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삶의 기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조회수 2017. 8. 24. 19: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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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도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누구를 위한 교육과정인가 


교육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배워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정하는 일이다. 인류가 지구라는 터전을 빌어 살아오는 동안 축적한 통찰과 지혜를 보존하는 일이기도 하다.

출처: 교육개발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교육과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교육과정이 고시된 1963년이다. 제2차 교육과정 총론 중에서 ‘교육과정 구성의 일반목표’를 보면 교육과정을 “학생들이 학교의 지도하에 경험하는 모든 학습 활동의 총화”로 정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교육과정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교육과정은 다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지난 2015년 9월 23일 자로 고시된 2015 개정 교육과정처럼 ‘문서화된 교육과정’이다. 이때의 교육과정은 교과들의 목록이나 교과별, 학년별 교수 내용의 체계를 의미한다.

2. 학교에서 ‘교육계획’에 따라 일정한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을 지칭한다. 이때의 교육과정은 학생의 입장에서는 학습해야 할 내용이고 교사의 입장에서는 가르쳐야 할 내용이 된다.

3.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는 ‘학습 경험의 총체’를 뜻한다. 즉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갖게 되는 의도되고 계획된 경험이 곧 교육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교육과정이 작게는 교실 현장에서, 크게는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국가 교육과정은 학교교육계획에 영향을 끼치고 학교는 개별교사의 ‘수업’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활동을 통해 학생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먼저 국가 수준 교육과정에 제시된 교육과정의 성격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을 살펴보면 교육과정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가. 국가 수준의 공통성과 지역, 학교, 개인 수준의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교육과정이다.

나. 학습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신장하기 위한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이다.

다. 학교와 교육청, 지역사회, 교원・학생・학부모가 함께 실현해 가는 교육과정이다.

라. 학교 교육 체제를 교육과정 중심으로 구현하기 위한 교육과정이다.

마. 학교 교육의 질적 수준을 관리하고 개선하기 위한 교육과정이다.

-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 중 ‘교육과정의 성격’

교육과정의 성격을 규정할 때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것부터 나열하지 않을까? 즉 국가 수준의 공통성과 지역, 학교, 개인 수준의 다양성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학습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어떻게 중심에 둘 수 있을지, 교육청, 학교, 교원뿐 아니라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의 참여를 어떻게 유도할 수 있을지 이런 것들이 교육과정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실은 고작 학교 교육 체제를 “교육과정 중심으로 구현”하거나 “학교 교육의 질적 수준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주체가 특정 연구 집단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번 교육과정에서는 교육현장과 소통하는 교육과정 개발을 위해 교육과정 시안 연구진에 참여하는 현장교사의 비율을 40%이상으로 강제하고 교과별 내용 중복 해소 및 교과 간의 이해관계 조정을 위해 각계 인사와 교육과정 전문가, 현장교원 등이 참여하는 ‘국가교육과정각론조정위원회’를 구성·운영했다. 그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에서 보다시피 그 한계는 명확했다.


전문가주의는 교육에 대한 통합적 접근을 가로막는다. 교육이 ‘백년지대계’라 했던가. 교육개혁이 단순히 대입 제도 개선이라는 표면적 변화에 그쳐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대입 제도가 갖는 심층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교육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가? 그건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절망과 추락을 양산하는 대한민국의 사회적 구조를 직시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교육개혁도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출처: 연합뉴스
대학입시 제도 변천사.

정권의 이해관계를 떠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사회적 교육과정 위원회’를 법제화 하고 이를 통해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한 교육과정을 수립,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교육 자치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고 사회적 합의수준마저 낮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 역시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위원 구성에서부터 난항을 겪을 수도 있다. 


결국은 말로만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외칠 것이 아니라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교육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약속 하에 교육과정 위원회의 구성으로부터 권한과 기능, 시기, 절차 등을 법으로 명시할 필요가 있다. 교육의 주체가 교육과정 수립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헌법적 가치에 기반 둔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로부터 시작하여 체계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야 한다.



교육과정 이전에 삶이 재구성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교육의 주체라 하면 교사, 학생, 학부모를 꼽는다. 이 중에서도 현실적으로 교육과정의 실행자라고 할 수 있는 교사의 역할에 고민이 필요하다. 과거 교사의 역할이 단순히 교육과정을 전달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면, 최근에는 교육과정을 보다 능동적으로 실행하며, 더 나아가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것까지 교사의 전문성의 영역으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다.


즉 교사가 교육과정의 재구성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 최근 교육과정에 대한 성찰로부터 교육과정 재구성의 실천 사례까지 다양한 저작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는 분명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사실 ‘교육과정의 재구성’이란 말은 매우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용어다.

학교 교육에서 일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교육 계획의 구체성이 결여되어 현실 사회와 유리된 획일적 경향이 나타난다. 모든 사물이 지역성과 역사성에 규제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이, 각 지역 사회에 존재하는 학교도 마땅히 그 지역 사회와 밀접 불가분의 관련을 가져야 한다.

각 학교의 교육 목적, 교육 방법, 교육 평가 등이 이러한 지역성을 등한시하고 획일적으로 다루어왔기에 지역 사회의 교육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함을 시정하여 사회에서 요구되는 산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각 지역 사회의 학교는 국가적 기준에 의거하여 각 지역 사회의 실정에 맞는 교육과정을 재구성하여야 한다.

- 제2차 교육과정 총론 중 ‘교육과정 개정의 취지’

제2차 교육과정이 고시된 1963년에 이미 “현실 사회와 유리된 획일적 경향”을 우려하면서 “각 지역 사회의 실정에 맞는” 교육과정의 재구성을 언급한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하면서 기치로 내건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역시 일종의 교육과정 재구성 방향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교육과정이 나온 지 50년이 넘었다. 그 이후로도 여덟 번의 교육과정 개정이 있었다.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주창한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우리는 항상 “교육과정의 재구성”을 이야기해왔지만 “현실사회와 유리”되지 않은 교육과정은 여전히 요원한 일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왜 그런가.

출처: Kim’s Repositorium
그러니까 이런 교과서로 공부하던 시대 말이다.

어쩌면 교육과정의 재구성이란 것이 현재의 교육과정에 대한 긍정 또는 묵인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설정한 게임의 규칙에 대한 의문은 일단 덮어둔 채 주어진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최선의 선택을 하겠다는 발상이 곧 ‘교육과정의 재구성’인 것은 아닌가. 


혁신학교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배움이 시험과 입시를 위한 지루한 노동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이 실제 삶과 무관한 것은 아니며, 학생들의 자발성을 끌어낸다면 현재의 교육환경에서도 내적 성장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혁신학교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논리이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공교육의 최전선에서, 그것도 신자유주의의 험난한 파고 속에서 기꺼이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붇는 이들의 노고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교육 주체들의 자발성은 퇴색되고 성장은 스펙의 다른 말이 되기 일쑤다.


학교 현장의 궂은 일은 모두 ‘비정규직’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성과’라는 괴물과 연관되어 있다. ‘대학입시’라는 성과 말이다. 혁신학교 역시 ‘성과’라는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오늘날 이 거대한 낭비의 종착점이자 모든 교육적 에너지의 블랙홀인 대학입시를 피해갈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 것인가? 이렇게 해서 혁신학교의 트랙을 따라 나온 아이들을 기다리는 현실이 청년실업, 비정규직, 극악한 지위경쟁이라면 혁신학교는 결국 또 하나의 희망고문이자 문제의 떠넘기기 곧 ‘폭탄 돌리기 게임’이 아닌가?

그러므로 교육불가능의 이야기는 혁신학교가 집중하는 ‘수업과 학교문화’로 수렴되는 ‘배움의 적응’이 아니라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게 할 것인가’라는 ‘다른 배움’의 이야기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금의 교육 체제를 어떻게 새롭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체제 전환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된다.

그것은 실제의 사회경제적 삶과 연관되는 ‘삶의 기술’, 앞으로 닥쳐올 세상을 미리 살아가는 ‘연습’의 과정들을 학교 교육과정 안으로 진입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 이계삼, 「 혁신학교는 답이 아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게 할 것인가? “청년실업, 비정규직, 극악한 지위경쟁”을 묵인하는 한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는 가져올 수 없다. 삶과 배움이 일치하는 교육과정을 논하기에 앞서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삶을 위한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참된 삶, 좋은 삶에 대한 뚜렷한 상이 없다면 결코 삶을 위한 교육 역시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신계급사회의 도래


얼마 전 「네 얼굴은 C급, 너네 집안은 B급」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신문기사가 실렸다. “네 얼굴은 C급이고, 수저(가정 형편)는 B급이야.”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최근 각 방송사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빠진 학생들이 친구들의 외모·성적·끼·집안 사정의 순위를 매겨 학교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출처: 조선일보

영어 표현 중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라는 말이 있다. 과거 은식기를 사용하던 유럽 귀족층에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대신 유모가 젖을 은수저로 먹이던 풍습을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몇 년 전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이 표현이 이제는 청소년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이다. 


집안의 재산 정도에 따라 자신의 처지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로 분류하는 ‘수저 계급론’이 바로 그것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연상되는 이 용어의 등장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한다.


2015년 “경쟁이 없다면 선택도 없다” “사익이 세상을 발전시킨다” “격차는 자연스러운 것” 등의 문구를 화장실에 내걸어 논란을 일으킨 자유경제원이나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이 그의 책 『위대한 탈출』을 통해 “불평등이 성장을 촉진시킨다”고 주장한 것처럼 오역하여 영문 원본을 출판한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로부터 시정요구를 받은 한국경제신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시피 이제는 거리낌 없이 불평등을 주장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경쟁과 불평등은 전혀 다른 용어이다. 경쟁은 필요하지만 기회와 과정과 결과에서 평등이 이루어질 때에만 경쟁은 개인과 사회에 유익한 것이 된다. 피가 난무하는 옥타곤에서 가장 원초적인 경쟁을 벌이는 종합격투기 선수들조차도 같은 체급끼리 붙고, 동일한 룰의 적용을 받으며, 비록 시합에서 졌을지라도 대전료를 지급받는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종합격투기의 세계보다 낫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TV 프로그램 ‘복면가왕’은 처절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수저의 빛깔을 가리고, 계급장을 떼고 겨뤄보자는 욕망의 투영은 아닐까. 신자유주의를 넘어 신계급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하드코어 인생아


1만 5,908명, 1만 4,278명, 3만 382명. 2014년 한해 학업을 중단한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 수다(「2014 교육기본통계」, 교육부). 이 통계 속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 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2014년 한 국회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평균 사흘에 한 명 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배재정, 「2010년 1월~2014년 9월 초·중·고 자살 현황」).

출처: 한국일보

어린이 행복지수 낮은 순위 1위, 청소년 행복지수 낮은 순위 1위, 학업 시간 많은 순위 1위, 사교육비 높은 국가 1위, 공교육비 민간 부담 1위, 청소년 자살률 1위, 청소년 흡연률 1위(이혁규, 『한국의 교육 생태계』). 이게 대한민국 학교의 민낯이다. 행복은 고사하고 부모가 초과 노동에 시달릴 때 학생들은 초과 학업에 시달린다. 


부모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자식에게 쏟아 붇지만 ‘흙수저’의 한계는 명확하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상류층 자제들이 비행기로 유유히 탈조선에 성공할 동안, 흙수저 물고 태어난 서민층 자식들은 한강으로 탈조선한다(전중환, 「왜 ‘헬조선’이 문제인가」). 학교의 필요성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냥 참고 다니는 거다. 언제까지 이를 외면할 수 있을까.

뭐가 의미 있나 뭐가 중요하나 정해진 길로 가는데
축 쳐진 내 어깨 위에 나의 눈물샘 위에
그냥 살아야지 저냥 살아야지
죽지 못해 사는 오늘
뒷걸음질만 치다가 벌써 벼랑 끝으로
어차피 인생은 굴러먹다 가는 뜬구름 같은
질퍽대는 땅바닥 지렁이 같은 걸

- 옥상달빛, 〈하드코어 인생아〉 중

아프니까 청춘이다? 무슨 얼어 죽을 ‘청춘’인가. 지금의 흙수저들에게는 청춘이라는 단어 자체가 금물이 되었다. 금수저부터 흙수저까지 인생은 이미 정해져 있다. 흙수저들에게 연애, 결혼, 출산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이들에게 인생은 이리저리 굴러먹다 가는 뜬구름 같은 것이다. 아니, 인생 자체가 금물이다.

인생은 금물 함부로 태어나지는 마
먼저 나온 사람의 말이
사랑 없는 재미없는 생을 살거나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네

- 언니네이발관, 〈인생은 금물〉 중


흙수저를 위한 교육학


윤태호의 〈미생〉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

이를 학교에 적용해 볼까?

학교가 의미 없는 공간이라고? 학교 밖은 지옥이다.

헬조선은 과장이 아니다. 그나마 학교는 힘겹게나마 무상교육과 무상급식이 실시되고 있는 공간이다. 형식적으로나마 교육의 기회 균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학교가 보이지 않게 신계급사회를 정당화하는 구실도 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계급사회…

스스로를 귀족, 평민, 천민으로 부르는 교실 내 역학관계는 학생 인권이 단순히 교사-학생 간의 문제가 아닌 좀 더 포괄적인 시각을 갖추어야 함을 암시한다. 자사고, 국제고, 외고 등 신귀족학교가 등장하고 있는 현실이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소위 명문대학교 진학의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는 현상 역시 학생들에게는 현실을 직시하는 강력한 교훈이 되고 있다. 


학교는 전쟁터이고 학교 밖은 지옥이다.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길이 남아 있는가. 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뭔데?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 했으니 여기서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겠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흙수저를 위한 교육’을 하는 것이다.


오해 마시라. 흙수저를 금수저로 만들겠다는 뜻이 아니다. ‘흙수저의, 흙수저에 의한, 흙수저를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금수저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않는 한 변화는 불가능하다. 생태적 삶이란 결국 금이 아닌 흙을 지향하는 삶이다. 돈을 버는 방법이 아니라 돈이 없어도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헬조선’을 외치면서도 왜 변화를 꿈꾸지 못하는가. 그 이유를 박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는 사람들은 이민을 토론하거나 이런 데서 태어난 ‘팔자’를 한탄하지, 현대판 동학농민혁명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하나의 핵심어로 떠오른 ‘이민’은, 결국 더 부유하고 재분배 제도가 그나마 돌아가는 곳으로 가서 그곳의 시장경쟁(단 한국보다 덜 치열하고 더 공평한 경쟁!)에서 삶의 터를 잡으려는, 사실 극히 보수적인 꿈을 함의한다. (중략)

가장 큰 요인은 ‘성장 신화’의 지속이 아닌가 싶다. 여태까지의 성장 속에서 어느 정도의 생계안정을 이룩한 부모세대의 지원에 힘입어 실업자가 돼도 굶을 일은 없는 많은 젊은이들은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면서도, 아직까지 경제성장과 각자의 노력이 결국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자기 탓’으로 쉽게 돌린다. 성장이 둔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아직도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모양이다.

- 박노자,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어떻게 학교에서 ‘삶의 기술’을 가르칠까


결국은 어떻게 “실제의 사회경제적 삶과 연관되는 ‘삶의 기술’, 앞으로 닥쳐올 세상을 미리 살아가는 ‘연습’의 과정들을 학교 교육과정 안으로 진입”시킬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신계급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는 ‘해방적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내가 사는 이 땅을 ‘부동산’이 아닌 ‘삶의 터전’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과연 생산하지 않고도 성장할 수 있으며 부가 없어도 품위 있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터득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이 사회를 연대해서 바꾸지 않는 이상”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최근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할까? 아니면 인간의 삶의 질을 더 높여줄까?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의 삶’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를 명목으로 또다시 아이들의 삶을 저당 잡아서는 안 된다. 지금 이 곳에서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지녀야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사회의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다.


많은 전문가가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할 거라고 이야기 한다. 미래에는 사라질 직업의 목록도 소개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생겨날 새로운 일자리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인공지능을 이용해 노동비용을 절감하고자 하는 특정 계급의 욕망의 반영일 뿐이다. 교육이 그들의 시각에 귀속되어서는 안된다.


어쩌면 우리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더 좋은 노동을 창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극심한 감정노동에 노출되는 전화상담과 같은 일들은 인공지능이 처리하면 좋을 것이다. ‘무인자동차’가 현실화된다면 자동차 공유 서비스가 확산되어 자가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극한 현장에 로봇이 투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일자리를 로봇이 대체하게 된다면 로봇세를 통해 기본소득의 세원을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의 형태가 바뀌게 될 것이다. 취업만이 유일한 살 길이 아닌 세상에서는 대학 진학률 역시 정상적으로 하락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을 가기 위해 필요했던 지식은 삶의 기술을 익히기 위한 지식으로 전환될 것이다.

굳이 대학에 갈 필요를 느끼지 않거나 대학에 가기 어려운 형편에 있다면, 자립 기술을 익혀야 한다(사실 대학에 가든 안 가든 자립 기술을 익히는 것은 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한다). 열심히 텃밭도 가꾸고, 양계도 하고, 가구도 만들고, 친구들과 함께 집도 지으면서 살면 된다. 또 공간이든, 자동차든, 책이든 필요한 것은 나누며 살면 된다. 이렇게만 해도 자본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다.

물론 자립하고 공유해도 돈이 필요한데(우리가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전문 기술이 있어야 한다. 풍부한 ‘마을살이’에는 아주 많은 일들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마을에서 해 오던 일도 있고, ‘생태적 전환’에 필요한 새로운 일도 있다(예를 들면, 에너지 설계사 같은 것). 어쩌면 자본이 잠식한 일을 다시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마을에서 양복점을 여는 게 가능할 것인가).

물론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하나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단골이 되는 ‘마을 경제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또 하나는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존중 받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박복선, 「K시를 걸으며 자립을 생각하다」

박복선에게 있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곧 마을 경제망을 만들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고, 그러한 기술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과연 실제의 사회경제적 삶과 연관되는 ‘삶의 기술’, 앞으로 닥쳐올 세상을 미리 살아가는 ‘연습’의 과정들을 학교 교육과정 안으로 진입시킬 수 있을까?


어쩌면 박복선의 말대로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삶이 좋은 삶이라는 넓은 동의를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와 새로운 철학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삶의 양식을 만들어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이 일은 ‘오로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출처: The New York Times/Keith Negley

무엇을 가르쳐야/배워야 할 것인가. 어떻게 가르쳐야/배워야 할 것인가. 왜 가르쳐야/배워야 하는가. 우리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 있다. 


원문: 윤상혁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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