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파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조회수 2017. 5. 30. 17: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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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과 그럴듯하게 홍보를 잘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CSR은 단순한 PR이 아니다.


며칠 전 르완다 출장길에 ‘술 파는 사회적 기업’을 다룬 기사를 보고 새벽잠을 설쳐가며 블로그 글 (술을 파는 사회적 기업?)을 써 올렸다.


그랬더니 페친 가운데서 소주(주정) 제조용 고구마를 생산하는 농부는 어떤가 하는 아리송한 질문도 나왔고, 가톨릭에서 성찬용으로 쓰이는 포도주는 어떻게 하냐는 등의 본질과 관련 없는 질문도 나왔다.


내 답변은 대략 이렇다. 제품이나 서비스가 사회적 기업에 맞는지를 판단하려면 그것들의 원래 목적이 무엇이냐를 보면 된다. 성찬용 포도주는 취하자고 만들지 않는다.


그걸 마시고 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 잘못이지 포도 재배 농부나 포도주 생산업자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일반 술을 제조한다면, 그건 취하려고 만드는 술이다. 그걸 마시고 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는 변명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리고, 업의 본질이 사회적으로 맞지 않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면서 아무리 착한 짓을 한다해도 ‘사회적’이란 표현을 쓸 수는 없다. 술은 아무리 포장해도 술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 같은 신문에서 좀 더 오래된, 그러나 더 위험한 기사를 만났다. 2017. 3. 28.자 조선일보 공익 섹션 더 나은 미래에는 자꾸만 보고 싶은 글로벌 기업 ‘CSR 보고서’ 라는 제목으로 해외 유명 기업들의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기획 의도를 무색게 하며 등장한 첫 번째 사례가 ‘하이네켄’이다. 왜 또 술이냐… 다시 말씀드리지만 나는 음주를 혐오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음주를 권하는 것은 께름칙하게 느끼며, 음주를 미화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기사에서는 ‘Let’s Get Frank(솔직해지자)’라는 동영상을 소개한다. 네덜란드 인기 래퍼 ‘케빈 블랙스타(Kevin Blaxtar)’가 등장해, ‘2008년부터 물 소비량을 26% 줄였다’,


‘아프리카 농부 12만 명의 작물 생산을 지원했다’는 둥 자랑하면서 ‘하이네켄(Heineken)’의 2015년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홍보한다고 한다. 중요한 건 이걸 랩(!)으로 했다는 거다.


더 나은 미래는 보고서 다운로드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면서 이 영상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고 전한다.


힙합 마니아들은 랩 소재를 위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탐독(?)했고, 소비자들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36%까지 줄이는 등 책임경영을 지속해온 국민 맥주 하이네켄을 응원(!)했다고 한다. 더 나은 미래가 평가하기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객의 눈높이에서, 고객을 위한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정보를 고심하고 소통한 덕분이다.”

솔직히 말해 여기까지 기사를 읽으니 첫 느낌이 쏴아~했다. 요새는 랩으로 대학 졸업논문도 쓴다고 하니 (하버드대 학생, 학사 논문으로 ‘랩 앨범’ 제출…우등 졸업)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라고 랩으로 못쓸 것 같지는 않다.


또, 원소 주기율표, 서울구치소 식단, 박카스 성분, 서울 지하철 3호선 역 이름, 불닭볶음면 조리법 등을 낭독해주는 팟캐스트가 우리나라에도 있는 걸 보면, (원소 주기율표·구치소 식단… 아나운서가 뭐든 읽어드립니다)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는 엄청나게 랩 친화적 문장임에 틀림없다. 믿는다.

요새 팟캐스트에서 읽어주는 것 가운데 가장 독특한 소재. 대한민국의 다양성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책임경영을 지속해온 국민 맥주 하이네켄을 소비자들이 응원했다는 말은 믿기지 않는다. 솔직히 이 글을 쓴 기자가 현장에 가서 인터뷰하고 쓴 글 같지가 않아서이다.


아마도 현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옮기지 않았나 싶은데, 네덜란드에도 ‘보도자료’에 기대는 게으른 기자가 있었을 것 같다.


그 동영상이 자기 회사 직원들도 읽지 않았을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래퍼들로 하여금 읽게 만들었을까? 진짜?? 그렇게 감동적일까???


백문이 불여일견. 얼른 유튜브를 찾아 봤다. 2분37초짜리 동영상이 재깍 검색되어 나온다. 앞에서 30초쯤 얼굴이 낯선 아프리카계 출연자가 뭐라 읊조리더니, 그 뒤부터 동영상은 본색을 드러낸다. 다음은 중간중간 잘라낸 장면들이다.

찬란한 맥주 거품이 광명을 연다
벽에 비치는 물은 그 뒤 양조장에 공급되는 모양이다
전체 매출에서 저알콜 제품이 5%나(!) 되는 걸 자랑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맥주의 세계로 인도한다
화면 속의 친구가 맥주를 권한다
급기야 맥주는 현실에서 도열한다
결국, 대미는 거품 가득한 하-이-네-켄이 장식한다
주인공인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는 쿨하게 마지막 순간 약 1~2초 등장한다

더 나은 미래가 극찬한 동영상의 실체는 이렇다. 이 동영상을 보고 지속가능경영 보고서가 읽고 싶어졌다고? 내가 랩을 잘 몰라서 그런지 별로 믿기지 않는다.


원래 래퍼들은 지적으로 약간 변태적인가? 이 동영상을 보면 그냥 세련된 이미지의 맥주,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어지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그냥 맥주 광고다. 더군다나 “우리는 착한 맥주니까 이걸 마시면 너도 착한 소비자가 되는 거야. 멋지지 않냐!” 이렇게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술 광고치고는 세련되고 독특하다. 그렇지만 술 광고다.


더 나은 미래의 기사를 다시 잘 살펴보자. 네덜란드 소비자가 열광한 것은 하이네켄의 사회적 책임을 지는 자세가 아니다.


그걸 홍보하는 멋진 동영상에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래퍼들도 하이네켄의 지속가능경영이 어떤 지 궁금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잘 모르지만 뭔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 같은, 랩으로 만들었을 때 멋져 보일만한 소재에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이건 총체적으로 CSR팀의 승리가 아니라 홍보(또는 PR)팀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지난 글에서 술을 파는 사회적 기업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술은 합법적이지만 오갈 데 없는 죄악상품이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법적 책임 그 이상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어떤 술 파는 기업이 다른 술 파는 기업보다 좀더 환경을 보호하고 아프리카 농부를 돕는다고 사회적 책임을 잘 진다고 하는 것 역시 그래서 틀린 말이다. 그럴 수는 없다. 게다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과 그럴듯하게 홍보를 잘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죄악상품을 판매하는 사회적 기업은 세상에 없다.

죄악상품을 판매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반기업 역시 세상에 없다.

원문: 개발협력에 마케팅을 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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