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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가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옥자뿐이었다

봉준호식 디스토피아 혹은 봉준호식 희망 찾기
ㅍㅍㅅㅅ 작성일자2017.07.05. | 18,728 읽음

시작부터 시끄러웠던 ‘영화’다. 영화 <옥자>는 ‘스트리밍 영화’로는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나 ‘스트리밍 영화가 칸에 걸릴 수 있는가?’ ‘고작 3~40인치 모니터에서나 볼 수 있는 스트리밍 작품을 영화라고 취급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에 휘말렸다.


한국에서도 문제는 이어졌다. 국내 멀티플렉스 극장 3사로 꼽히는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는 이 영화가 홀드백(극장에서의 상영을 보장하기 위해 IPTV등 극장 이외의 플랫폼에서의 유통을 일정기간 제한하는 방식)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화를 내걸지 않기로 했다.

넷플릭스는 극장-넷플릭스 동시 개봉을 고수했고 드디어 29일 00시에 영화가 풀렸다. 영화는 드디어 영화 자체에 대한 자그마한 논쟁을 낳고 있다.


어떤 이는 이 영화를 본 뒤 더 이상 공장 식 사육으로 생산된 육류제품을 먹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또 어떤 주류 업체는 ‘옥자의 근황’이라며 삼겹살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동물권과 관련된 논의는 우리에게 익숙지는 않은 이야기기도 하다.

 

‘봉테일’의 의도적 무난함


봉준호 감독은 이야기 안에 상징들을 배열해 영화 속에 또 다른 이야기를 구성하기를 좋아한다. <괴물> 속 괴물이 미 제국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은 사회나 역사에 조금 관심이 있거나 왕년에 운동께나 했던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살인의 추억>은 영화 속 사건만 조명하지 않는다. 그 사건을 둘러싼 공권력의 무능함, 더 나아가 군부정권의 폭력적 실체 등을 여러 상징을 통해 드러낸다.

‘봉테일’이라고 불렸던 봉준호 감독의 그런 장점은 그가 전 세계를 타겟으로 영화를 만들 때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설국열차>의 설정 그 자체는 매력적이었으나 더 숨은 이야기는 없었다. 설정이 전부고 명징하다.


꼬리 칸과 머리 칸으로 구분된 열차의 세계 속 사람들은 너무나 태연하게 감독과 이야기의 의도를 드러낸다. 그래서 <설국열차>에서의 아쉬움은 영화 자체의 아쉬움이라기보다는 봉준호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런 아쉬움은 이번 <옥자>에서도 이어진다. 자본의 의도로 잉태한 슈퍼돼지 ‘옥자’는 마케팅으로 활용될 목적으로 한국에 사는 한 아이의 품으로 돌아갔고 다시 같은 목적으로 아이의 품에서 끌려 나온다.


아이의 친구, 혹은 우량품종의 거대 고깃덩어리인 옥자는 전시를 위해 미국으로 끌려가고 옥자의 친구 미자는 옥자를 다시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미국까지 건너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인 ‘미자’는 자본주의의 민낯, 더 정확히는 공장식 축산의 잔인함을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된다.

미자의 눈을 통해 봉준호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민낯 그대로다. 황금돼지의 세계와 옥자의 세계는 시종일관 충돌하지만 결국 교환되며 제자리를 찾는다. <설국 열차>는 열차가 파괴되는 정도의 과격함이라도 있었지만 <옥자>에서 미란도사의 공장 울타리는 부셔지지 않았다. 그 정도만 차이를 보인다.


물론 상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중반에 미자가 서울을 찾았을 때, 미자와 대비되는 칙칙하고 (미자보다) 세련된 옷을 입고 꾸역꾸역 지하철 위를 오르는 평범한 직장인들의 모습은 공포에 떨며 무기력하게 도살장에 오르는 슈퍼돼지들과 비교된다. 우리와 옥자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 아래서 서로 피해자와 가해자로서 뒤엉킨 채 살아간다.


대의, 혹은 운동의 결실을 위해 ‘옥자’를 동원한 ALF. 그들이 요구한 ‘사명’을 품고 연구소에 끌려간 옥자. 그곳에 끌려갔다 막 풀려나온, 마치 고문 피해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옥자의 모습. 


동원된 ‘상징’이었던 옥자를 미란도의 손에서 구출해 나오다가 ‘블랙초크’에게 진압당하는 ALF 단원들의 모습. 이 일련의 과정은 우리가 불과 수십 년 전에 경험했었던 여러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뒤틀린 세계의 정상과 비정상들


<옥자>의 등장인물들은 늘 ‘과잉’의 상태다. 미란도 사의 얼굴인 MC 조니 박사의 목소리와 행동은 늘 격앙되어 있으며, 공장식 축산을 친환경적으로 포장하기에 바쁜 루시 미란도는 그의 이중적 태도에 일말의 거리낌도 없고 심지어는 그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믿는다.


ALF의 일원들은 그들의 대의를 위해 쉽게 타인에게 희생을 요구하며 착취한다. 심지어 그들은 그 일원 중 하나가 미자를 설득하는 통역 과정에서 거짓을 말했단 이유로 심한 폭력을 가한다.

봉준호 감독은 그 이유에 대해 <옥자>의 세계가 옥자와 미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비정상인 상황을 만화처럼 그려내고 싶어서였다고 설명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미자와 옥자 외에는 다들 좀 제정신이 아니게 그렸다. (그들을) 둘러싼 세상도 미쳐 돌아가는 느낌이었고. ALF(동물해방전선) 애들도 좀 이상하지 않나. 의도는 좋고 말은 번지르르한데 실수도 많이 하고 좌충우돌하고. 미쳐 돌아가는 정점에 있는 게 제이크 질렌할(죠니 윌콕스 역)이다. 쇼 비즈니스 세계에 쩔어 있는, 불쌍한 인물인데 제이크에게도 (요란하게)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원래 조용하고 내밀한 연기를 잘하는 사람인데 은근히 이런 연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웃음) 관객들이 보기에 극단적, 만화적이라고 느낄 수 있으면 오히려 그게 다행스럽다. CG 캐릭터인 옥자가 가장 절제돼 있고 사실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옥자가 만화(비현실) 같이 느껴지면 완전히 영화가 실패하는 것이니까.”

봉준호 인터뷰 중.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그 ‘과잉의 세계’는 지극히 정상이다. 귀엽고 예쁜 대형 동물 풍선을 들고 걸으며 소세지를 먹는 군중들, 비즈니스를 위해 작은 아이의 간절한 부탁마저 쉽게 외면하는 낸시 미란도.


미자의 눈에 비친 이 세계는 비정상으로 구현되지만 어디 그럴까? 발목이 잘려 목발을 짚고 방긋 웃으며 서있는 족발집 간판이나 자기네들의 ‘비즈니스 원칙’을 지키겠다며 더 큰 손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행을 반성하지 않는 기업들은 초현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은 미자의 세계를 비정상으로서 접한다. 우리는 서울 도심에서 거하게 사고를 친 미자와 옥자를 ‘기업의 영업을 방해하고 기물을 파손해서 막심한 손해를 끼쳤으며 역 내에서 난동을 부려 시민들의 통행을 방해한 한 소녀와 거대 동물’의 이야기로 저녁뉴스에서 접할 것이다.


<옥자>의 옥자와 미자, 그리고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간극. 혹은 닭백숙과 매운탕을 먹지만 옥자를 끔찍이 사랑하는 미자의 간극은 우리가 미자의 눈을 통해 목격한 세계와 스크린을 벗어나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우리의 일상. 정확히 그만큼의 간극이다.

 

봉준호식 디스토피아 혹은 봉준호식 희망 찾기


옥자를 찾기 위해 결국 도살공장까지 찾은 미자는 자신과 옥자가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의 ‘가족’인 옥자를 내놓으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낸시 미란도는 그런 낭만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며 거래를 거절한다. 결국 미자는 황금돼지를 내놓은 뒤에야 겨우 옥자를 살린 채로 살 수 있었다.

미디어는 수많은 옥자들이 생명체임을 조명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길러지며 어떻게 도축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먹는 고깃덩어리의 사연을 알 길이 없다. 옥자와 미자의 추억은 그들만의 것이며 그 추억은 황금돼지를 지불해야만 살 수 있다.


그게 자본의 냉혹한 법칙이다. 옥자의 구원의 대가로 전달된 황금돼지에는 피가 묻어있다. 옥자에게 피가 흘렀다면 그것은 닦을 수 없었겠지만 황금돼지의 피는 쉽게 닦을 수 있다. 우리는 깔끔하게 도축되고 피가 잘 닦인 고기를 돈을 주고 사먹는다.


모든 돼지들을 구원하겠다던 ALF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미자도, ALF도 옥자 하나밖에 구원하지 못했다. 세계는 너무도 단단해서 통째로 전복되지 않는 한 누군가 혼자의 힘으로 구원할 수 없다. 영화 내내 영웅처럼 그려졌던 미자도 자본의 세계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옥자를 구원한 미자는 다른 돼지들의 울음을 뒤로한 채 묵묵히 걸어 나온다. 봉준호식 세계의 흔한 결말이다. 하지만 봉준호는 전작 <설국열차>에서부터 작은 희망의 불씨는 남겨놓는다. 미자는 옥자와 더불어 작은 새끼 돼지를 하나 더 구원했고 ALF는 신입 대원을 맞고 세력을 점점 더 확장한다.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꾸준하게, 무기력하지만 어쨌든 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봉준호가 그리고자 하는 ‘희망’이며 우리가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사족


봉 감독의 영화에서 변희봉 선생은 늘 ‘희봉’이라는 이름을 갖고 등장했는데 왜냐하면 변희봉은 변희봉이기 때문이다. 와 진짜 변희봉 선생님 짱…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한국 씬은 굉장히 오리엔탈하다. 외국인들이 좋아하게 그려놨다.

옥자에서 가장 출연료를 많이 지불한 주인공은 바로 옥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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