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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4년 안산에서 의경으로 근무했다

조회수 2017. 4. 22. 15: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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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에서 세월호는 빼놓을 수 없는 단어였다.

의경으로 군 복무를 했다. 638일을 그곳에서 보냈다. 2016년에 전역했고 전역하기 전까지 경기도의 모 부대에서 근무했다. 행정병으로 근무했고 행정반으로 차출되기 전까지 일반 소대에서 근무했다. 나는 14년도 여름 군번이었다.


입대 몇 달 전, 14년도 봄에 그 배는 가라앉았다.

 


2014년 4월 16일

나는 입대를 기다리는 휴학생이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알바를 하며 술값과 여행비를 벌었다. 그 날은 할머니가 많이 아프셨다. 모시고 집 근처 큰 병원에 택시를 타고 가고 있었다. 택시에서는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제주도로 가던 배가 진도 인근 해안에서 가라앉는 중이라고 했다.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과 일반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구조작업이 이뤄지는 중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후 할머니의 진료를 기다리며 보던 TV에서는 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고 했다. 이는 오보였고 많은 승객이 아직 배 안에 있었다.

 


2014년 6월 어느 날


훈련소에서 사격을 잘 못 했다.


경기도나 서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2014년 7월


훈련소를 수료하고 자대배치를 받았다. 경기도의 모 부대였다. 분향소에는 유족들이 있었다. 그곳에 가서 우발상황을 대비한 근무를 선다고 했다. 항상 방범 순찰을 한다고 했다. 겁났다. 어떤 위험한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도시를 바라보기 두려웠다. 아직 내 눈으로 보지 못해 막연히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걱정했다. 그 도시와 학교, 그리고 학생들과 남겨진 자들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며칠 후에 바로 근무에 투입될 것이다.


근무복을 다리고 구두를 닦았다. 날씨가 무더웠다.

 


2014년 여름


방범이 시작됐다. 주 근무지는 그 도시 일대였다. 때로는 주택가에서, 때로는 그 학교 주변에서 순찰을 돌았다.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내 우려가 무색할 만큼 그 도시는 다른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날씨가 좋으면 재잘대는 아이가 있는 가족들이 밖에 있었다. 편의점에서 가끔 마주치는 시민들은 수고한다며 음료수를 사주기도 했다. 때로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들었다.


학교는 고요했다.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기자들이 자주 왔다. 나는 그들이 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학생들을 인터뷰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냥 그들을 그대로 두기를 바랐다.

 


2014년 8월 14일

출처: 뉴시스

광화문에서 시위가 있었다. 전국의 의경 중대와 경찰관 기동대가 모였고 나는 앉아서 대기하다 무전이 터지자 완전 진압복을 입고 방패를 들었다. 무전기가 쉴 새 없이 터졌고 진압 대형을 갖췄다. 내 뒤에는 진압봉을 든 분대가 대기했다. 목이 탔다. 앞에는 분노한 사람들이 구호를 외쳤다. 화가 나 보였다. 진이 빠졌다.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옆 선임과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똑바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할 말이 있어 나왔고 나는 국가가 나에게 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나가라고 하면 나갔고 막으라고 하면 막았다.


시위는 새벽에 끝났고 몇 시간 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다.


막내였던 나는 두 시간을 채 못 자고 다시 근무에 나갔다.

 


2014년 10월 어느 날


비가 내렸다. 우의는 말려도 냄새가 났다.


우의에서 나는 냄새는 머리를 아프게 했다. 순찰을 돌고 싶지 않았다.

 


2014년 겨울


행정반으로 보직을 옮겼다. 매일 방범근무를 나가는 인원들의 배치를 맡고 각 관할 파출소에 전화를 돌렸다. 부대의 예산을 관리했다. 방범근무를 나가는 대원들을 위해서 간식을 사러 다녔다. 행정반에서는 무전이 시시때때로 터졌다. 때로는 정치인들이 분향소에 왔고 유족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우리 부대 대원들은 우발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경찰 버스 안에서 대기했다.


지속되는 방범 근무에 대원들은 지쳤다. 언론의 한가운데 있었던 그 배의 이야기는 점점 잦아들었다. 분명 안정적이었지만 권태감이 부대 안에는 흘렀다. 부대의 고참들은 가끔 행정반에 찾아와 이 도시의 방범근무를 언제까지 하느냐고 물었다. 기약이 없다고 대답했다. 내가 입대한 이후로 부대의 익일 경력 배치는 항상 그 도시였다.


 

2015년 2월


눈이 많이 오거나 심하게 추운 날이면 근무 시간이 짧아졌다. 거리는 얼어붙었다. 방한복과 귀도리를 보급했다. 추운 날에 대원들은 힘들어했다. 가끔은 다른 근무를 나가는 일이 생겼다. 다른 근무를 짜는 날이면 익숙하지 않아 곤욕이었다.

 


2015년 3월, 그 이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도시의 특별방범이 끝났다. 내일부터는 타 부대와 같이 여러 근무에 투입된다고 했다. 대원들은 좋아했다. 더 이상 언론에서는 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더 바빠졌다. 지속되던 같은 근무를 짜는 일보다 매일매일 다른 근무를 짜는 일이 훨씬 어려웠다. 간식을 사러 나갔고 부대 예산이 사용될 곳은 더 많아졌다. 그렇게 다른 부대와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했다. 내 군 생활의 날짜도 점점 줄어들었다. 남은 군 생활이 줄어들수록 그 배는 점점 잊혀갔다.


그 학교와 분향소는 덩그러니 남았다.


 

2015년 4월 16일


1주기였다. 광화문에서 시위가 있었다. 경력 사항이 당일 새벽이 다 돼서 나왔다.


나는 배치와 경력 관련 보고로 밤을 새웠다.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2016년 3월


전역을 했다. 후임들이 헹가래를 쳐줬다. 작별인사를 하고 버스를 타러 걸어나갔다. 그 길었던 군 생활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그 도시의 방범을 돌고 학교 앞에서 학생들을 마주했던 순간들이었다. 난 그 여름과 가을에 빡빡머리를 하고 근무모를 눌러쓰고 근무복을 다리고 단화를 닦았다. 이름 모를 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편의점에서 블루베리 음료수를 사주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나는 20개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앞으로 올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간다.

 


2017년 4월

전역을 하자마자 복학했다. 1년을 정신없이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배의 소식이 언론을 통해 들려왔다. 그 배가 인양되었고 육상 거치에 들어가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홉 명이 남았다. 스물하나부터 스물셋, 나는 그 배 옆에 있었다.


바다 위에 떠오른 그 배를 사진으로 보았다. 침몰할 때 나왔던 뉴스에서 본 모습과 사뭇 달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열여덟이었던 그들은 스물하나가 되었다. 금요일에 돌아온다는 말과는 달리, 너무도 늦은 귀향이었다. 이제 고요했던 학교와 도시의 분향소는 움직일 것이다. 스물이라는 숫자의 처음을 함께한 그 배를 향해 작가 이영도의 책의 한 구절로 인사를 보낸다.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원문: Twenties Timeline / 필자: 조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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