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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률 12주기: 핵피폭은 인류의 미래다

피폭 피해자들에 대한 의학적 조사와 대책 마련은 우리 인류의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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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핵폭탄 피폭 피해자 1세 이곡지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터졌다. 전체 피폭자는 69만1,500명이었고 폭사한 사람은 23만3,500명이었다. 살아남은 피폭자는 45만8,000명이다.


조선 사람은 7만 명이었는데 4만 명이 폭사했으며 3만 명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조선 사람들 가운데 2만3,000명은 한국으로 돌아오고 7,000명은 일본에 남았다.


살아남은 조선인 피폭자 가운데는 다섯 살배기 이곡지(李曲之)도 있었다. 히로시마 후나이리가와구치(舟入川口) 정(町)에서 피폭되었다. 아버지와 언니는 바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와 이곡지와 여동생은 살아남았다.

이곡지는 어머니 고향인 경남 합천에 돌아와 친척들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다. 그러다 두 살 많은 김봉대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한 뒤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곡지는 살아남은 다른 조선인 피폭자와 마찬가지로 관리와 보호를 거의 못 받았다. 일본 정부가 그러했고 한국 정부는 더욱 그러했다.


2. 핵피폭 유전병을 타고난 넷째아들


이곡지의 자녀 가운데 넷째가 형률이다. 1970년 7월 28일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동생도 있었는데 두 살도 되기 전에 폐렴으로 죽었다. 이곡지는 그 뒤에 여자아이를 하나 더 낳았다.


형률은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을 앓았다. 어머니가 1945년 히로시마에서 핵폭탄에 피폭되는 바람에 생겨난 유전병이었다. 허파가 80% 기능을 잃은 상태였고 폐렴이 스무 차례 넘게 재발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건강하게 태어났다. 핵 피폭 유전병은 대를 이어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를 걸러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무서운 핵 피폭 유전병이다. 형률 또한 일본 정부로부터도 한국 정부로부터도 제대로 된 관리와 보호를 받지 못했다.


3. 인간답게 살기 위한 김형률의 투쟁


5월 29일은 김형률(1970~2005)의 12주기가 되는 날이다. 김형률은 2002년 3월 22일 우리나라 처음으로 스스로를 원폭 피해자 2세 환자라고 밝혔다. 김형률의 커밍아웃은 ‘핵폭탄 피폭에 따른 유전 문제’를 우리나라와 일본 등에서 국제적으로 공론화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그 뒤 ‘한국 원폭 2세 환우회’를 이끌면서 2003년 8월 5일 ‘원폭 2세 환우 공동대책위원회’와 함께 국가인권위원회에 원폭 2세 환우들의 생존권 보호와 인권회복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인권위는 2004년 8월 한국인 원폭 피해자 1·2세들의 실태 조사에 들어가 2005년 2월 14일 ‘원폭 피해자 2세의 기초현황 및 건강실태조사’를 발표했다.


전국 원폭 피해자 2세 1,226명에 대한 우편 설문조사에서는 빈혈·심근경색·협심증 같은 만성질환과 우울증·정신분열·암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정도가 부모가 피폭당하지 않은 또래보다 크게 많았다. (심장 관계 질환은 80배 이상, 우울증은 70배 정도, 조현병은 20배 정도)


원폭 피해자 1세 1,092명의 자녀 4,090명에 대한 정보 분석에서는 299명이 이미 숨졌고 이 가운데 절반을 넘는 156명이 10살도 되기 전에 죽었으며 사망 원인조차 불분명한 경우가 182명이었다. 생존해 있는 원폭 피해자 2세 중에서도 19명이 선천성 기형과 선천성 질병이 있다고 답했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핵폭탄 피폭 피해자 1·2·3·4세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알려졌다. 김형률이 자기 목숨을 걸고 애쓴 덕분이었다.


김형률은 2005년 4월 12일 한국 원폭 피해자 협회·한국 원폭 2세 환우회 이름으로 국회에 청원을 내어 ‘한국 원자폭탄 피해자와 원자폭탄 2세 환우 등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아직 제정되지는 않았다.)


이어 5월 19~21일 <‘전후 60년’ 피해자와 함께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국제회의>(일본 도쿄)에 참석해 한국인 핵폭탄 피폭 피해자 2세의 실상을 일본에 알렸다. 그러고는 24일 일본에서 돌아와 선천성 질병에 시달리다 닷새 뒤 서른다섯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김형률이 세상을 떠난 뒤 2005년 6월 국회의원 79명이 ‘원폭 피해자 문제 해결 촉진을 위한 대정부 결의 안’을 발의했다. 8월 4일 국회의원 22명 이름으로 ‘원자폭탄 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되었고 국회에서 ‘원자폭 탄피해자 증언대회’가 열렸다.


4. 핵피폭 유전병에서 벗어나기 위한 김형률의 몸부림


2015년 김형률 유고집 <나는 反核人權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가 나왔다. 엮은이 아오야기 준이치는 이 책에서 이렇게 김형률의 인생을 정리했다.


김형률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기마다 감기로 한 달 이상 결석을 했다. 중학교 다니면서는 1학년 때부터 급성폐렴으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몸이 아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1989년 ‘새마음 야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1995년 25살 폐렴으로 부산 침례병원 등에서 세 차례 입원치료를 받았다. 병명은 ‘면역글로불린 M의 증가에 따른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이었다.


1997년 3월 집에서 가까운 동의공업전문대학 전산학과에 입학했다. 마지막 학년 2학년 때는 학과 연구실에서 일할 수 있었다.


1998년 김형률은 졸업하고 반년 만에 창원 벤처기업에 취직해 업무용 프로그램 개발 업무를 하게 되었다. 일정 기간 무보수로 일하는 조건이었다. 경력을 쌓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지만 5개월째 들어 쓰러졌다.


2000년에는 홈페이지 제작 업체에 다시 취업했다. 2개월 지날 즈음 열이 나고 기침이 멈추지 않는 등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그만두었다. 그 뒤 재택근무가 가능한 웹디자인 전문학교에 등록했다. 작품 완성을 눈앞에 둔 2001년 5월 급성폐렴이 재발하여 6월까지 한 달 남짓 병원에 입원했다.


2002년 9월 25~10월 12일 부산대학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고 퇴원하고도 통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10월 17일 객혈이 다시 시작되었다. 병원에 입원했으나 객혈은 보름 가까이 이어졌고 11월 29일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03년 1~2월에는 열이 39도까지 올랐다. 혈구를 만드는 ‘조혈모세포’ 기능이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왼쪽 귀에서 고름과 점액이 흘러내려 고막에 구멍이 생겼다. 청력을 잃지 않으려고 돈이 많이 들었는데도 수술을 했다.


3월 16일 폐렴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히로시마 핵폭탄 투하 이틀 전인 8월 4일 담당 의사가 말렸지만,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갔다. 다음날 한국 원폭 2세 환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내기 위해서였다.


10월 19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주선으로 서울에 있는 녹색병원에 입원하였다. 생애 처음으로 ‘치료비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었지만 한 달 반으로 짧았다. 2004년 1월 또 객혈하고 부산대학병원에서 다시 기관지동맥 색전술을 받아야 했다.


2004년 7월 21일 일본 나가사키현이 의사단을 합천에 보냈다. 한국 피폭자에 대한 건강진단이 목적이었다. 김형률과 원폭 2세 환우 6명, 가족 15명은 피폭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건강진단을 받을 수 없었다.


2004년 9월 1일 한국 원폭 2세 환우회의 첫 모임이 합천 원폭 피해자 복지회관에서 열렸다. 김형률과 그 뒤 2대 회장 정숙희씨와 3대 회장 한정순씨 등 14명이 참가했다.


한 회장은 당시 김형률이 “작고 마른 체구로 무더위 속에 점퍼를 입고 있었으며 목에 수건을 감고 기침을 계속하면서 준비한 자료를 나눠주고 힘들게 얘기를 했다”고 기억한다.


2004년 9월 9일 부산대학병원에서 주사를 맞다가 쇼크를 일으키고 혈압이 떨어지면서 보름 정도 입원했다. 2004년 12월 25일 갑자기 객혈이 심해졌고 병원에 입원하여 연말에 기관지동맥 색전술을 또 받았다. 입원은 2005년 1월 11일까지 이어졌다.


2005년 4월 11일부터 50일 동안 김형률은 경기도 군포에 머물렀다. 부산의 아시아평화 인권연대 정귀순 대표가 마련해 준 거처였다. 서울 활동을 위해서였다. 김형률은 이 기간 아버지와 함께 ‘원폭 피해자특별법’ 제정에 활동을 집중했다.


5월 들어 20일 남짓은 자동차·기차·비행기로 한국과 일본을 분주하게 오가는 나날이었다. 설명회·공청회 바쁜 일정이었다. 24일 일본에서 돌아온 뒤 5일째 되는 29일 아침 김형률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5. 핵피폭 유전병은 인류 미래의 문제


우리나라에는 핵 피폭 1세대도 많지만 핵 피폭 2세대, 그리고 3세대도 많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2015년에야 비로소 좀 알게 되었다. 핵 피폭 2·3세대에는 김형률처럼 질병과 고통을 유전으로 받은 사람도 많고 김형률 형제처럼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도 많다.


하지만 아무 탈 없이 태어난 사람도 그 자식들은 선천성 기형이 있거나 선천성 질병을 앓을 개연성이 있다. 핵폭탄 피폭 피해자 1세와 그 2·3·4·5세……들은 단 한 사람도 선천성 기형과 선천성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핵폭탄 피폭 피해자 1세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금은 90%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이들은 여태껏 세상으로부터 제대로 된 관심과 보상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고 죽어갔다. 그 2·3·4·5세……들에게까지 무관심과 냉대를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핵폭탄 피폭 피해자들을 위한 충분한 보호와 관리는 일제 강점의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울러 아무 잘못도 없이 고통을 무릅쓸 수밖에 없게 된 핵폭탄 피폭 피해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인도적인 이유도 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이미 전 세계 모든 인류가 핵 피폭 위험(이미 현실이 된 부분도 있다. 일본 후쿠시마핵발전소 폭발 사건과 소련 체르노빌핵발전소 사건 등이 그것이다.)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스물다섯 개 핵발전소가 동해안과 서해안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김형률은 핵 피폭으로 말미암아 유전으로 전해지는 선천성 기형과 선천성 질병이 이미 이렇게 현실로 다가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아무 대책 없이 방치되어 있다. 다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가리고 숨길 따름이다.


핵폭탄 피폭 피해자 1세와 그 2·3·4·5세……들에 대한 의학적 조사와 대책 마련은 우리 인류의 미래 운명과 직결되는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이들에 대한 치료와 보호 없이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김형률조차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원폭 2세에 대해 현재 수준에서 검사 가능한 분자 유전학적 조사를 하고 동시에 미래 유전학 지식이 보다 발전할 경우를 대비해 원폭 2세의 유전자 샘플을 채취·보관할 필요가 있다.” 나는 대한민국 국가와 정부 기관이 이에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경남에는 합천을 비롯하여 핵폭탄 피폭 피해자 1세와 그 2·3·4·5세……들이 특히 많이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경남도도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경남도민일보도 해야 할 일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남먼저 나서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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