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의 쓰임새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조회수 2017. 3. 30. 14:43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속도를 추구하느라 방향을 놓친 이들, 즉 속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유용한 항생제

철학 상담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어떤 책인가? 저자는 빌헬름 슈미트(Wilhelm Schmid)다. 이름부터가 독일 냄새가 물씬 난다. 더욱이 상당히 진부하게 들리는 이름이다. 영어식으로는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가 아닌가. 어쩐지 책도 평범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다. 모범생이 집필한 지극히 무난한 책이랄까. 그러고 보니 원제가 “아름다운 삶?(Schönes Leben?)”이고, 부제는 “삶의 기예 입문(Einführung in die Lebenskunst)”이다. 책 이름에도 독일 냄새가 완연하다는 것을 간과할 수가 없다.

매우 완고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빌헬름 슈미트.

빌헬름 슈미트는 이른바 철학 상담가로서, 말과 글을 통해서 철학을 삶의 기예로 제시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의 전공은 철학이다.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심지어 교수자격취득(Habilitation) 논문도 제출한 연구자로서의 내공이 떠받치고 있다(우리가 만나는 독일 유학파는 거의 다 박사학위만 취득했다). 이 논문의 제목은 무려 「삶의 기술에 대한 철학적 기초」이다. 또한 스위스 취리히의 병원에서 다년간 상담을 진행한 바도 있고, 이와 동시에 국내에도 이미 두 권이 소개되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인문 작가이다. 


가장 먼저 소개된 것은 『살면서 한번은 행복에 대해 물어라(Glück)』(더좋은책)이다. 어딘지 자기계발서 같은 번역서의 제목과 ‘독일 최고의 행복 멘토 슈미트 교수가 전해주는 행복의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꽤나 거슬리지만, 내용 자체는 행복(Glück)이 즐겨야 할 쾌락이라기보다 찾아야 할 의미임을 잘 서술하고 있다. 또한 『나이든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Gelassenheit)』(책세상)은 마음의 평정(Gelassenheit)을 위한 인문학적 해법을 소개한다. 평정은 삶의 기술의 가장 근간과도 같은 것이다.


 

삶의 기술으로서의 철학


삶의 기술은 철학의 본래 의미를 복원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근래에 등장한 철학 상담은 고대철학이 추구하던 바를 현대로 되살려낸 것이다. 철학의 모태인 고대 희랍에서는 지적 산물 이전에 삶의 방식이자 영적 훈련으로서 철학을 이해했다. 삐에르 아도(Pierre Hadot)라는 철학자가 쓴 한 책의 영역본 제목이 이를 가리킨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Philosophy as a way of life: spiritual exercises from Socrates to Foucault)』(원서 제목은 『영적 훈련과 고대철학(Exercices spirituels et philosophie antique)』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슈미트가 강조하는 것은 삶의 기술에 대한 철학이라기보다 차라리 삶의 기술(방식)로서의 철학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에피쿠로스나 스토아학파 등의 여러 논의를 소개하지만 이는 쾌락, 고통, 습관, 시간, 건강, 분노, 가상공간 등 실존적 맥락에서 전유 된다. 특정 이론을 설명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고,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특정한 삶의 문제에 철학적 통찰을 적용한다기보다 그 삶의 문제에 반응하는 특정한 삶의 방식 자체가 철학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서의 제목은 매우 적확하다.


 

아름다운 삶


원서의 제목이기도 한 아름다운 삶(Schönes Leben)은 결국 철학적인 삶이다. 즉 성찰적인 삶을 가리킨다. 빌헬름 슈미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학원에서 삶의 기술에 대한(혹은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을 연구하고, 병원 등의 현장에서 상담하며, 철학 상담을 소개하는 글을 집필함으로써 이를 설파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된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삶의 기술 철학 – 기초 닦기(Philosophie der Lebenskunst: Eine Grundlegung)』에서 제시한 성찰을 축약하고, 여기에 새로운 성찰을 덧붙여 소개한 것이다.

이 책은 (…) 삶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는 사유 공간으로의 소풍을 시도한다. (…) 이 책은 가능한 답변들의 실천적 측면에, (…) 중점을 두고 있다. (…) 이것들은 『삶의 기술 철학』에서 골라 발췌한 것으로, 여기에 건강, 쾌활함, 행복 그리고 의미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추가하고 보완했다.

- 10-11쪽

여하간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이렇게 삶의 기술, 즉 삶의 방식을 말하고 있으니 우리에게는 무언가 거창하고, 고색창연하게 들린다. 하지만 빌헬름 슈미트는 철학의 고전적 통찰에서 뒤덮은 먼지를 털어내고 우리 시대의 맥락 속으로 새롭게 들려준다(그는 우리 시대를 ‘탈’ 현대, 즉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다른’ 현대라고 부른다). 그가 주목하는 맥락은 열린 선택의 가능성이다. 이 선택은 주제의 판단과 결단을 상정한다(독일 작가 올리버 예게스가 소개하는 개념인 결정장애 세대(Generation Maybe)는 이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철학을 통한 상담이 지향하는 삶의 결실은 원서의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바와 같이 미학적인 것이다. 미학적 결실이란 곧 (예술) 작품을 가리킨다. 우리의 삶은 작품이 되어야 한다(“삶이라는 예술작품”, 94쪽). 그리고 작품은 아름다워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삶의 기예는 아름다운 삶을 지향(목표)한다. 달리 말하자면, 아름다움을 획득할 때에야 비로소 삶의 성취를 말할 수가 있다. 이는 개별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과업이다. 우리는 보편적 추상 이전에 개별적 형태 안에서 아름다움을 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으로의 소풍


슈미트는 에드호퍼의 작품 『철학으로의 소풍(excursion into philosophy)』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는다. 나들이는 일상으로부터의 떠남이다. 철학으로의 나들이는 일상으로부터 철학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이는 “정확히 실존이 문제가 되는 순간에 일어난다. 사유는 절망의 낭떠러지를 앞에 두고서야 전개된다.”(27쪽) 철학의 공간에서 우리는 삶에 대해 질문하고, 삶의 능력을 되찾을 해법을 모색한다. 그림만으로 본다면, 현자 타임에 이른 남성을 주목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성적 역할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16쪽)


아마도 두 남녀는 “각자 자신의 고통에 골몰”(93쪽)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느 한편이 상대에게 부당하게 안겨준 고통에, 그리고 서로를 이어줄 다리를 파괴하는 데 이르게 한 고통에 말이다.”(93쪽) 이렇게 자신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각자의 고통 가운데, 즉 각자의 실존이 문제가 되는 가운데 두 남녀는 성찰의 여정에 오르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악처 크산티페로 인해 자신이 철학자가 되었다고 주장하지 않던가(물론 크산티페의 입장에서는 대책 없이 무능한 가장이었던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 각자 자신의 고통에 골몰한다.

쾌락, 고통, 죽음


성찰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 간격을 만들어낸다. 성찰의 간격이 욕망의 직접성을 무너뜨린다. 이는 성적 쾌락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욕망의 직접성이 성찰에 의해 깨지면, 근본적으로 성찰의 기술인 에로티시즘이 새롭게 둥지를 틀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성찰은 지연을 끌어들인다.”(79쪽) 심지어 지연을 통해서 다양한 쾌락이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곧 성찰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는 욕망의 가능성이 확장되는 것이다. 또한 쾌락의 짝패인 고통의 개인적, 사회적 측면을 파악하고 고통의 한계를 규명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삶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43쪽) 죽음이라는 한계로 인해 삶은 그냥 흘러가는 물결로 보내지 않고,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죽음은 죽는 사람에게는 시간의 종료이다. 그리고 잠시라도 죽음의 증인이 된 사람들에게는 시간의 정지이다.”(100쪽) 그러나 『걸리버 여행기』 3부에 등장하는 불사의 존재 스트럴드브러그(struldbrugs)의 우울한 처지를 생각해보라. 짐승처럼 취급받는 그들의 불멸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다. 죽음이라는 한계가 외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축복인 셈이다.

삶의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 오히려 삶 전체에 비로소 형식과 의미를 부여해주는 한계로서의 죽음이 관심의 대상이다.

- 102쪽

우리는 이런 한계를 기꺼이 껴안아야 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런 한계의식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44쪽) “어떤 질병이 죽음으로 이어질 경우, 사람은 병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기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아야 한다고 몽테뉴는 경고한다.”(96-7쪽) 따라서 삶의 기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죽음의 기예(Ars moriendi)이다. “삶의 기술은 죽음의 기술과 결부되어 있다. 또한 삶의 지식 역시 죽음의 지식과 결부되어 있다.”(106쪽) 죽음도 삶의 순환의 일부(100쪽)로서, 삶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삶은 우리가 거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요소들 그리고 우리를 마음 내키는 대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힘에 맡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삶이다. 최소한 마지막 날에는 그렇다. 누구 또는 무엇이 삶을 좌지우지하더라도 삶을 마무리 짓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이다.

- 7쪽

선택과 습관


바로 그렇기에 “우리만이─우리 자신에게─이 삶을 책임지는 것이다.”(7쪽)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삶의 기술을 구사해야 하는 성찰적이고 윤리적인 주체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를 것이다.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이끌 수 있는가?

- 44쪽

이는 내게 주어진 선택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나에게는 어떤 선택의 가능성이 있는가?”(46-7쪽) 이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47쪽)라고 하는 주체에 대한 질문과 “나는 무엇을 확실하게 행할 수 있는가?”(49쪽)라고 하는 역량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적절한 습관의 형성은 삶의 기술에 있어서 중요한 항목이다. 습관은 주체가 거하는 자리이다. “주체는 어떤 경우에도 습관 안에 거주한다.”(59쪽) 삶의 기술을 통해서 아름답고 성찰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아름답고 성찰적인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주체의 오랜 습관을 성찰하고, 개선하는 것이다. 사회의 구조 안에 숨겨진 지배관계를 재현하던 오랜 습관을 버리고, 스스로 선택한 태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새로운 습관을 체화시켜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끈질긴 노력과 기나긴 고행이 필요하다.


이런 습관에는 사회가 형성한 의식(儀式), 곧 제의도 포함된다. 결혼, 생일, 개업 등과 같은 우리가 직면하는 중요한 사건들에 일정한 의미(경험되는 방식)와 의의(강조하는 초점)를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결혼식, (돌잔치를 포함한) 생일잔치, 개업식 등의 제의이다. 이러한 의미 부여는 본질적으로 성찰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성찰적인 삶의 기술을 위해서는 “앞서 형성된 의식들” 가운데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수정해야 하는지, 다시 말해 안정과 유동성 사이의 폭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67쪽)

철학 상담 활용법


이러한 선택의 항목은 매우 다양하다. 앞서 말한 대로 쾌락, 고통, 습관, 시간, 건강, 분노, 가상공간 등 실존적 맥락에 걸쳐 있다. 그 각각의 항목에 대한 선택 행위가 자기를 강화하고, 실존을 형성하게 된다. 자기강화(Selbstmächtigkeit)는 실존의 미학의 첫 번째 항목으로서 “자기반성적 힘, 자기가 성찰적으로 사용하며 자신을 향해 행사하는 힘”(287쪽)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행사하는 힘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으로 행사하는 힘이다. 과도한 힘이 아니라 절제된 힘이며, 자신의 욕구를 압도하고 통제하는 힘이다.


그러니까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에 제시되고 있는 다채로운 내용은 자기강화에 기반하여 “정교한 실존의 형성 작업”(288쪽)을 도모하기 위한 지침이다. 내용 면면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동시에 추상적이다. 가령 이 책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한 독자들이라면, 목차에서 “시간 사용하기”(8장)를 발견하고 그 장으로 가서 실용적인 시간관리 기술을 찾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빌헬름 슈미트 특유의 사변적인 접근방식은 스티븐 코비의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와 같은 시간관리 서적에서 발견하는 실용적인 접근방식과는 꽤나 다르다.

삶을 오래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삶의 연장 같은 상투적인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신적 지평의 시간적 확대를 통해 목적에 도달한다. 정신적 지평의 시간적 확대를 통해 과거의(그때마다 한 경험들의, 그때마다 사유한 사상들의) 조명 아래에서 그리고 미래의(두드러져 보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들의) 조명 아래에서 실존의 현재적 성취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회고적이고 앞으로의 전망이 담긴 정신적 지평의 확장은 그때마다 현재에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삶의 압축을 일으킨다. 자기는 이 무한한 토대로부터 현재를 위한 방향감각을 얻어내기 위해 과거에 있었던 것의 넓은 지평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넘어 다가오는 것을 앞서 생각하고 준비하기 위해 미래적인 것의 끝없는 지평 안에서 행동한다. 그리하려 자기는 직접적으로 고유한, 극도로 제약된 시간 안에 더 이상 갇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 116쪽

과거(에 경험하고 생각한 바)를 돌아보며, 미래(에 예견되는 가능성)를 내다보는 가운데 현재 상황에 적절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압축이란, 하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이를 다시 “시간의 가위는 시간을 잘라낸다”(117쪽)라고 표현한다. 사실 좀 더 추상적인 부분을 부러 인용하였다. 현명한 독자라면, 여기에서 시간 관리를 위한 실용적 팁이 아니라 시간 관리에 대한 방향과 함의를 숙고하기 위한 논리적 통찰을 찾을 것이다. 시간과 성찰적이고 독자적인 관계를 맺는 성숙한 주체(시간의 ‘곡예사’)는 “협소한 시간의 제약에서 풀려”나서 “각자의 시간 세계를 스스로 형성”한다(122쪽).

우리들을 고통에 빠지게 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위용…

여하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적 논의가 묵직하게 서술된다. 분명 유려한 문체인데도 문장의 흐름이 분절되는 느낌이 든다. 반 강제로 저자의 심오한 문장을 깊이 묵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하지만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어느 스님도 말씀하시지 않던가. 곱씹으면 우러나오는 깊은 맛이 있다. 철학상담 자체가 기본적으로 이론적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도 있지만, 어쩌면 이런 특성 또한 독일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도한 논리적 물결에 잘 올라타면, 의외로 쉽게 읽힌다. 


누가 봐도 독일적인 성격이 두드러진 이 철학 에세이집을 누가 읽어야 할까? 물론 인문학을 통한 자기 성찰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유용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외려 그동안 자기계발서를 탐독하던 독자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속도를 추구하느라 방향을 놓친 이들, 즉 속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독자들에게 유용한 항생제이기 때문이다. 슬로우 라이프를 부드럽게 달콤하게 설파하는 따뜻한 감성 에세이집은 독자의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홍 바탕의 표지로 호도하는) 이 철학 에세이집은 독자의 뇌리를 둔탁하게 가격한다.


그러나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의 묵직한 논의는 우리에게 “잠시 시간을 잊게 만들고 가장 초라한 장소도 우주로 만들어주는 행복”(299쪽)에 눈을 뜨게 해준다. “이런 (아름다운) 순간을 사는 것과 그것을 끝까지 즐기는 것, 그리고 그릇된 욕심 없이 다시금 흘러가도록 그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삶의 기술에 해당한다.”(299쪽)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은 밴덤 식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고사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고통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의 민주화를 지향하는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침이 바로 여기에 있다.

YES24 / 알라딘 / 교보문고 / 리디북스 / 인터파크


1. 빌헬름 슈미트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Lebenskunst를 번역한 것이다. 나라면 ‘삶의 기예(技藝)’라고 옮길 것이다. 그러니까 기술(技術)이자 예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또한 ‘사랑의 기예’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는 물론 어디까지나 소소한 항목에 불과하지만, 이 맥락에선 기술(kunst)이 자아실현과 존재완성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기에 이를 굳이 언급한다.


2. 245쪽의 사유심신상관의학(noopsychosomatik)은 영혼육(靈魂肉)상관의학 혹은 영혼-심-신상관의학으로 해야 맞을 것이다. 누스(nous)가 정신을 가리키는 것은 맞지만, 이 맥락에서는 마음(psyche)와의 관계에서 읽어야한다. 중세 신학 사상에 영향을 미친 신플라톤주의에서 슈케는 누스 아래에 있다.


3. 에방겔리쉬(evangelisch)는 복음(신학)이 아니라 개신교를 가리킨다. 301쪽의 투칭 복음신학 아카데미는 Evangelische Akademie Tutzing을 옮긴 것인데, 실은 투칭 개신교 아카데미라고 읽어야 한다(그 위의 아카데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