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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대형마트에서 자본주의의 완성을 보다

조회수 2017. 10. 3.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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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만 좋은 걸, 아니 길든 걸 어쩌겠는가.

물론 런던에는 다른 의미 있는 장소가 많다. 런던 아이에서 템스강을 따라 런던 브리지까지 이어지는 산책길 퀸스 워크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이나, 잭 더 리퍼가 튀어나올 것 같은 런던의 굴다리 옆에 어김없이 자리한 펍들, 트래펄가 광장을 중심으로 걸어갈 만한 관광명소들.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장소는 런던에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런던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을 묻는다면 토트넘 코트로드역과 옥스퍼드 서커스 사이에 위치한 마크스&스펜서(Marks & Spencer, M&S)를 권하고 싶다. 나는 우리나라의 이마트, 홈플러스의 다른 형태일 뿐인 M&S를 영국 사회를 이해할 최고의 장소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와 M&S의 첫 만남은 개트윅에서였다. 전날 저가항공의 이른 비행기를 타기 위해 나는 오슬로의 버스터미널에서 밤을 꼬박 새워야만 했다. 노르웨이의 공항 음식은 당연히 사치였고, 라이언에어의 기내 음식을 사 먹는 노르웨이 손님을 부러워하며 잠이 들었다.


개트윅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마쳤지만 버스요금을 절약하기 위해 미리 예매해놓은 공항버스는 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 입국심사가 노르웨이 거주허가증 때문에 싱겁게 끝나버린 탓이기도 했다.


배고프고 지친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글자는 ‘MARKS & SPENCER SIMPLY FOOD’. 그곳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형형색색의 제품이 쌓였고 다양한 종류의 파스타, 토르티야, 치킨이나 스테이크 등이 포장을 뜯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가격도 저렴해 보였다. 세계에서 물가가 제일 비싼, 그리고 재화의 종류가 적은 나라 노르웨이에서 런던으로 왔다. 수많은 종류의 물건과 ‘3£ for 2’ 같은 묶음 상품은 나를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영국의 대형마트들은 자본주의의 종착지를 보여준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본주의의 완성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동시에 너무나 잔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본주의의 치명적 매력


노르웨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슬로에는 몇몇 마트 브랜드가 있는데 인구가 400만에 불과한 노르웨이에서 영업하는 것만으론 수지를 맞출 수가 없어 보통 북유럽 3국과 발트 3국에 걸쳐 영업한다.


노르웨이 마트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의 상품군에 한두 가지 정도의 브랜드만 들여놓는다는 것이다. 인구가 적어 다양한 상품을 구비할 수 없는 것인지, 혹은 검소함이 미덕인 청교도적 전통이 남아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른다.


어쨌거나 제품 수는 다양하지 않다. 하나 혹은 두 개 회사의 제품뿐. 아주 고급은 아니지만 유럽에서 가장 잘 팔리는 평범한 브랜드를 진열하고 몇몇 필수적인 재화는 ‘퍼스트 프라이스(First Price)’라는 저가 PB상품으로 제공한다.


평범한 가격에 괜찮은 맛, 저렴한 가격에 먹을만한 맛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 선택에 실패할 일은 거의 없었다. 한두 개 파는데 맛없는 걸 팔 리는 없으니까.

사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퍼스트 프라이스를 주로 이용했지만 다른 제품도 자주 구매했다. 처음 사보는 다른 제품도 언제나 만족스러웠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이 두렵지도 않았다. 품질은 보증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노르웨이에서의 쇼핑은 언제나 무언가 부족했다. 한 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마트에서 제공해 주는 제품을 살 뿐 선택이라는 나의 주체적인 단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러 제품 사이에서 고민하다 하나를 장바구니에 집어넣는 것도, 저번엔 이걸 먹어봤으니 다음에는 다른 브랜드를 먹어보는 것도 없었다. 나는 먹기 위한 구매가 아니라, 구매를 위해 구매하는 자본주의적 마인드를 잘 학습한 자본주의의 수제자였으니 지루한 것은 당연했다.


소박한 북방식 목조 건물, 4월에도 아직 풀이 나지 않은 황량한 길. 언제나 같은 내용물의 비닐백을 들고 걸어가는 나는 문득 배급을 받고 집에 돌아가는 소비에트 국가의 한 개인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 내가 시저 드레싱 종류만 20개에 달하는 영국의 슈퍼마켓에서 황홀감을 느낀 건 당연했다. 영국에서는 일단 어떤 마트를 가는지부터가 선택이었다.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는 신라면, 초코파이 등 판매하는 식품이 70% 이상 일치하지만 영국의 테스코, 세인즈버리, M&S, ASDA 등의 유통체인은 자체브랜드 식료품을 위주로 판매한다.


대형마트에 납품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파생된 엄청난 권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근미래에 대형유통업체가 원재료부터 가공까지 후방통합을 이룰 것이라던 전략 보고서의 분석이 이곳에서는 이미 현실화되어 있었다. 상당수의 식료품은 제조사 메이커가 아니라 자체브랜드를 달고 진열되어있다.


그런데 이 마트에도 ‘급’이 있다. 같은 종류의 제품, 예를 들어 오렌지 주스를 산다고 하면 고급 마켓인 M&S의 것은 비싼 대신 매우 맛있고 대중 마켓인 테스코(Tesco)의 것은 저렴한 대신 그저 그런 맛이다.


각 마트가 보유한 재화가 다르기 때문에 각기 내세우는 대표제품이나 프로모션이 있어 이곳저곳 가는 재미가 있다. 친구들을 만나면 세인즈버리에서는 뭐가 맛있고, M&S에서는 이게 좋고 하는 류의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마트에 들어가서도 선택의 범위는 다양하다. 닭 한 마리는 분절되고 가공되어 다양한 패키지로 선반에 등장한다. 닭 가슴, 윙, 다리는 잘라서 훈제, 바비큐 소스, 동양식 향신료에 버무린 스튜, 로스트, 찜, 구이, 볶음밥 등으로 조리된 수십 가지 상품으로 변모하여 포장을 벗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만난다.


닭 한 마리가 분절되고 온갖 양념과 만나듯 대중의 욕구는 가능한 분절되어 원하는 상품이 없어서 구매를 포기하는 실패를 방지한다. 조리 식품뿐 아니라 재화별로 큰 차이가 나기 어려운 파스타 면도 20개 내외의 브랜드가 진열되어 있다. 푸실리만 해도 15가지.


어떤 제품이 좋은지 오늘 선택의 결과도 잘은 알 수 없지만 그곳에서의 쇼핑은 언제나 행복했다. 난 슈퍼마켓에 가는 것이 진짜로 좋았다. 그곳은 언제나 천국이 현실 속에 자리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구경만으로도 좋았고, 다 사 먹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하나의 제품을 사더라도 이 수많은 제품 속에서 하나를 고른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청크가 씹히는, 갓 짜낸 것보다 맛있는 오렌지 주스와 1,000원짜리 닝닝한 오렌지 주스를 한곳에서 살 수 있는 자본주의를 찬양한다. Long live M&S.



자본주의의 잔인함


최대한 나눌 수 있을 만큼 소비자의 욕구를 나누어 그에 대응하는 재화를 제공해주는 영국 대형마트를 보며 자본주의의 완성이란 이런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너무나 짜릿한 만큼 잔인하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별생각 없이 구매한 ‘시저 샐러드 드레싱 네 병’이 자본주의를 설명하고 있었다.


여러 명의 친구와 각기 다른 요리를 해와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어느 날. 내가 맡은 종목은 닭가슴살 시저 샐러드였다. 근처 테스코의 시저 샐러드 드레싱은 종류가 20개에 육박했다. 문제는 이 모두가 너무 멀쩡하게 생겼다는 것, 그리고 싼 것은 한 병에 1,000원에 불과하고 비싼 것은 6,000원이나 한다는 것이었다.


가격은 선형함수의 형태를 그리며 촘촘히 분포하고 있었다. 구성성분도 내용물도 비슷해 보여 혼란스러웠지만 어차피 음식을 많이 장만해야 했기에 나는 병값도 안 나올 것처럼 싼 것부터 꽤 비싼 것까지 네 병을 골라 구매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일단 네 병을 저렴한 순서대로 시식했다. 저렴한 0.59유로(약 800원) 드레싱은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 같은 맛이었다. 다음 것은 먹을 만했지만 여전히 맛이 없었다.


평범한 시저 샐러드, 그리고 식당에서 먹는 것처럼 맛있는 시저 샐러드를 차례로 경험했다. 각 병의 가격과 맛은 너무나 절묘했다. 20펜스 차이의 상품은 20펜스 수준의 맛의 차이가 났다. 맛은 돈이었다. 혹은 그 역이거나. 


드레싱에 많은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사람도 돈이 얼마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도, 가격대마다 촘촘하게 박힌 수많은 재화가 상품을 장바구니로 이끈다. 판매자와 소비자가 타협을 이룰 수 있는 모든 가격에 각기 다른 샐러드 드레싱이 스크럼을 짜고 사람들이 구매를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판매자와 소비자의 효익 모두를 만족시켜 효율의 극대화를 달성하는,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독점 따위 없고 돈 낸 만큼의 맛(효익)을 보장하는, 효율이 끝장나는 교과서같이 바람직한 자본주의. 그런데도 영국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대형마트에 혐오를 느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싼 게 좋은 것이라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 습득하고 있었다. 새삼 충격을 받을 이유는 없었지만 먹는 문제여서 그랬을까. 이 맛없는 샐러드를 먹는 한 가족의 저녁 풍경을 생각했다.


계층이 샐러드에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회. 제품의 수만큼 촘촘한 계급. 노르웨이에선 모두 비슷한 맛의 샐러드를 먹었다. 적어도 집에선 같은 수준의 것을 먹었다. 그런데 이 화려한 도시에서 누군가는 정말 먹을 수 없는 맛의 샐러드를 매일 먹는 것이었다.


다양한 제품 수의 저주. 취향에 따라 골라 먹는 척하지만 결국 돈이 없어서 비싼 걸 못 먹고 못 입을 뿐이다. 수 없는 선택이 눈앞에 있다는 환상은 결국 지갑 안의 총알이 내 선택을 결정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잊게 만든다.


어쩌다 한 번씩 최고급품을 구매해 선택이 내 손에 있다는 환상을 강화시킬 뿐이다. 하나의 괜찮은 제품만 제공되는 사회보다 크게 나은 사회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때 들었고, 노르웨이가 문득 그리워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영국의 대형마트를 그리워한다. 유럽에서 살고 싶은 도시를 고르라고 한다면 여전히 런던을 고를 것이고 그 이유 중에 M&S가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나는 싫증을 쉽게 내는 실증주의자라 노르웨이의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할 때가 있다.


그리고 서울의 나는 영국 테스코가 운영하는 홈플러스를 가장 좋아하고, 다국적 기업의 새로운 제품이 매대를 더 다채롭게 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대형마트와 자본주의의 잔인함을 알지만 좋은 걸, 아니 길든 걸 어쩌겠는가.


소시민인 나는 돈 잘 버는 사람이 되어 모든 선택지가 내 지갑 안에 있는 사람이 되길 노력할 뿐이다. 맛없는 샐러드를 먹는 가족의 저녁식사를 최대한 마음 속에서 지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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