담이지만, 모두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B. 직장 후배에게 개인적인 일을 부탁하는 것은 선후배 간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


90년대 당시 저는 꽃다운 20대 중반이었습니다. 여자친구가 없었던 관계로 소개팅 제의가 넘쳐났죠. 동갑내기 또는 후배 여자애들한테는 인기가 정말 없었는데 누님들이나 형님들이 보기에는 경쟁력 있어 보이는 애들 있잖아요, 제가 딱 그런 타입이었습니다. 꼬마 신랑 같은. 그래서 소개팅은 많이 받았지만 정작… 하여간, 하루는 차장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주말에 뭐하니?

저는 또 소개팅 시켜주려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 한가합니다.”라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차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 집 이사하는데 와서 이삿짐 좀 날라라.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까. 순간 저는 아주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추스르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도와드리는 것보다 망가뜨리는 게 더 많을 겁니다. 저는 참 덜렁대거든요.

이렇게 해서야 저는 주말 자유시간을 지킬 수 있었죠. (심지어 저 당시에는 주 6일 근무제였습니다…) 당시는 분위기가 저랬습니다. 선배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후배들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좀 예외적인 경우였고, 당시에는 직장 후배가 선배의 사적인 부탁을 들어드리는 게 당연시되었죠. 선후배 간에 관계를 돈독히 하는 효과도 있었다네요. 믿거나 말거나.


C. 약간의 촌지는 오고 가는 정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촌지는 당연시되었고 사회 곳곳에서 난무했습니다. 교통 위반으로 경찰한테 걸리면 으레 촌지를 건넸습니다. 당시 어른들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죠. “요새 젊은 경찰들은 ‘와이로’도 안 통해.” 당시에는 ‘와이로’가 통용하던 시대였으니까요.


90년대 후반에 선배 기자들이랑 촌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어떤 수습 기자가 질문했죠. “선배, 취재원이 촌지를 건네면 받아야 하나요?”


사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지만, 당시에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결론이 났습니다.

일단 받아라. 촌지를 거절하면 상대방과의 신뢰가 무너지기 때문에 취재원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받는 것이 도리이고 최소한의 예의다.

98년 설날 당시는 IMF로 모두가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국회 출입 기자들 사이에는 고통분담에 동참하자는 뜻에서 의원들로부터 개별적으로 촌지를 받는 대신 ‘모든 의원들에게 회비처럼 돈을 걷어서 기자 한 명당 200만 원씩만 받자’는 획기적인 방안이 논의되었습니다. 국회의원이 300명 가까이 되니까 기자 입장에서는 국회의원 한 명당 10만 원도 못 받는 셈이니까 정말 많이 양보한 거죠. 이 제안이 실행됐는지는 확인 못 했습니다.


청렴하기로 유명한 한 선배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일단 촌지는 다 받아. 대신 이것을 집에 가져가지는 않고 후배들 술 사주는 데 다 쓰지.

촌지가 법카도 아니고 참. 아, 맞다. 법카도 이렇게 쓰면 안 되지.


D. 회장님은 회사의 주인이시다


80~90년대 당시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습니다. ‘회사 돈은 회장님 쌈짓돈.’


… 아, 지금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그렇게 하면 비난을 받기라고 하죠. 당시에는 그게 당연시되었습니다.


E. 담합은 일상적인 상거래 행위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경쟁사를 만나 서로 회사 재무정보를 공유하는 행위를 아무 거리낌 없이 했습니다. 지금은 거리낌이 있죠. 해서는 안 되는 행위라는 것도 알고 있구요.


90년대까지만 해도 경쟁사 간 가격 담합을 대놓고 했습니다. 정부도 이를 어느 정도는 묵인했구요. 공정거래위원회가 중앙행정기관으로 독립한 게 1994년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경제기획원 내 한 부서에 불과했죠.


관련 있는 얘기인지는 몰라도,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기업 간 적대적 인수합병을 금했습니다. 뭐, 할 수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게 요건을 만들어놨죠. 가령 ‘회사 지분을 20% 이하까지는 인수할 수 있지만, 20% 이상을 인수하려면 아예 50% 이상을 인수해야지 21%~49%는 할 수 없다’는 식으로요. 현재 10대 그룹에 속하는 모 그룹의 당시 회장님께서는 “적대적 인수합병을 허용하면 기업가의 정당한 경영권이 침해받는다”라는 아주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셨죠.


F. 법이 금하면 법을 바꿔라


한 10년 전쯤 일이죠. 하루는 사장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정말 무리한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드렸죠. “사장님, 그것은 공정거래법에 정확히 위배되는 행동이라서 실행이 어렵습니다.”


그러자 사장님께서는 아주 우렁찬 샤우팅과 함께 매우 놀라운 해결책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럼 그 법을 바꿔야지! 내가 과장일 때에는 공무원 만나서 법도 바꿨어. 자네는 항상 그렇게 소극적으로 일을 하나?

저보다 조금 오래된 꼰대는 그런 식으로 일했나 봅니다. 저희 나이 또래의 꼰대는 그런 훈계를 받으면서 일했습니다.

이걸 대체 왜 쓰고 있는 건지 회의감이 든다…



3. 꼰대의 사고방식


문제는 불우한 유년시절과 험한 직장생활을 거친 우리네 꼰대들은 사고방식이 다음과 같이 굳어져 버렸다는 것이죠.


A. “내가 일해온 방식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다.”


그렇게 생각할만하죠.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 일해서 국가와 사회를 성장시켰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지 않았나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옛날에는 스마트폰도 없었잖아요?


B.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은 옳지만 꼰대의 사고방식도 필요하다.”


꼰대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삶의 지혜는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요. 딱 그만큼만 하세요.


C. “나는 힘든 시기를 살아왔다. 요즘 애들은 참 편하게 사네.”


글쎄요. 요즘 밥 굶는 사람은 많이 줄었죠. 동의합니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편해졌다 하더라도 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더 힘들어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요즘 청년들은 저희 때보다 더 힘들게 사는 것 같습니다.



제안


지금까지 꼰대의 유년 시절과 직장생활을 살펴봤고, 그들의 사고방식까지도 약간은 파헤쳐 봤습니다. 이를 통해 꼰대가 왜 꼰대가 됐는지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다음과 같은 오해를 하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래서? 꼰대가 살아온 세상이 그렇고 일하는 방식이 그러니까 꼰대가 맞다고 주장하는 거야?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꼰대는 틀렸습니다. 꼰대는 험난하고 힘든 세상을 살아왔고 그러한 비상식적인 세상에서 서바이브 하기 위해 지금까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일해왔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그러한 세상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별로 없고, 따라서 그렇게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그렇게 일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드리는 제안은 간단합니다. 그냥 꼰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꼰대가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더라도 ‘아, 그래서 그랬구나’라고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용서하고, 조용히 넘어가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꼰대를 이해해줘야 하죠? 그들의 어이없는 행동을 왜 용서하고 그냥 넘어가 줘야 하죠?

어차피 꼰대는 우리를 이해 못 하니까요. 어차피 꼰대는 안 바뀌니까요. 어차피 꼰대는… 꼰대니까요. 그리고 꼰대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 공존해야 하니까요. 완전히 그들과 분리되어 살 수 없으니까요.


아,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도 꼰대인가요?

외모는 전형적인 꼰대지만 생각은 유연한 로버트 드니로

출처영화 <The Intern>



Key Takeaways


1. 우리네 꼰대들은 불우한 유년시절과 험한 직장생활을 거치면서 사고방식이 꼰대스럽게 굳어져 버렸다.


2. 꼰대는 비상식적인 세상에서 서바이브 하기 위해 지금까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일해 왔다. 우리는 그렇게 일할 필요가 없다.


3. 꼰대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조용히 넘어가자. 어차피 꼰대는 우리를 이해 못하니까. 안 바뀌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함께 공존해야 하니까.


원문: 찰리브라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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