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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캔모아도 못 먹어본 애들이 인생을 알겠냐?

조회수 2017. 9. 5.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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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그네 자리에 앉아서 옆 학교 애들이랑 기 싸움 안 해봤으면 말을 마라

콜드스톤 : 작은 사치, 아주 큰 고급스러움


수능을 마치고 촌에서 올라온 나를 떠맡은 오빠는 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영화관이라는 왕십리CGV로 데려가 난생 처음 보는 3D 아이맥스 영화를 보여주고, 콜드스톤이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 퍼 올린 다음 철판에서 이리저리 굴리고 써는 점원의 모습이, 마치 여행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이탈리아의 아이스크림 아저씨 같아 이국적이었다.


거기다 그 특유의 크리미함과, 중간중간 씹히는 토핑의 아삭함은 31가지 아이스크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놀라움이었다. 아아, 이것이 바로 달콤하고 고급진 서울의 맛이로구나.


가장 작은 사이즈가 3800원이라는 비싼 가격에 자주 찾지는 못했지만, 허전한 마음을 달래줄 달달함이 필요할 때면 브라우니 토핑을 추가한 치즈판타지 싱글콘을 먹곤 했다. 그 특유의 꾸덕꾸덕함을 먹고 있자면, 그 어떤 마음의 응어리도 녹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풀어주었던 콜드스톤이 2015년 12월, 한국에서 철수했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빈자리를 대체할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아직 찾지 못했다. 때마침 콜드스톤이 없는 서울의 여름이 유난히 더운 것도, 우연의 일치였겠지.


(글/황유라)

 

로티보이 : 말없이 사라져 버린 썸남 같은 그대여

첫 만남은 엄마의 차 안이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내게 엄마는 간식이라며 갈색 봉투를 안겨줬다. 빵은 얼핏 보면 소보로처럼 생겼지만 표면이 매끈매끈했고, 아직 따끈따끈함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리고 혀에 닿은 로티보이의 빵은 매우 놀라웠다. 무척 달콤했고 부드러웠으며 그 속에는 세상에나, 짭쪼름한 버터가 녹아 붙어 있을 줄이야.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주황색 종이 봉투에 담긴 그 빵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왠지 모를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좋은 것을 보는 눈은 모두 같은지, 로티보이 매장은 언제나 분주했고 줄을 선 사람들은 차례대로 갓 구운 빵을 봉투에 담아 가고는 했다. 마치 만화책 속에 나오는 빵 트럭처럼 말이다.


하지만 1년 정도 지났을까, 돌연 로티보이가 사라졌다. 장사가 잘 안 됐던 걸까? 나에게 로티보이의 잠적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그러나 로티보이에서 봤던 ‘번’들이 일반 프렌차이즈 빵집에서 팔기 시작했고, 나 역시 로티보이에 대해서 잊어버렸다.


그러나 투명한 비닐봉지에 깨끗하게 밀봉되어 진열되어 있는 ‘번’을 볼 때면, 갓 구워져 나와, 따끈따끈한 기억 속의 냄새가 어디선가 풍겨온다.


차조수석에 앉아 엄마와 함께 뜯어먹던 그 빵.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어느새 축축해지면서 갈색 봉투 특유의 향기가 피어오르던, 그 어린 날의 로티보이 번.


(글/최희선)

 

캔모아 : 여중생A들의 아지트

같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진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중학교란 곳은 그랬다.  그렇게 똑같은 교복을 입고 길거리를 걸을 땐 두려울 것 없는 황야의 무법자가 된 것 같았다. 그런 우리를 소녀로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곳이 있었으니, 이름마저 귀여운 캔모아가 그랬다.


지금이야 모닝 커피 한 잔 값이지만 그 시절에는 매우 큰 액수였던 4천원을 내면 아름다운 과일빙수가 눈 앞에 나타났다. 그것을 받아들고 TV에서만 보던 꽃그네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반올림’에 나오는 옥림이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창 식욕이 왕성했던 여중생들을 거뜬히 커버할 수 있는 무한 리필 식빵+생크림 조합까지 있으니, 캔모아에서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캔모아가 인기를 끌자 후발주자로 대야빙수를 내놓은 아이스베리와 후레시베리 같은 아류들이 줄을 이어 빙수 전국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그치만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각종 디저트 카페가 우후죽순 불어나며 하나 둘 없어지더라.


수세에 몰렸던 캔모아는 과일 요리라고 해서 후르츠 떡볶이, 후르츠 스파게티… 등의 메뉴를 내놓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나, 밀려드는 신문물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느새 나는 캔모아 꽃그네 자리를 강탈하던 언니 오빠들의 나이가 되었지만, 캔모아는 어디로 갔는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중학교 시절 가던 그 캔모아 자리는 지금 흔한 프랜차이즈 가게로 변해 있다. 하지만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함께라면 무슨 짓을 해도 쪽팔린 줄 모르던 풋풋한 시절이 떠오른다.


(글/이유진)

 

크라운 베이커리 : 훌륭한 빵순이를 길러낸 명코치

아빠의 퇴근길에는 늘 빵 봉지가 함께했다. 크라운 베이커리라고 크게 쓰여진 비닐봉지 안에는 아빠가 유난히 좋아하는 단팥빵과 소보로빵이 들어 있다.


그 오랜 경험 때문인지 아직도 ‘크라운 베이커리’라는 단어를 발음하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혀에 맴돈다.


크라운 베이커리의 빵들은 최근 쏟아지는 프렌차이즈의 빵들과는 조금 달랐다. 달지만 입맛을 버릴 정도로 달지도 않았고 부드럽지만 너무 기름지지도 않은 미묘한 밸런스가 일품이었다.


만약 빵에도 손맛이라는 것이 있다면 딱 그런 느낌이었을 거라고 생각되는 빵들이었다. 여러 번 베어 먹어도 질리지 않는 그 수수한 맛 때문에, 나는 떡잎 푸른 빵순이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해가 바뀌고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하였다. 새로운 동네에는 파리에서 왔다는 빵집이 참 많았다. 파랗고 하얀 간판은 너무 세련된 도시 사람 같아 주눅이 들었다.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 조금 더 크라운 베이커리로 굳이 향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얼마 지나지 않다 사라져 버렸고, 아버지의 퇴근 길 빵 봉투도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빵을 오물오물 씹고 있으면 낯선 서울의 자극적이고 짭짜름한 맛이 풍겨왔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고, 나는 어느 샌가 그 맛에 충분히 길들여진 나이가 되었다. 이제 다시는 고소하고 은은한 맛을 느낄 수 없겠지.


(글/이정은)

 

코코스 : 아직도 남아 있는 빨간 자동차의 추억

부모님은 언제나 바쁘셨고, 덕분에 외식을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1년에 한두 번 정도 봉천역 근처에 있었던 코코스에 가는 날은 일종의 축제와 같았다.


특히나 코코스가 특별했던 까닭은, 아직 관악구가 개발이 덜 되고 주변엔 ’어른들의 놀이터’만 즐비하던 시절에 그곳이야말로 관악구 어린이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핫플레이스였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어린이 세트를 주문했다. 무려 빨간색으로 도색된 스포츠카 모양 접시가 나왔기 때문이다. 차체 외형 그대로 두꺼운 모양의 접시 위에, 의자 시트가 있어야 하는 부분이 평평한 면으로 비어 있고, 거기에 음식들이 올라가 있었다.


스테이크 위에는 이쑤시개로 꽂혀있는 태극기가 달려 있었다. 그 매력에 빠진 6세 유아는 자동차 접시를 집에 가져가겠다고 20분 넘게 떼를 쓰다 크게 혼났더랬다.


부모님의 입맛에는 관악구 어린이들의 꿈과 행복의 공간 코코스가 잘 맞지 않았나 보다. 덕분에 나는 약간 얇고 살짝 넓은 모양의 스테이크, 프렌치 프라이 몇 조각, 그리고 달달한 케첩을 맛볼 기회를 다시 찾을 수 없었고, 언제나 코코스 건너편의 ‘김XX 칼국수’집에서 우울하게 면발을 삼켜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코코스라는 이름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어쩐지 아쉬운 스테이크를 씹을 때 마다 기억 속에 남아 아련한 추억이 잠시 피어오르곤 했다.


그러다가  코코스가 한국에서 완전히 폐업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아, 더 이상 빨간 자동차 접시를 볼 수 없겠구나. 마치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 처럼.


(글/조현익)



원문: TWENTIES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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