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누나를 다시 만나면,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조회수 2017. 4. 20.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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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누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세상이 올까.

*이 글은 작년 오늘 자의 글을 재구성/발행한 것입니다.

장애를 비장애 상태보다 ‘열등’한 상태로 인식하고 장애인을 조롱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아래는 2년 전 오늘 쓴 글이다. 2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세상은 여전히 비장애인 위주로 설계되어 있고, 장애인들은 2등시민 취급을 당한다.


페이스북의 관심종자들은 장애인 비하로 ‘좋아요’와 리플을 구걸한다. 폐허다.


‘나만의 공간’의 조건


자립심이 강한 건지, 일찌감치 삐딱선을 탔던 건지. 어려서부터 난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단 생각을 곧잘 했다.


그게 고작 열한 살 열두 살이던 시절부터의 일이었으니, 나도 참 어지간히 집이 싫었던 모양이다. 가족들’과’ 함께 사는 건 그 상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 말 다했지 뭐.


그러니까 나는 매번 취미처럼 스케치북을 꺼내놓고, 못 그리는 그림으로 집의 평면도를 그리며 “여기는 거실인데, 쥬크박스를 놓을 거야”라거나, “여기는 부엌이고 홈 바가 있으면 좋겠지” 따위의 헛된 꿈을 키워왔던 것이다.


그 공간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에 대한 비전은 자주 바뀌었다. 음악에 취미가 생겼을 때는 거실에 놓고 싶었던 게 쥬크박스였지만, 게임에 취미를 붙였을 땐 오락실에나 놓는 아케이드 게임기를 놓고 싶어 했다.


망상은 가면 갈수록 커져서 나중에는 “잘만 설계하면 집 안에다가도 롤러코스터를 설치할 수 있지 않을까” 따위의 블록버스터급 헛소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이 먹고 운 좋게 나만의 공간을 확보한 지금은 안다. 롤러코스터니 쥬크박스니 아케이드 게임기니, 설치할 돈도 없을 뿐더러 운 좋게 설치한다고 해도 전기세와 관리비용을 생각하면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아니, 다 떠나서 어떤 미친놈이 집 안에다가 롤러코스터를 설치한단 말인가.


변하지 않는 하나의 조건


하지만 매번 미친놈 널 뛰듯 바뀌는 나의 비전 중에서도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요소가 몇 가지 있었다.


난 휠체어를 탄 작은누나가 언제든 힘들이지 않고 혼자 힘으로도 내 공간에 놀러 올 수 있길 바랐다.


그러려면 계단 없는 1층 공간인 게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혹여 아파트에 살게 된다면 누나가 휠체어로 진입할 때 계단 대신 낮은 경사의 경사로가 있길 바랐다.


유년기에 우리가 살던 아파트의 경사로는 제법 높았다. 작은누나는 당시 대중화되지 않았던 전동휠체어가 아니라 손으로 바퀴를 미는 수동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누나는 혼자 집을 나갈 때는 브레이크를 걸어가며 속도를 줄여 조심조심 내려가야 했고, 집에 돌아올 땐 온몸의 힘을 팔에 집중해 힘겹게 경사를 올라야 했다.


그래서 누나가 혼자 외출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누나보다 여섯 살 어린 막내동생이었던―그래서 딱히 바쁠 일이 없었던 어린아이였던―나는 어려서부터 작은누나의 산책메이트가 되곤 했다.


그 집엔 반드시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하며, 현관에 높은 문턱이 없어야 했고, 누나가 휠체어를 타고 이동할 때 어려움이 없도록 복도가 충분한 넓이를 확보해야 했다.


비장애인은 제자리에서 앞뒤 양옆으로 자유롭게 방향을 바꿀 수 있지만, 휠체어는 방향을 바꾸려면 넓은 폭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나만의 공간은 제법 넓어야만 했다.


작은누나와 산책하러 나갈 때마다 비장애인들의 수군거림과 눈초리, 곳곳에 널려 있어서 내 도움 없인 극복할 수 없는 보도턱과 계단을 마주해야 했던 나는, 막연하게나마 작은누나가 날 보러오고 싶을 때 불편함 없이 올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더이상 작은누나는 없지만


그 마음은 작은누나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동안 계속됐다. 더이상 내 공간에 놀러 올 수 있는 작은누나는 없지만, 만약 내가 나만의 공간을 마련했을 때 그 공간이 비장애인들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라면 천국에 있을 누나에게 면목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친 부동산 가격을 자랑하는 서울에서 내 마음에 차는 공간을 마련하려면 어마무시한 재력이 필요하단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엔,


작은누나도 이해해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계단과 좁은 복도를 통과해야 하는 반지하 집을 구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이따금 집에 돌아올 때 그 사실에 우울해지곤 하지만.)


생의 2/3을 휠체어에서 보낸 작은누나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5년이 지났다.


작은누나의 친구는 아직도 전동휠체어로는 계단만 있는 육교나 턱이 높은 인도로 다니는 게 불가능하다며 차도 갓길을 선택한다.


양평동에서 오목교로 넘어가는 길, 전철 대신 오목교를 갓길로 넘었다는 누나 친구의 말에 아연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오늘은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아직도 저상버스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혼자 힘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역무원의 도움을 빌려 위험한 리프트에 몸을 실어야 하는 지하철역이 곳곳에 깔려 있다.


지하철 리프트의 또 하나의 문제는, 그 시설을 이용하는 내내 계단을 이용하는 비장애인들로부터 동물원 원숭이 취급을 당하기 딱 좋은 시설이라는 점이다.


지하철 리프트를 본 적 있나? 미디로 찍은 ‘미레미레 미시레도라’ 멜로디가 울려 퍼지는 동안 느려터진 속도로 이동한다.


어떤 비장애인들은 짜증을 내면서 “저렇게까지 하면서 어딜 가느냐”는 말을 시설 이용자의 면전에 던지고 휘리릭 계단을 걸어가 버린다.


그딴 걸 타면서 개인의 존엄 따위가 지켜질 리 있나.

심지어 이 리프트는 추락사고가 일어났을 때 장애인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출처: 리프트포커스

장애인의 날을 기념할 수 없는 나라


정부는 장애인들을 쇠고기 등급 나누듯 등급을 나눠 장애인들을 ‘관리 감독’하고, 비장애인들 위주로만 마련된 대중교통 인프라를 장애인들도 이용할 수 있게 시설을 확충해달라는 요구는 강경 진압으로 대응한다.


장애인 실업률이 80%에 육박하는데 그 사실을 아는 이조차 드문 이 나라에서, 장애인의 날은 기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대체 뭘 기념하자는 것인가. 응당 투쟁과 연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

출처: 장하나 님의 페이스북

오늘 장애인 이동권 시위의 내용은 이랬다고 한다.


하나, 수백여 장의 고속버스 티켓을 예매한다.


둘, 표를 예매한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끌고 고속버스 터미널에 등장한다.


셋, 고속버스는 저상버스가 아니므로 티켓을 사서 응당 탑승할 권리가 있는 장애인들은 티켓을 사고도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넷,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주며 장애인 이동권의 필요성과 절박함을 강변한다.


그런데 경찰은 일단 우르르 몰려온 장애인들을 고속버스 터미널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경찰에게는 정당하게 가격을 지불하고 표를 산 사람이 터미널에 들어가는 걸 막을 권리라도 있다던가.

2014년의 오늘. 심지어 최루액을 뿌렸다.
출처: 연합뉴스

더 황망한 건, 그토록 절실히 필요하다 외쳐왔던 저상버스가 현장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저상 닭장차’의 형태로 말이다. 과거 장애인 활동가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활동가들을 – 자의와는 무관하게 – 휠체어로부터 들어내 들고 들어가 버스 좌석에 앉히고, 휠체어는 짐칸에 멋대로 처박아 둔 것이 인권유린에 해당된다는 판결이 나왔단다.


그래서 연행하는 대상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저상 닭장차’를 마련했단다. 뭐 그 자체야 나쁜 일이라곤 할 수 없겠지. 진일보한 부분일 테니까.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곱게 봐주려 해도, 자꾸만 마음 속으로는 “인간의 기본 권리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저상버스 도입 비용은 아까워도, ‘원활하고 우아하게’ 연행을 집행하기 위한 저상 닭장차 도입 비용은 안 아까운 건가”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작은누나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난 아직도 세상을 떠난 작은누나에 대한 기억이 건드려지는 게 고통스러워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나 등급제 철폐 운동에 서명 정도만 거들고 자리를 훌쩍 떠버리고 만다.


생전에 장애인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던 작은누나를 옆에서 지켜봤기에, 혹시라도 어떤 계기로든 내 상처의 스위치가 다시 눌릴까 봐 그게 겁이 나서 말이다.


마감과 개인 스케줄이 없었다 해도 오늘 집회에 내가 참여했을지는 사실 의문이다.


하지만 하루를 이런 식으로 마감하면서 문득,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창피함이 올라오는 것이다.


작은누나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 그 사이 대통령만 네 번 바뀌었다. 이 땅은 여전히 비장애인만을 ‘정상국민’ 취급한다.


변화는 너무 더디고, 정부는 행정부 수장과 여당만 바꿔가며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을 계속한다.


만약 사후세계라는 게 정말 있다면, 그래서 어딘가에서 누나가 지금 이 땅의 풍경을 보고 있다면,


언제든 내가 누나를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런데 넌 나와 같은 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니?”라고 물으면,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언제쯤 누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세상이 올까.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난 뭘 할 수 있을까. 넓은 복도와 문턱 없는 집을 마련하겠다는 식의 꿈 말고 말이다.

원문: I AM TIN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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