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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썩은 이빨일 뿐,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조회수 2017. 3. 12. 2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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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가 태블릿을 찾지 못했다면? 장시호가 정보를 실토하지 않았다면?

2017.03.10 박근혜 탄핵의 의미

한국의 민중들은 지도자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던 몇 번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4.19로 이승만을 그 자리에선 내려오게 만들었고, 그 뒤에는 전두환을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카운트될 수가 없는 것이 민중에 의해 끌어내려진 게 아니라 김재규라는 측근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그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김재규를 열사 취급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민중이 박정희의 목을 잘랐으면 박정희의 죽음은 민주주의적으로 더 상징적인 것이 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박근혜의 탄핵이 앞서 언급한 일종의 ‘끌어내림’과 다른 이유는, 사실상 법과 절차에 의한 강제 축출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에게 감당 못할 압박이 있기야 했지만 어찌 됐건 자진해서 자리에서 내려왔고 이 점에서는 전두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박근혜는 좀 케이스가 다르다. 박근혜에겐 전혀 자리에서 내려올 의지도 낌새도 없었다. 전국민적으로 그의 사퇴 및 사임을 압박했지만 박근혜에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심지어 이 글을 쓸 당시도 그녀는 청와대에서 방 뺄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압박 카드가 먹히지 않자 결국 국회는 박근혜를 피소추인으로 하는 탄핵소추의결서를 제출했고, 그 결과 박근혜는 3월 10일 11시경 탄핵당했다. 박근혜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제 그녀는 대통령이 아니다. 그리고 민중은 박근혜를 탄핵하기까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다. 헌재가 탄핵을 인용하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는 거라고들 하니까.


 

박근혜는 어쩌다가 탄핵의 대상이 되었나


박근혜에 대한 탄핵의 목소리를 최초로 불러일으킨 것은 세월호 참사였다. 세월호 참사가 탄핵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당시 민의는 말그대로 반으로 갈렸고 그에 따라 국회도 딱히 이렇다할 탄핵 드라이브를 걸지는 않았다. 국회의원들은 특별한 주장을 가지고 각종 특별한 활동을 하는 적극적인 리더들이라기보다는 민의를 대변하는 역할을 주로 도맡는데, 그래서 그들은 확인된 무엇에만 베팅하는 경향을 자주 보인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국회의원들의 게으름이 다행이기도 하다. 3월 10일 헌재는 세월호 건만을 가지고는, 그러니까 대통령이 성실하지 못하다는-무능하다는 이유로는 탄핵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아쉬운 대목이다. 아래는 그 판결문의 일부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재난 상황이 발생하였다고 하여 피청구인이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 등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 의무까지 바로 발생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피청구인은 헌법상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를 부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실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성실한 직책수행의무와 같은 추상적 의무규정의 위반을 이유로 탄핵소추를 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는 규범적으로 그 이행이 관철될 수 없으므로 원칙적으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어, 정치적 무능력이나 정책 결정상의 잘못 등 직책수행의 성실성 여부는 그 자체로는 소추사유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월호 사고는 참혹하기 그지없으나, 세월호 참사 당일 피청구인이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였는지 여부는 탄핵심판절차의 판단대상이 되지 아니한다고 할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뒤에도 박근혜 정부는 여러 사건·사고를 쳤지만 딱히 그 사건사고를 두고 “탄핵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진 않았다. 결국 박근혜를 탄핵해야 한다는 절대다수 국민의 목소리를 모이게 만든 것은 최순실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존재였다.


 하나의 미스터리가 풀리기 위해선 미스터리 자체가 존재한다는 게 밝혀져야 한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에서 승객들은 무인도에 불시착하는데 한 승객은 별걱정하지 않는다. “위성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어차피 위성으로 우릴 보고 구조하러 올 겁니다.” 그러자 또 다른 승객이 말한다. “위성은 일종의 카메라입니다. 카메라는 대상을 포착하고 촬영하죠.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아무 의미도 없어요.”


무인도 밖에 있는 자가 위성으로 그 무인도를 발견하기 위해선 해당 무인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자들의 취재도 마찬가지다. 단서 없이는 취재 대상을 포착할 수 없다. 최순실이라는 미지의 존재를 수면 위로 부상하게 만들어줬던 단서는 K스포츠재단과 미르 재단이었다.

태초에 K스포츠재단과 미르재단이 있었다. 삼성을 비롯한 전경련 소속된 대기업들은 갓 생긴 듣도 보도 못한 조직에 수십억대의 자본을 투자하고 있었고, 알고 보니 대통령은 그것을 위해 대기업 오너들을 사실상 압박하고 있었고, 알고 보니 최순실이 그 조직들과 관련이 있었고, 알고 보니 최순실은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부터 곁에 있었고, 알고 보니 그 민간인 최순실이라는 작자는 연설문까지 직접 써주거나 봐주고 있었고, 알고 보니 그 민간인이 청와대도 자주 들락거렸고, 알고 보니 박근혜와 경제 공동체였고, 알고 보니 박근혜가 믿고 따르던 최태민의 딸이었다.

 


수치심


경악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이건 법적으로 문제 삼기전에 이미 너무도 쪽팔린 사건이었다. 듣도보도 못한 민간인, 심지어 무당들도 인정하지 않는 무당이 행정부의 수장, 아니, 행정부 전체를 농간하고 있었다. 게다가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최순실이 록히드 마틴의 회장을 만나고 다녔다면서 사드 도입의 실세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최순실의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세월호 참사와 최순실 게이트 간에 무엇이 더 중한 사안인지 경중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나는 당시 박근혜가 세월호 참사만으로도 대통령직에서 축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많은 이의 생각 속에 세월호 참사는 말 그대로 사고(accident)였고 그걸 한 나라의 대통령’님’이 책임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침몰 사건에 행정이 완전히 마비가 되었다는 건 사람들에게 그닥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재수 없으면 사고는 나는 법이고, 아무리 나라님이라도 모든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행정 시스템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이는 꽤 당연한 결론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을 봤으면 싶다. 천조국에선 한 비행기의 불시착 사고로 1명의 피해자도 없었지만 행정부는 기장의 선택이 ‘최선’이었는가를 집요하게 따진다. 행정이 기능을 한다는 건 그런 의미다. 정작 한국에선 실제 피해자가 300명이 넘었음에도 행정이 진실을 덮으려 했다. 이상하게 기능한다.


세월호 참사와 달리 최순실 게이트는 딱히 학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우리의 수치심을 자극했다. 듣도 보도 못한 인간이 장막의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건 직관적으로 기분을 나쁘게 만들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줬다. 이건 이미 헌법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얼척이 없는 거다. 자격도 없고 딱히 얼굴도 눈에 익지 않은 자가 세금을 슈킹하고 있다니? 연설문을 대신 썼다니? 옷도 직접 골라주고, 행정부 로고 디자인에도 관여했다니?

출처: 오마이뉴스
‘통합된 정부상징체계 로고, 소름끼치는 이유’

이런 부분을 잘 자극했던 건 TV조선이었다. JTBC가 최순실이 저지른 법적으로 잘못된 문제를 지적하는 동안 TV조선은 최순실이 개장 시간도 되기 전에 매장의 문을 열라고 발악하는 흔한 품위 없는 중년 아줌마로 포지셔닝 시켰다. TV조선은 말했다. ‘이런 허접스러운 인간이 대한민국을 농락시키고 있습니다!’ 스토리는 완성됐다. 이쯤 되면 민의가 모이기는 충분했다. 시민들의 탄핵 의견은 95%였다. 결국 최순실 덕(?)에 박근혜는 탄핵당하기에 이르렀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감히 해석할 생각도 없다.

 


박근혜 탄핵은 시작일 뿐이다


박근혜를 탄핵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고, 민주주의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하지만 (같은 시민으로서) 우리가 더 유심히 봐야 하는 부분은 어떻게 박근혜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는지, 또 어떻게 최순실 같은 외부인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국가 행정에 관여할 수 있었는지다. 어딘가에 빈틈이 있다. 그 빈틈을 발견하고 메우지 않는다면 비슷한 일은 언제건 또 일어날 수 있다. 우린 그저 한 명의 혐의자를 왕좌에서 내려놓았을 뿐이다.


최근 읽은 알렉시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한 민족은 자유로운 정부를 세울 수도 있겠지만, 자치제도가 없이는 자유 정신을 가질 수 없다. 일시적인 열정, 짧은 시간 동안의 관심, 또는 우연한 상황 때문에 외형적인 자주성이 조성될 수도 있겠지만, 사회체제의 내부로 밀려 들어갔던, 전제적 경향(despotic tendency)이 조만간 다시 표면으로 나타날 것이다.

한국은 상당히 중앙집중적인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행정부는 강력하고, 자치제도는 상당히 약하다. 한 예로 박근혜 대통령과 이재명 성남시장은 청년 수당을 두고 씨름을 하기도 했는데, 재밌는 것은 두 축이 모두 청년 수당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정책 싸움이 아니라 자존심 대결이었다. 이 둘이 자존심 싸움을 한 이유는 한쪽은 아버지 때처럼 중앙에서 내리꽂고 싶어 했고, 다른 한쪽은 중앙을 무시하고 자치를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앙집중적 국가에서 민주주의가 성장하고 보완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토크빌이 “자치 제도가 없이는 자유 정신을 가질 수 없다”고 했을 거라 생각한다. 나라가 중앙집중적일수록, 전체주의적일수록 민주주의는 힘을 잃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배우지 않았던가.


또한 한국은 상당히 전체주의적인 나라다. 선거 제도가 잘 갖추어져있고 실제로 투표로 시민들의 대표를 뽑고는 있기야 하지만 한국에서 개인주의가 상당히 약하고, 많은 이들이 집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한국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거치며 “일시적인 열정, 짧은 시간 동안의 관심, 또는 우연한 상황 때문에 외형적인 자주성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일시적인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 식었다. 오죽하면 유시민은 한때 이렇게 말을 하지 않았나.

군부세력과 피 흘리도록 싸워서 투표권을 찾아왔더니, 국민들은 그 투표권으로 노태우를 뽑더라.

군부세력과 피 흘리도록 싸웠을 때는 “일시적인 열정”이 흘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한국인들은 왜인지 게을러졌거나, 민주주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전제적 경향이 조만간 다시 표면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다시, 박근혜라는 썩은 이빨을 뽑은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박근혜 탄핵은 민주주의를 다시 온전하게 세우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일 따름이다. 또 다른 박근혜, 최순실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민주주의를 더욱 강력하게 보완해야 한다. JTBC가 태블릿을 찾지 못했다면? 장시호가 정보를 실토하지 않았다면? 박근혜와 최순실은 지금과는 다른 운명을 겪고 있을 거다. 범죄자를 잡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애초에 엄두도 못 내게 하는 것이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원문: 박현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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