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드라큘라 (1)

조회수 2017. 8. 10. 2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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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소설 드라큘라에 영감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블라드 3세 혹은 블라드 드라큘라(Vlad III, Prince of Wallachia, Vlad Dracula 혹은 Vlad Draculea)는 블라드 체페쉬(Vlad Țepeș, Vlad the Impaler)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국내에는 소설 드라큘라에 영감을 준 인물이자 루마니아의 애국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 과연 실제로도 그럴까?

블라드 체페쉬의 초상화. 작자 미상.

1. 드라큘라 이전의 세계 ─ 오스만 제국


블라드 드라큘라(정확하게는 드라큘라 혹은 드라큘레아라고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혼란을 없애기 위해 드라큘라로 통일)의 이야기를 하면서 루마니아도 아니고 갑자기 오스만 제국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뭔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오스만, 왈라키아, 그리고 서방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는다면 블라드 드라큘라라는 인물은 성립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드라큘라 역시 당시 자신이 살았던 환경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주변 환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 그리고 그 방법이 정말 옳은 것이었는지 판단을 하기 힘들 것이다.


드라큘라가 살았던 시절. 그의 나라인 왈라키아에 가장 큰 위협은 오스만 제국이었다. 오스만의 팽창 정책의 길목에 그의 나라가 있었기에 그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어 그들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블라드가 선택한 길은 후자였다.


오스만 제국의 초기 역사는 사실 일부 전설이 섞여 있어 다소 불명확한 점도 있기는 하지만 1299년, 오스만 1세라고도 불리는 오스만 가지(Osman Gazi)에 의해 세워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마도 오스만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 이후 1280년대부터 자신의 투르크계 부족을 이끌었던 것 같은데, 당시 이들이 살았던 지금의 터키 일대는 혼란스런 상태였다.


이 지역의 혼란상의 기원은 만지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 1071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비잔틴 제국 황제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Romanus IV Diogenes)는 셀주크 투르크의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치명적인 패배를 당해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를 대부분 적에게 내주게 된다.


하지만 이후 투르크계 부족들 역시 심각한 분열상을 보이면서 상호 간의 전쟁과 내분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현재의 터키 중심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주변부를 제외한다면 룸 술탄국(Sultanate of Rum)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룸 술탄국 역시 13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왜냐하면 13세기 중반에 몽골 제국에 대패하면서 세력이 쇠락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오스만 가지는 비잔틴 제국(이라기 보단 그 흔적에 가까운 국가) 에 가까운 위치에서 새롭게 발흥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오스만 1세 시절 영토 확장

1200년대 후반에는 룸 술탄국이 몰락해서 여기서 여러 부족들이 반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했다. 아마도 오스만 가지 역시 1299년쯤 해서 자신의 나라를 세웠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사실 제대로 된 국가를 건설한 것은 오스만 1세의 아들 오르한 1세(Orhan Gazi)이다.


그는 1326년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의 부족을 통솔했는데, 이해에 비잔틴의 도시인 부르사(Bursa)를 손에 넣고 오스만 제국의 첫 수도로 삼았다.


오르한 1세는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했는데 이 중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해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니케아(Nicaea, 터키명 이즈니크)를 1331년에 정복하고 다시 니코메디아(Nicomedia, 터키명 이즈미트)를 1337년에 정복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유럽 쪽의 교두보까지 마련했는데,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갈리폴리(겔리볼루)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오르한 1세 시절 영토 확장

1360년 오르한 1세를 이은 무라드 1세(Murad I)는 유럽 쪽으로 더 크게 파고 들어가 장차 오스만 제국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3 대륙에 걸치는 대제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1383년 오스만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를 설립한 것은 물론 수도를 새로 정복한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터키명 에디르네 Edirne)로 옮겨 점차 발칸반도로의 확장을 진행했다. 이미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무라드 1세의 영토 확장

하지만 이렇게 잘나가던 오스만 제국에도 어려움이 닥친다. 1389년 무라드 1세를 이은 술탄 바예지드 1세(Bayezid I)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유럽과 아시아 양쪽으로 영토를 확장해서 ‘번개(이을드름, Yıldırım)’라는 별명을 가진 군주였다.


하지만 하필이면 당시 티무르가 오스만 제국을 침공해 바예지드 1세를 사로잡고 제국을 산산조각내 버린다.(1402년)


이후 오스만 제국은 대혼란에 빠져 다시 회복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1402년에서 1413년 사이 바예지드 1세의 네 아들은 서로 전쟁을 벌였는데 결국 승리한 것은 메흐메트 1세(Mehmet I)이다.


메흐메트 1세의 아들인 무라드 2세(Murad II)는 뛰어난 군인으로 유럽과 아시아에서 여러 차례 승리해 오스만 제국의 기틀을 다시 잡았다.


특히 무라드 2세는 발칸 반도 중심까지 침공해 오스만 제국의 북진을 막기 위한 범유럽 십자군을 바르나 전투(Battle of Varna)에서 격파하고(1444년)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우위를 다시 확립했다.


물론 왈라키아에 대한 우위 역시 변함이 없었다. 우리의 주인공인 블라드 드라큘라의 운명 역시 변함이 없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오스만 제국의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드라큘라의 이야기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라드 2세의 뒤를 이을 메흐메트 2세(Mehmed II) 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자이자 블라드 드라큘라의 숙적인 그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본론으로 넘어가 계속할 것이다. 이제 다음 이야기는 드라큘라의 나라인 왈라키아(Wallachia)와 그 주변국에 대한 내용이다.

 

2. 왈라키아의 등장


블라드 드라큘라는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루마니아의 애국자였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살았던 15세기엔 루마니아라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명칭도 존재하지 않았다. 루마니아는 라틴어 로마누스(romanus)에서 비롯된 단어로 그 의미는 로마의 시민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기원은 16세기 르네상스 시절의 인문주의자들이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세 지역을 여행하면서 붙인 데서 기원했다고 한다.


훗날 19세기에 이 지역의 민족주의가 대두되고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루마니아라는 명칭은 공식적인 국가명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 드라큘라의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단어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1600년경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 지역

그런데 로마에서는 한참 멀리 떨어진 발칸 반도의 주민들이 로마 시민이라 불리게 된 데는 그만한 역사적인 사정이 있다. 과거 구석기 시대는 물론 신석기 시대에도 루마니아 지역에는 물론 사람이 거주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로마 제국 시절이다.


106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Trajan)는 이 지역을 정복한 후 여기에 다키아 속주(Dacia)를 건설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과거 갈리아 속주와는 달리 로마 정복 이후 급속한 이민이 이뤄진다.


다키아 속주의 풍요로운 토지를 찾아서 로마 제국 각지에서 65만에서 12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루마니아 주민들은 갖은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로마계 주민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로마 제국 시절의 다키아 속주

로마 제국이 잘나가던 시절 다뉴브 강 너머의 다키아 속주는 풍요로운 토지를 지닌 행복한 동네였다. 사람들은 이를 행복한 다키아(DACIA FELIX)라 불렀지만, 불행히도 행복은 영원할 순 없었다.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던 로마 제국이 3세기 후반 점차 몰락하기 시작하자 다뉴브 강 너머 지역까지 통치하긴 어렵다는 현실론이 고개를 들었다.


결국 서기 271년 이후 로마 제국은 이 지역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이후 고트족을 비롯한 북방 민족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서기 332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고트족을 공격해 잠시 이 지역을 회복하기도 했지만 로마 제국의 해체와 멸망이라는 시대적인 변화는 바꿀 수 없었다. 고트족의 지배 이후 이 지역은 훈족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비잔틴 제국의 영향아래 놓이기도 했다.


중세 시기인 7세기 이후 왈라키아 지방(즉 지금의 남부 루마니아)은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 불가리아 제국, 그리고 헝가리의 마자르족의 침입까지, 그 혼란스런 역사에서 왈라키아는 여러 통치자를 거치게 되다가 11세기 말 남부 러시아에서 건너온 쿠만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렇듯 왈라키아는 발칸 반도 중간에 위치하면서 접근이 용이한 평야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지리적인 요인으로 독립은 이루지 못하고 계속해서 여러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는 역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역사적 특징이기도 했다. 그런 왈라키아가 독립 세력을 이루게 되는 계기는 바로 몽골족의 유럽 침공이었다.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칸은 주치의 둘째 아들인 바투에게 명해 러시아와 그 서쪽 지역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사실상 러시아는 몽골 제국의 직간접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쿠만족 세력도 몰락하면서 왈라키아는 독립의 가능성을 열게 되었다. 1241년, 몽골족이 칸의 사후 분열된 것이 이들 세력이 몽골족의 지배에 놓이지 않게 하면서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몽골 제국의 13세기 진출 방향

동유럽의 주요 세력들이 몽골 제국에게 큰 피해를 입어 생긴 힘의 공백을 틈타 최초의 왈라키아 군주(voivodes)가 탄생한 것은 아마도 13세기 후반으로 생각된다.


왈라키아 평야 지역에 등장한 것은 사실 단일 왕국은 아니었고 몇 개의 나눠진 작은 세력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이 하나로 세력을 뭉치기 시작한 것은 1270년에서 1280년 사이로 보인다.


루마니아 연대기에서 왈라키아를 건국한 인물은 라두 네그루(Radu Negru, 검은 라두라는 뜻)이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헝가리의 침공을 막아내고 왈라키아를 건국했다고 한다. 그 시기는 1289년에서 1290년대쯤이다. 다만 당시 왈라키아에 대한 기록 자체가 적어서 이 시기의 역사는 확실하지가 않다.


진정한 의미의 왈라키아의 시조는 바사라브 1세(Basarab I the Founder 혹은 Basarab I the Great, Basarab cel Mare)이다. 그는 1310년에서 1352년 사이 왈라키아의 군주로서 첫 번째 왈라키아 공(prince of Wallachia)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왈라키아는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된다.


왈라키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주요 외세로는 당시 헝가리가 가장 큰 세력이었다. 당시의 헝가리는 지금의 크로아티아는 물론 루마니아 북부인 트란실바니아까지 합친 대국으로 발칸 반도의 강국이었다.


1308년부터 1342년 헝가리를 지배한 찰스 1세(Charles I of Hungary)는 올리가쉬(oligarch)로 알려진 대귀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그 후 폴란드까지 지배한 루이 1세(Louis the Great)에게 든든한 기반을 마련했다. (루이 1세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반 뇌제에서 잠시 설명한 적이 있다.)

루이 1세 시절 폴란드와 헝가리를 지배하고 몰다비아, 왈라키아 등을 봉신으로 거느린 헝가리의 치세. 14세기 후반. 붉은색은 직접 통치, 옅은 붉은색은 봉신 관계

현재의 헝가리를 생각하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14세기 헝가리는 동유럽의 강대국이었다. 그런 만큼 신생 왈라키아 왕국 역시 헝가리 국왕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바사라브 1세는 초기 헝가리 왕국의 제후로 있었다. 이런 역사가 바뀐 것은 1330년에 있었던 포사다 전투(Battle of Posada)였다.


이 전투에서 헝가리 군대는 좁은 길을 지나다가 미리 준비하고 있던 왈라키아 군대에 참패를 당했다. 헝가리군의 수는 3만 정도였고 왈라키아 군의 숫자는 7000 에서 1만 정도였으므로 정면 대결을 했다면 패배가 어려웠던 상황이지만, 바사라브 1세와 왈라키아 병사들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로 큰 승리를 거두고 왈라키아의 독립을 지켰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헝가리는 강대국이고 왈라키아는 소국이었으므로 계속 적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다. 결국 그는 1344년 이후 다시 헝가리와 화해하고 손을 잡았다.


헝가리 역시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돌입한 상황이라 왈라키아와 굳이 더 싸우려고 하지 않았기에 평화는 쉽게 달성될 수 있었다.


1352년 바사라브 1세는 아들인 니콜라스 알렉산더(Nicholas Alexander)에게 군주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1364년 왈라키아 공위는 다시 블라디슬로프 1세(Vladislav I)로 넘어갔다.


블라디슬로프 1세는 다시 1377년에 동생인 라두 1세(Radu I)에게 공위를 물려줬다. 여기까지 바사라브 왕조(House of Basarab)는 그럭저럭 내분 없이 잘 지내왔지만, 이후가 문제가 된다.


라두 1세의 아들인 단 1세(Dan I)는 1383년에 공위에 올랐다. 그리고 아마도 전쟁 중에 암살을 당한 듯한데, 이후 이복동생인 미르세아 1세(Mircea I)가 1386년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군주의 자리에 오른 미르세아 1세는 대 미르세아(Mircea the Elder, Mircea cel Bătran)라고 불리는데, 그가 바로 블라드 드라큘라의 할아버지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미르세아 1세 시절인 1390년 왈라키아의 영토

그런데 문제는 단 1세에게도 아들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단 1세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왈라키아 군주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왈라키아는 심각한 내분에 빠지게 된다.


미르세아 1세의 아들인 블라드 드라큘(Vlad Dracul, 블라드 2세) 계통의 바사라브 가문은 드라쿨레스티(House of Drăculești)로 불렸고, 단 1세의 아들 이후의 계통은 다네스티(House of Dănești)라 명명되었는데 이 둘은 서로 하나인 왈라키아 군주 자리를 놓고 끝없는 전쟁을 벌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바사라브 가계도. DA라는 표시는 다네스티, DR은 드라쿨레스티.

그 자세한 과정까지 설명한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므로 이는 생략하고, 아무튼 이로 인해 왈라키아 왕위는 싸워서 이기는 자가 돌아가면서 차지한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문제는 이 두 파벌이 서로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결국 한 가문이 서를 죽이고 뺏앗는 과정에서 왈라키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소설 속의 드라큘라는 인간의 피에 대한 갈증과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 속의 인간들은 권력과 재물에 대한 갈증과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가공의 존재인 흡혈귀보다 실존하는 인간의 탐욕이 더 잔인하고 무서울 수 있다. 왈라키아 내부의 권력 다툼 역시 그렇다는 것을 우리의 주인공인 블라드 드라큘라가 앞으로 알려줄 것이다.

 

3. 니코폴리스 십자군


앞서 오스만 제국의 등장과 왈라키아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제 좀 더 둘의 관계를 자세하게 설명할 때다. 14세기 후반이 되자 이미 오스만 제국은 왈라키아까지 넘보는 상황에 이르렀고 헝가리, 세르비아, 몰도비아, 왈라키아 등 주변국들은 크게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Battle of Kosovo)에서 세르비아의 라자르 공(Prince Lazar Hrebeljanović)이 이끄는 범 세르비아 연합군과 술탄 무라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군은 서로 막상막하의 전투를 벌여 거의 같은 수준의 피해를 입었으나, 이는 결국 나라가 큰 오스만 제국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술탄 바예지드 1세의 지휘 아래 더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한 반면 라자르 공을 비롯해서 주력을 모두 잃은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미 14세기 말에는 오스만의 세력권과 왈라키아의 남쪽 경계가 서로 마주치는 상황이 되었다. 헝가리의 위성 국가면서도 헝가리에서 독립하려고 했던 왈라키아는 헝가리와 오스만 두 세력에 낀 상태에다가 앞서 설명한 대로 두 파벌이 군주의 자리를 놓고 내분을 벌이는 덕분에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왈라키아는 범유럽 십자군의 일원으로 오스만 제국과 최초의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니코폴리스 십자군(Crusade of Nicopolis, 1396년)이다. 이 니코폴리스 십자군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점차 커지던 14세기 말 생겨난 범유럽 반 오스만 연합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1394년 교황 보니파티우스 9세(Boniface IX, 재위 1389∼1404)가 교회 분열 상황에서도 반 오스만 십자군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헝가리 국왕 지기문스트(Sigismund,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가 이를 추진했다.


헝가리가 반 오스만 십자군을 주동한 이유는 물론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으나 의외의 일은 당시 백년전쟁을 치르던 프랑스와 영국에서 대거 참여한 부분이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잠시 휴전 중이었는데 샤를 6세(Charles IV)는 ‘기독교 국왕의 수장’ 자격으로 기꺼이 이 십자군에 동참하기로 한다. 영국 역시 1,000명 이상의 기사를 파견했다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대략 8천에서 1만 명 정도의 병력을 제공했고, 그 외 독일과 헝가리, 왈라키아에서 군대를 제공했으며, 로도스 섬의 구호 기사단(Knights Hospitaller)까지 여기에 참여해서 진짜 십자군다운 구성을 갖췄다. 마지막으로 해양 세력인 제노바와 베네치아 역시 이 전쟁에 동참했다.


15세기의 서방 연대기 작가는 유럽 군대는 16,000명 정도였다는 상식적인 숫자를 제시했지만 투르크군은 20만에 달했다는 비현실적 수치를 제시했다.


반면 15세기 오스만 연대기 작가는 오스만군이 6만 명 정도였다는 그나마 좀 상식적인 숫자를 제시했으나 십자군은 무려 13만에 달했다는 역시 비현실적인 숫자를 제시했다. 아마도 진짜 병력은 양측이 모두 수만 명 이내였던 것 같다.


아무튼 왈라키아의 미르세아 1세는 이 전투에 참여해 오스만 제국과 운명을 건 전쟁을 벌이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번개’라는 별명으로 불린 바예지드 1세의 탁월한 전술 앞에 치욕스런 참패를 겪었다.


수많은 귀족들이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 처참한 실패는 멀리 떨어진 영국이나 프랑스에도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이제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왈라키아에는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미르세아 1세 painting at Argeş Episcopy

하지만 이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서 왈라키아는 살아남았다. 미르세아 1세는 현명하게도 병력을 보존해서 빠져나왔으며 이후에도 다뉴브 강 북쪽으로 올라오려는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왈라키아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는 어려웠으므로 그의 치세 말기에는 매년 조공을(금화 3,000개) 바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이웃 세르비아나 불가리아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 매우 훌륭한 외교적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다행히 티무르 1세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혼란을 거듭했으므로 한동안 왈라키아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물론 그 아들들은 오스만과 헝가리의 틈바구니에서 살길을 찾아야 했지만 말이다.

 

4. 야노스 훈야디와 블라드 드라큘


이제 드라큘라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그의 아버지 블라드 2세, 블라드 드라큘(Vlad II, Vlad Dracul)에 대해서 알아보자. 앞서 언급한 대로 그는 미르세아 1세의 아들이지만 권좌에 오르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미르세아 1세와 그 아들인 마하일 1세(Mihail I), 라두 2세(Radu II), 알렉산드루 1세(Alexdandru I) 세, 블라드 2세(Vlad II)는 다네스티 계통인 단 2세(Dan II), 블라드 1세(Vlad I) 등과 번갈아가면서 왈라키아 공이 되었다. 쉽게 말해서 공위를 뺏고 빼앗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블라드 2세는 1436년 형인 알렉산드루 1세가 죽고 나서 왈라키아 공이 되었다. 그런데 블라드 2세의 치세를 위협하는 세력은 사실 오스만 제국이 아니라 헝가리였다.


그것도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야노스 훈야디(John Hunyadi, Hunyadi Janos)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이 인물은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블라드 드라큘과 더불어 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블라드 2세의 초상. Vlad II Dracul of Wallachia
야노스 훈야디의 초상화

야노스 훈야디는 15세기 역사의 중심에 선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아버지는 앞서 설명한 헝가리 국왕 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지기문스트를 섬기는 기사 가운데 하나였는데, 사실 높은 직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덕분에 훈야디는 정확한 탄생 시점도 알기가 힘든데 아마도 1406년 정도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누군지 확실치 않다. 아무튼 훈야디는 군사적으로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으므로 황제의 궁정에서 눈에 띄어 신임을 얻게 된다.


1437년 황제가 죽게 되자 그는 황제의 사위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독일 왕,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국왕(이 시절에는 두 나라가 하나였음) 등 어마어마한 직책을 지닌 알브레히트 2세(Albert the Magnanimous)를 섬기게 되었다. 사실 그는 온갖 왕위 및 작위를 지녀 풀 네임이 엄청나게 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풀 네임은 Albert, by the grace of God elected King of the Romans, always August, King of Hungary, Dalmatia, Croatia, Rama, Serbia, Galicia, Lodomeria, Cumania and Bulgaria, elected King of Bohemia, duke of Austria, Styria, Carinthia and Carniola, margrave of Moravia, Lord of the Wendish March and Port Naon, Count of Habsburg, Tyrol, Ferrete and Kyburg, etc. Margrave of Burgau and landgrave of Alsace. 였다.


문제는 지기문스트 황제의 후계자(황제의 슬하에는 엘리자베스 공주가 있었는데 그녀가 알브레히트 2세와 결혼했다)인 알브레히트 2세가 엄청난 직함에도 불구하고 2년도 안 되어 이질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1439년 10월 27일 알브레히트 2세가 승하하자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등 일부를 제외한 유럽 전역을 호령하던 그의 대제국도 붕괴되기에 이른다.


갑자기 과부가 된 엘리자베스 왕비는 사실 임신한 상태였다. 알브레히트 2세가 죽고 4달이 지난 후 아들인 라디슬라우스(Ladislaus the Posthumous)가 태어나자 이제 대비가 된 엘리자베스는 이 아들을 바로 오스트리아 공의 자리에 올리고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보헤미아의 왕위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 시기 헝가리 왕위를 요구한 것은 이 아기만이 아니었다. 1440년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 바르넨치크(Władysław III Warneńczyk)는 자신이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왕위에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서 엘리자베스파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훈야디는 브와디스와프의 편을 들었고 그 대가로 트란실바니아의 군주가 된다. 일개 기사에서 일약 군주까지 승진한 셈이다.


다만 이 시기 트란실바니아 공 혹은 군주(Voivodes of Transylvania)라는 자리는 꽤 위험한 자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바로 오스만 제국을 막는 직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훈야디는 뛰어난 장군으로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연이어 격퇴해서 그 명성을 유럽 전체에 드높이게 된다. 1440년대 초는 훈야디의 전성시대나 다름없었다.


훈야디의 놀라운 성공은 유럽에 새로운 십자군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일단 다시 블라드 2세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렇게 훈야디가 승승장구할 무렵 블라드 2세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이야기를 다시 10년 전으로 거슬리면 1431년 블라드 2세는 뉘른베르크(Nuremberg)를 방문해서 용기사단(Order of the Dragon)에 가입했다.


이야기는 나름 중요한데 블라드 2세가 드라큘(Dracul)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당시 헝가리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타이틀을 얻는 지기문스트 황제는 1408년 오스만 투르크 및 다른 기독교 이단들로부터 기독교 사회와 자신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용기사단(Order of the Dragon)을 창설했다.


이 기사단에 가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황제의 가신이 된다는 의미였다. 물론 제국의 적인 오스만 제국과 싸운다는 것도 같이 의미했다.

용기사단의 문장. 용기사단이라고 하면 판타지 게임부터 생각날지 모르지만, 실존했던 기사단이다.

블라드 2세는 기사단에 가입한 후 황제로부터 블라드 드라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마침 그해에 트란실바니아에서 아들을 하나 얻었다.


그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블라드 3세 드라큘라이다. 이전에 이야기한 대로 드라큘라 혹은 드라큘레아는 드라큘의 아들이라는 의미다.


드라큘(Dracul)은 라틴어로 드래곤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악마라는 뜻도 있지만, 용이라는 의미도 있다. 기독교 세계와 제국을 수호하는 기사단이 악마라는 명칭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용기사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블라드 3세 드라큘라는 용의 아들(son of dragon)이라는 의미다.


우리의 주인공 블라드 3세 드라큘라는 1431년 트란실바니아의 시기쇼아라(Sighișoara)에서 태어났다. 본래 왈라키아인인 그가 왜 이런 장소에서 태어났는지를 비롯해 그의 어린 시절과 블래드 2세의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겠다.


원문: 고든의 블로그


「역사 속 드라큘라 (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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