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콘텐츠는 감정이 너무 과하다

조회수 2017. 6. 6. 10:4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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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떠먹여 주려고 한다. 설명충처럼.

시작하며


TV를 틀어서 한국 드라마를 보자면 도저히 차분해질 수가 없다. 거의 항상 울고, 울지 않으면 화를 내고, 화를 내지 않으면 행복에 겨워서 날뛴다. 조울증에 빠진 것 같다.

출처: SBS
✨눈물이 멈추지 않아…✨

감독들은 한 캐릭터의 감정을 전달해주기 위해 음악을 이용하는데, 한국 드라마에서는 음악이 도무지 끝나지를 않는다. 1시간짜리 드라마에 55분 정도는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 감독들은 너무도 편리하게 음악으로 감정씬을 처리하려고 한다. 쪽대본 때문일까? 그럴 것 같지 않다. 오히려 한국적 특징에 가깝다. 한국 콘텐츠는 대체로 감정적이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고 예능도 마찬가지다. 



감정 과잉의 예능


영화, 드라마, 예능을 포함해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 콘텐츠는 감정이 과잉되어 있다. ‘나는 가수다’를 기점으로 한국에선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을 예능에 많이 등장시켰다. ‘불후의 명곡’과 ‘복면가왕’, 그리고 최근에는 ‘팬텀싱어’까지.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와 그 노래가 나가는 프로그램들은 거의 항상 두 개의 코드를 관통했다. 하나는 감동 코드고 하나는 경쟁 코드다(경쟁 코드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해당 프로그램에선 노래가 평가의 대상이었는데 얼마나 높게 잘 지르고 감정에 잘 호소하는지가 주로 평가대상이 되었다. 평가는 물론 시청자나 특정 프로그램에 방문한 자들에 의해 직접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PD라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PD는 계속해서 노래를 ‘더 감동적이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프로그램 연출자인 PD(디렉터이면서 왜인지 프로듀서로 불리는) 자들은 노래를 평가함에 있어 직접 개입하고, 특정 감정을 만들어내려고 온갖 수를 동원한다. 카메라로 가수를 보여주고, 조명을 때려주는 것을 넘어서 PD는 노래에 직접 개입을 한다.


알리가 노래를 부를 때 PD는 김구라의 감탄을 넣기도 하고, 가면을 쓴 누군가가 가창력을 내지르면 또 다른 PD는 이번엔 이윤석이 감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나아가 매초 반짝거리는 자막을 넣는다. “놀라운 고음!” 감동 코드. 뭔 말인지 알겠나. 한국 연출자들의 특징이다. 계속 떠먹여 주려고 한다. 설명충처럼. 보는 입장에선 숨 쉴 틈도 없고 생각할 틈도 없다.

출처: MBC
고음! 고음!!! 고음!!!!!! (대박… 감동…)

프로그램에 오래 남고 싶었던 가수와 시청자들이 그런 걸 좋아한다는 걸 아는 가수들은 감동 코드를 위해서 일단은 잠잠하게 노래를 시작한 뒤, 나중에 폭발적인 가창력을 뽐냈다. 이런 식으로 노래 부르는 걸 즐기는 가수는 박정현인데, 지금은 박정현을 포함한 대부분의 가수들이 해당 루틴을 따른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끝이 명확해야 사람들이 좋아한다’라는 식의 말을 하는데, ‘한국 예능’ 나오는 음악들은 대체로 같은 루틴을 따르고 있다. 시작과 끝이 명확하다. 그리고 그것은 감동을 위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진다. 예능은 시청자들에게 어떻게든 감동을 주려고 한다. 아니, 한국의 콘텐츠 크리에이터는 대체로 다 그런 느낌이다. 가수나 PD나 영화감독이나 예외는 있을지언정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원자력 발전소 재해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일본 영화 ‘신 고질라’(안노 히데아키 감독)는 무능한 행정을 건조하게 다루는 데 반해 한국 영화 ‘판도라’(박정우 감독)에선 자식을 잃은 어머니와 남친을 잃은 여친의 울부짖음에 더욱 촉각을 세운다.


‘판도라’도 ‘신 고질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무능한 행정을 다루긴 한다. 그런데 심지어 그것을 다룰 때조차도 감정적이다. 음악을 꽉꽉 채워서 어떻게든 분노하게 만들고 슬퍼하게 만든다.

영화 ‘판도라’. 이 스틸컷에서도 울고 있다.

타임라인에 꽉 채워지는 음악과 액션


영화나 드라마에서 음악을 쓰는 이유는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음악을 쓸 때는 ‘음악을 쓰지 않는 것’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데, 침묵(mute) 그 자체도 일종의 음악으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본 슈프리머시’에서 제이슨 본이 한 남자와 격투를 벌일 때 음악이 삽입되지 않는데, 이는 그 자체로 긴장감을 형성해준다. 이는 하나의 전통으로서 ‘본 얼티메이텀’과 ‘제이슨 본’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본 아이덴티티’는 감독이 다르고, 액션과 함께 음악도 쓰인다).


아래는 순서대로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제이슨 본’의 액션 클립이다.

위에서 언급한 본 시리즈 액션신에서는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현장음(물론 후시겠지만)을 활용하기에 관람객이나 시청자들은 더욱 상황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된다.


한 사람이 면도칼을 들면 비단 비주얼로서만이 아니라 사운드를 통해서도 그것을 더욱 명확하게 인지하게끔 만들어준다. 또한 음악이 상황을 공지(notice)해주지 않기에 상황을 지켜보는 입장에선 긴장하고 현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감독은 굳이 떠먹여 주지 않는다.


우리나라 첩보물에서 액션할 때는 어떨까? 음악을 전체적으로 다 깔아놓는다. 음악을 발라 놓다 보니까 액션 그 자체보다는 액션이 이루어지는 상황의 급박함에 좀 더 관심이 가게 된다. 이것이 의도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연출가가 의도했을 수도 있지만, 그냥 관성대로 남 따라 연출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필자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둔다.


아래 ‘아이리스’의 액션 장면을 보자. 

‘아이리스’의 액션 신을 보면 음악 사운드가 엄청나게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음악 사운드가 너무나 커서 상황이 급박하다는 건 인지할 수 있지만 액션 하나하나의 무게감은 별로 와닿지가 않는다. 예를 들어 김태희가 연기한 캐릭터는 복면가왕 아재를 나름 빡세게 패고는 있는데 별로 아플 것 같지가 않다. 그 가벼움은 감독이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복면가왕 형님의 액션도 마찬가지다. 복면가왕 형님도 나름 팬다고 패고 있고 나름 맞기도 엄청 맞고 있는데 딱히 와닿지가 않는다. 복면가왕 때문에 김태희가 힘겨워한다는 건 그저 김태희의 비명소리를 통해서나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음악은 조금도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 음악 혼자 너무 존재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름 둘 다 땀 빼면서 빡시게 찍었을 텐데 음악이 그걸 다 덮어버리고 있다. 음악이 다 먹어버리니까 그 외의 요소들은 덮이는 것이다. 이 장면 같은 경우엔 음악을 완전히 빼거나, 급격하게 낮추는 것을 통해 보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그 라이먼의 ‘본 아이덴티티’나 류승완의 ‘베를린’ 속 액션 장면처럼.

‘본 아이덴티티’의 장면을 볼 때 음악이 입혀져 있다는 것은 그것을 인지하고 있을 때에야 알 수 있다. 음악은 그저 장면의 긴박함을 서포트하는 데에만 그 역할이 있다는 듯이 아주 사소하게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해서 액션영화의 메인인 액션에 더 많은 관심이 가게 된다. 그들이 이용하는 칼이나 펜과 움직임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아이리스’에서처럼 대놓고 “야! 급해! 너무 급한 상황이고 위험한 상황이야!”라고 강하게 주입시키지 않으면서도 액션신을 훌륭하게 만들어낸다.


‘베를린’의 액션신에선 음악의 비중이 좀 더 올라간다. 사운드가 더 커졌다. 그럼에도 ‘아이리스’의 그것보단 사소하게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이리스 2’의 장면을 보자. 스킵하지 말고 끝까지 보시라.

‘아이리스 2’의 장면은 어떤가? 음악이 서포트하는 것을 넘어서 상황 자체를 직접적으로 설명해주기까지 한다. 이범수가 건물 아래에서 떨어지며 액션신이 종료되었다는 해설까지 음악이 담당해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악이 스토리의 시작과 끝을 친절하게도 다 설명해주고 있는 상황이다. 설명충. 한국 드라마의 특징이다. 굉장히 친절하다. 너무도 친절해서 시청자는 추측하거나 생각할 여지가 조금도 없다. 빈틈없이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타임라인에 꽉 채워지는 음악과 감정 과잉


많은 이의 기억에 아직 남아 있을 드라마를 교보재로 삼아보자. ‘도깨비’. 필자는 참고로 이 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 보지도 않았다. 다 보려고 노력했으나 오글거려서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고삐리가 “칼이 보여요!”하고 칼을 뽑을까 말까 간 보는 중에 멈췄다. 낌새는 계속 주는데 뽑을 생각을 않더라.


‘도깨비’는 여러모로 비판할 구석이 많은 드라마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이 남발되어서 개연성은 처참한 수준이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도깨비와 저승사자의 초능력은 딱히 등장할 필요가 없는 후까시인 게 많다. 완벽성은 뺄 게 없는 상태인데 ‘도깨비’는 뺄 게 너무도 많은 드라마였다.


하지만 이 글은 ‘도깨비’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드라마인지 밝히는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한국 드라마가 얼마나 감정이 꽉꽉 차 있는지를 밝히기 위한 소재로서 ‘도깨비’를 인용할 뿐이다.


음악의 비중에 대해 설명하는 이유는, 감정을 꽉꽉 채우는 수단으로서 음악이 활용되는데 한국 드라마에선 그 음악이 멈출 때를 모르기 때문이다. 음악이 멈췄다 하면 나오고, 또 멈췄다 하면 나온다. 감독은 끊임없이 떠먹여 주려고 한다. 아래 장면을 보자.

도깨비가 칼이 뽑히며 사라지는 장면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이별(사별?)하게 되는 장면이라 누가 슬프다고 알려주지 않아도 슬픈 장면이다.


연출가에겐 이때 두 가지의 옵션이 있다. 상황 자체가 어차피 슬프므로 굳이 음악을 쓰지 않을 수도 있고, 슬픔을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로 음악을 쓸 수도 있다. 한국 드라마의 연출가들은 거의 항상 후자를 선택한다. 음악이라는 MSG를 듬뿍 담아 넣는다. 


해당 장면에서는 2개의 음악이 사용된다. 처음엔 잔잔한 음악이 사용되다가 점점 볼륨이 커지는데, 그 음악이 끝나자마자 가사가 담겨있는 두 번째 음악이 치고 들어온다. 음악이 슬픔을 강조하고 있는 사이에, 촬영은 어떨까? 똑같은 걸 한다.



클로즈업


한국 드라마를 촬영하는 사람들이 항상 쓰는 샷이 하나 있다. 클로즈업. 몸이 잘린 채 배우의 얼굴은 화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클로즈업을 활용하는 이유는 캐릭터가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을 더 직접적으로 전달해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한국 드라마는 감정적인 장면일 때도 클로즈업을 활용하고, 그렇지 않을 때도 클로즈업을 활용한다. 어떻게든 감정을 쥐어짜려고 한다. 클로즈업을 쓰지 않을 때는 김치로 싸대기를 때리는 특정한 액션의 결과를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 때나 삼성 에어컨을 보여줄 때뿐이다.

한국 드라마의 명장면

감정적인 콘텐츠


장사에는 용이할 수 있다. 그런데 메시지가 약해질 위험도 동시에 존재한다. ‘판도라’는 원자력 발전소를 다루는데 선악 구도까지 심어놔서 상당히 유치하다. 유치한 선악 구도 자체가 영화스럽기에 대부분 다른 요소들도 현실적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영화스럽게 느껴진다. 게다가 원전으로 목숨 잃은 자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거나 그로 인해 가족을 잃은 자들을 보여주면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니 원전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게 만든다.


물론 다큐가 아니기에 객관적일 필요는 없다(다큐 또한 객관적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원전이라는 소재를 다룸에 있어서 어떤 논쟁을 만들려는 게 목적이라면 ‘판도라’는 실패했다. 너무도 감정적이어서 원전 그 자체의 위험보다는 원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자들이 주인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원전의 위험을 밝히는 영화의 목적은 달성했나? 나는 잘 모르겠다.


감정적으로 무엇을 좋아하게 만들거나 싫어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하나의 연출 방법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한 걸음 떨어져서 무엇을 보게 만드는 것 역시 하나의 연출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떻게든 감정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특히 이런 현실적이고 시사적이고 문제적인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은 더욱 그런 경향을 보인다. ‘실미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도가니’나 ‘소수의견’ 등등이 여기에 해당하고 국뽕 영화 ‘국가대표’ 시리즈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포스터의 타이포그래피조차 감정적이다.

최근 시사적이면서 문제적인 이슈를 다룬 박찬욱의 ‘아가씨’는 차라리 건조하다. 박찬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노동 문제를 다루는 ‘복수는 나의 것’이나 북한 문제를 다루는 ‘공동경비구역 JSA’나 자본주의를 다루는 ‘친절한 금자씨’나 종교 문제를 다룬 ‘박쥐’도 딱히 감정적으로 관객에게 무언가를 떠먹여 주지 않는다. 관객이 숨 쉴 틈을 준다.


재밌는 건 감정적인 무엇으로 감동을 이끌며 관객을 끌어들이는 감독들이 연출적으로 이렇다 하게 평가받지는 못한다는 거다. 장사는 되지만, 장사만 되는 듯하다. 대표적인 예로는 ‘해운대’를 연출한 윤제균 감독을 들 수 있다.


원문: 박현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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