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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89년생 김지영이 있다

조회수 2017. 6. 18. 18: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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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2017년생 김지영이라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아무도 없는 깜깜한 방 안에서 30분 동안 꺼이꺼이 울었다.


나는 왜 김지영이야. 왜 김지영이어서 이렇게 애쓰면서 살아야 해. 아무도 나한테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나는 왜 김지영이여서 힘든 거 힘들다고 말 못 하고 부당한 거 부당하다 싸우지 못하며 살았어, 왜! 하면서.


그렇다. 나는 89년생 김지영이다. 그리고 내 주변의 많은 지인들이 나에게 『82년생 김지영』이란 책을 읽어보라 권했다. 이 책이 마케팅을 활발하게 할 때부터 SNS를 통해 토막토막 내용을 본 적이 있어서 대충 짐작이 갔지만. 애써서 일부러 읽지 않았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새하얗고 쨍한 조명 아래에 서 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을까 봐, 무서워서 읽지 않았다.


그렇게 미루고 미뤄왔던 책인데, 왜인지 모르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주인에게 “나 『82년생 김지영』 좀 빌려줘” 라고 하니 “다 읽고 울지나 마라” 라는 소릴 들었다. 나는 절대로 안 울거라 다짐하며 책을 받아왔다. 그런데 왠걸, 책을 다 읽고 나는 아무도 없는 깜깜한 방 안에서 30분동안 울어야 했다.


지금은 토요일 밤 12시가 넘었고, 나는 집에 혼자 있다. 내 주변에는 냉장고 소리, 화장실에 팬이 돌아가는 소리와 내 타자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로 나는 지금 굉장히 내 자신의 감성에 집중하여 이 글을 쓴다. 내가 왜 울 수밖에 없었는지 말하고 싶어서.



89년생 김지영: 학창시절, 나는 계속 싸웠다


내가 30분 동안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학창시절의 내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소위 말하는 ‘야물딱진’ 첫째 딸이었던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반장이 뭔지 부반장이 뭔지도 모르고 “그거 내가 하겠다”고 했다. 반장이 되면, 부반장이 되면 엄마 아빠가 좋아할 것 같아서, 선생님이 예뻐해 줄 것 같아서 하겠다고 했다.

출처: JTBC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반장선거 때 나는 ‘부반장’을 해야 했다. 이유는 ‘반장은 남자애여야 하니까’였다. 그다음 학기, 나는 반장이 되고야 말겠다고 기를 썼다.


9월 첫째 주 주말에 내 생일 파티를 해야 하는데, 그다음 주가 반장 선거 기간이었다. 나는 생일파티를 가장한 뇌물파티를 했다. 반 친구들 모두에게 짜장면 한 그릇씩을 물리고, “얘들아 나 뽑아줘. 반장 되면 햄버거 쏠게.”라고 뇌물 공략을 썼다. 그리고 진짜 2학기 반장이 됐고, 모두에게 햄버거를 돌렸다.


그 이후 나는 학창시절 12년 내내 학급 반장, 회장을 한 해도 빼놓지 않고 계속했다. 만약 라이벌 친구가 있어서 1학기에 반장이 못 됐다면, 1학기 땐 부반장을 하고 2학기 때 기어코 반장을 했다. ‘여자애도’ 반장이, 회장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반장을 하면서 나는 남자아이들과 숱하게 싸웠다.  

너 왜 여자애들 괴롭혀!

날 때리면 맞서 때리고 싸웠다. 아니 주로 남자애들이 도망가고 내가 쫓아가서 때리면서까지 싸웠다. 여자애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면 안 되지, 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나에게 몇몇 남자애들은 ‘멋있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짝궁이었던 남자애는 ‘지영이가 멋있어서 좋다’고 고백도 했었다.


지영이는 다른 여자애들이랑 다르게 멋있다, 고 했던 말이 생생히 기억난다.



89년생 김지영: 성인이 된 이후 깨달았다, 나는 싸울 수조차 없다는 것을


대학교에 갔다. 학생회를 들어갔다. 본능적으로 권력 관계를 파악했다. 회장 ‘오빠’, 부회장 ‘오빠’ 나보다 한 학번 높은 과대는 여자였지만, 보통의 핵심 간부 주류 세력은 ‘예비역’ 위주로 돌아갔다. 예비역들은 따로 모이고, 따로 회의도 하고, 따로 교수님도 찾아뵙고, 따로 술도 많이 마셨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곳에서 싸울 수조차 없다는 것을.


그렇게 적당히 학교에 다녔다. ‘누구누구의 여친’으로 혹은 ‘누구누구의 전여친’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는 김지영인데, 씨발 내가 왜 누구누구의 여친으로 불려야 돼?’ 라고 친구들에게 가끔 짜증을 냈지만 내 귀에 직접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냥 무시해야지, 라고 생각하며 학교에 다녔다.

대학교 3학년 때, 자주 가던 동네 카페가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카페에 가서 취업 준비라는 명목으로 토익 공부를 하곤 했다. 내 얼굴을 알게 된 카페 사장은 내가 공부를 하고 있으면 슬쩍 와서 말을 걸곤 했다. 본인이 과거에 토익 학원 강사였다면서, 모르는 걸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정말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사장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장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자기가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때도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사장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폐쇄된 공간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사장은 밥을 먹으려고 간 게 아니었다. 자꾸만 손을 잡으려고 했고 어깨동무를 하려 했다. 내가 왜 이러시냐고 하니까 '너도 좋아서 온 거 아니냐'고 했다. 다시 생각해도 열이 받네.


그냥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그 사장은 허겁지겁 나를 따라 나왔고 내 손목을 잡았다. 어딜 가냐고, '너도 좋아서 왔으면서'. 하.

아니에요!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나는 그냥 무작정 지하철역으로 뛰어 내려갔다. 행선지도 모른 채 도착한 전철을 타버렸다. 세 정거장쯤 갔을 때 뒤에 나를 따라오진 않았겠지 확인하고 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역 밖으로 나가 육교 위로 올라갔다.


아무도 나를 따라오지 않고 정신이 차려졌을 때쯤 나는 다리가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나는 아무 뜻도 없었는데, 왜 나만 기분 나쁘고 나만 피해자가 된 것 같냐고, 기분이 더러워서 누가 보든 말든 주저 앉아 울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 카페에 가지 않았다. 그 사장이랑 친해지면서 그 사람의 아내와도 안면을 트고 지냈었는데 그 사장이 나에게 한 짓을 말해줘야 하나, 친구들과 고민을 해봤지만, 결론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였다. 나는 또 싸우지 못한 채 그 사건을 덮어야 했다. 버스를 타고 그 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한동안 심장이 쿵쾅댔지만 무뎌지길 바라면서.

출처: 중앙일보

그 후로 몇 년이 지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연애를 할 때 장거리 연애를 하느라고 밤에 통화를 길게 한 적이 많았다. 그 날은 서늘한 어느 여름밤이었는데, 덥다고 온 집안의 문을 다 열어놓은 탓에 통화하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동네 놀이터로 나가서 전화하려고 했다.


한 30분쯤, 신나게 통화를 했다. 나는 그 동네에서 20년 가까이 살았고, 나름 그 동네는 안전한 아파트 단지였기 때문에 안심하고 산책도 하다가, 그네도 탔다가 하면서 놀이터 주변을 빙빙 돌며 통화를 했다.


그러던 나에게 갑자기 어떤 남자가 훅 다가왔다. 뭐라고 말을 시켰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무슨 말을 했는데, 너무 놀라서 뭐라고 했는지 들리지 않았다. "아니에요!"라고 외치고 경비실 쪽으로 뛰어나왔다.


그러자 경비 아저씨가 나와서 나에게 이야기했다. 방금 말 건 사람이랑 아는 사이냐고. 나는 전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내가 통화하는 내내 그 남자와 놀이터 담장 밖에 있던 남자 한 명 더, 둘이서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다고 했다. 동태가 이상해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뭔가 수상함을 감지하고 그 남자들을 잡으려 경비 아저씨가 놀이터로 뛰어갔는데, 그 남자들은 담을 넘어 도망을 갔다. 아저씨는 '다 큰 아가씨가 야밤에 밖에서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된다'고 빨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놀란 마음에 집에 올라와서 부모님께 이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아빠가 노발대발하면서 '그러니까 왜 이 시간에 그렇게 오랫동안 바깥에 있냐'며 그 새끼들을 잡아야겠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물론 그 새끼들은 진작에 도망쳐서 없으니까 못 잡았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온 아빠에게 크게 혼났다.

늦게까지 돌아다니지마. 해 지면 으슥한 곳에 오래 있지마.

걱정스런 눈빛으로 엄마도 거들었다.

그러니까 왜 그랬어. 집에서 통화해도 되는걸. 네가 좀만 주위를 잘 살폈으면 안 그랬잖아. 밝은 곳에 앉아서 통화하지 왜 그랬어.

아니, 엄마 아빠가 혼내니까 나는 내가 잘못한 건가,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또 싸우지 않고 넘어갔다.



89년생 김지영, 싸우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울었다


내가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많이 울었던 이유가 이거였다. 나는 왜 그때 싸우지 않았을까.


나는 왜 대학교 때 '예비역만 모여서 의사결정하냐, 왜 과 회장은 예비역이여야 하냐'고 싸우지 않았을까? 나는 왜 그 카페 사장과 와이프에게 '유부남이 되어가지고 손님을 희롱하려 했다'고 싸우지 않았을까? 나는 왜 부모님에게 '놀이터에서 통화한 내 잘못이 아니에요, 그 새끼들이 못 된 거지'라고 싸우지 않았을까?


내가 그때 싸웠더라면, 89년생 김지영은 82년생 김지영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까? 그래서 나는 울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꿈이 있었다. 열심히 노력했다. 그 꿈에 가까워질 것 같았다. 그런데, 아기가 생겼다. 아기를 낳았다. 그래서,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2시간마다 한 번씩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틈틈이 청소와 빨래를 하며, 아기를 등에 업고 먹는 둥 마는 둥 밥을 먹고를 매일매일 반복한다.

손목에 염증이 생기고 허리 어깨가 쑤시고 아파서 잠깐 쉴 때, 직장 생활하면서 마시던 아메리카노 1,500원짜리 한 잔을 마시려고 유모차를 끌고 테이크아웃을 해왔을 때, 김지영은 듣는다. "요새 엄마들이란…."
출처: SK innovation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열 받는 부분이 많았지만, 참을 수 있었다. '참 리얼한 소설이네, 김지영 씨 고생이 많다'고 생각하며 잘 참았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무너졌다.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89년생 김지영이 82년생 김지영과 똑같은 과거를 살았듯, 89년생 김지영의 미래는 82년생 김지영의 미래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무서워서 무너졌다.



2017년생 김지영, 그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렇다면 2017년생 김지영이라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아닌 것 같다. 89년생 김지영이 충분히 싸우지 못한 탓에.


89년생 김지영이 '왜 회장은 예비역만 해요?'라고 싸우지 못해서, '내가 가만히 있는 게 왜 좋다는 뜻이에요?'라고 싸우지 못해서, '내가 납치를 당할 뻔한게 왜 내 잘못이에요?'라고 하지 못해서.


89년생 김지영은 2017년생 김지영에게 미안해서 울었다. 그리고 미안해야만 하는 현실이 억울해서 울었다. 싸우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김지영으로 살 수 없는 게 버거워서 울었다. '첫째 딸' 김지영으로서의 삶이, '맏며느리' 김지영으로서의 삶이, '와이프' 김지영으로서의 삶이 버거워서 울었다. 그리고 앞으로 새롭게 생길 '엄마' 김지영으로서의 삶 또한 무서워서 울었다.


나는 김지영이라는 내 이름이 너무 싫었다. 내 제일 친한 친구 중에 '지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만 7명'인 친구도 있다. 그만큼 지영이는 너무 흔하고, 그중에서도 '김' '지영'은 특히 더 흔해서, 너무 싫었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이 더 읽기 싫었다. 그 흔한 삶이 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이든, 89년생 김지영이든 비슷한 삶을 산다. 아니, 거의 같은 삶을 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삶을 산다.

출처: DAUM 책

그렇다면 나는, 89년생 김지영이 아닌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 삶을 꾸려갈 수 있을까? '89년생 김지영'이 아니라, 그냥 김지영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꾸릴 수 있을까? 그것 또한 잘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부끄럽지 않은 89년생 김지영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살면 오늘 같은 눈물을 안 흘릴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원문: 지영킹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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