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를 해석하는 3가지 키워드

조회수 2017. 2. 18. 12: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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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문과의 SF' 영화를 만나다

※ 이 글은 내가 영화 <컨택트>를 보고 생각한 3가지 키워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영화를 본 후 이것저것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될지 몰라 정리해 둔다. 

글을 읽기 전 유념할 사항이 있다.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영화를 볼 예정인 사람들은 패스하는 것이 좋다.
  • 영화를 본 사람만 이해 가능한 글이다.

어느 날 거대한 회색 렌즈 모양 외계 우주선 12개가 지구로 내려온다. 그리고 다리 7개짜리 거대한 외계인(인간들이 햅타포드라고 이름 붙임)들은 인간에게 소통하고자 어필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깜놀한 인간들은 대체 이 거대 문어 놈들이 뭐하자는 짓거리인지 두려워하며 언어학자와 물리학자를 붙여 외계인과 소통하고자 한다. 그리고 소통이 시작되며 난리가 나는데...



1. 언어결정론


'언어결정론'은 캐릭터들을 주제로 이끌어가는 장치로 쓰인다. 언어결정론은 우리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한다는 이론이다. 이를 주장한 두 스승 제자 학자 이름을 따서 <샤피어 워프 가설>이라고도 불린다.


가장 흔한 예로 에스키모는 '눈'을 가르키는 단어가 500개이며 서구 도시인과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본다는 이야기가 있다.


'썸을 탄다'는 표현을 들면, 예전엔 썸 같은 관계에 대한 특별한 명칭이 없었고, 그런 관계는 있다가도 사라졌다. 그러나 썸이란 단어가 생기고 썸이란 개념이 우리 머리에 '선택 가능한 무엇'으로 자리 잡으며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안 사귀는 것도 아닌' 썸이란 관계가 우리 사회에 점점 늘어난다고 언어결정론은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학계는 언어결정론에 회의적이다. 유아를 대상으로 한 실험 등 각종 연구는 인간이 언어 이전에 세상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언어가 우리 사유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한정적이며, 그보다 사유가 언어에 끼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고 말한다.


앞의 썸을 예로 들면, '썸스러운 관계'가 자꾸 등장하면 결국 그걸 가르키는 '썸'이란 단어가 생긴다는 것이다. 얼핏 봐도 이쪽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작품은 픽션이며 언어결정론은 앞서 말했듯 주제로 가기 위한 '장치'이니 팩트든 아니든 상관없다. 일단 언어결정론이 맞다고 쳐주자.


주인공이자 언어학자인 루이는 외계인 언어를 배우며 그들식으로 사고하기 시작한다. 아니 사고하는 수준을 넘어 반쯤 외계인 스타일로 살게 된다. 그것이 뭐냐 하면...



2. 시공간을 아우르는 4차원


시공간이 한 덩이인 4차원에 사는 외계인이기에 그들의 언어도 4차원, 그걸 배운 언어학자의 사고도 언어결정론에 따라 4차원.


이런 이야기다. 3차원인 공간에 시간이 더해진 4차원을 말하는데. 우리 세상에선 시간은 바꿀 수 없는 요소이고 공간만 이동 가능하다면, 외계인의 세상에선 시간도 공간과 똑같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부엌에서 화장실 가듯 자유로이 미래에서 과거로 가는 셈이다.

사실 4차원을 칭할 때 꼭 공간에 시간을 더하는 것만 말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뭐 어차피 3차원에 사는 인간은 4차원 볼 일이 없고 이론적으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중 '시간'은 실제로 우리가 아는 물리법칙으로도 선형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밝혀져서 큰 흥미를 끌었다.


그래서 시간과 관련한 4차원을 많이들 이야기한다.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다는 건 현 우주에서도 특정인의 시간만 느려지든가 빨리질 수 있다는 것인데, 설명해볼 순 있으나 내 설명이 확실한지 몰라 패스한다.

테드 창의 원작 소설이 대단한 게 뭐냐면, 소설 진행 자체를 시간 흐름과 어긋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즉 형식이 주제를 드러낸다. 원래 소설이나 영화는 형식이 주제를 드러내는 거니까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희한한 방식을 택하진 않는다.


소설을 처음 읽거나 영화를 처음 보면 대체 이게 무슨 내용인지 싶다. 죽은 딸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가, 또 이제 막 태어난다는 내용이 나왔다가. 딸과 나눈 일상과 외계인과 조우한 모험이 뒤섞여 있는데, 그게 외계인 언어로 버프 받아 뇌가 4차원으로 활짝 열린 여주인공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그녀의 관점을 그대로 반영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면 소설에는 주제를 암식하는 게 3가지다. 하나는 앞서 말한 영화 속 뒤죽박죽 시간. 또 하나는 헵타포드의 문자. 마지막은 나중에 나오는 물리학 법칙 '페르마의 원리'.


헵타포드 문자는 굳이 나누면 '표의문자'다. 한자 馬자가 달리는 동물 말을 가르키듯 단어 하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참고로 한글이나 영어는 표음문자다. 표음 문자의 단어은 a가 아~라는 소리를 표현한다.

그런데 헵타포드의 표의문자는 인간의 표의문자하고 달리 아예 그들 입말과 무관하다. 예를 들어 好라는 한자는 '좋다'는 의미와 '호~'라는 발음과 연결되는데, 헵타포드 문자는 발음할 수 없다. 입으로 발음하는 언어가 따로 있는데, 그건 글로 쓸 수 없다. 말로 하는 언어, 글자로 쓰는 언어 2종류가 있단 뜻이다.


왜 이런 비효율을? 할지 모르나 이건 젊은 시절 비트겐슈타인이 들었으면 박수칠 상황이다. 일상에 오염되지 않은, 즉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뜻이 조금씩 다르게 쓰이지 않는 순수한 문자 언어로 논리적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우리로 치면 수학 기호로 문자를 대신한달까. 거기엔 '사랑'을 가르키는 단어는 없되 누구나 똑같이 받아들이는 다른 단어가 있겠지.

글이 좀 멀리 갔는데, 여하튼 헵타포드 문자는 굉장히 복잡한 원으로 표현되며, 모든 내용이 글자 딱 하나로 표현된다. 헵타포드가 허공에 휙 휘갈기면 글자 딱 하나에 지금 이 글을 모두 담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글자는 첫-중간-끝부분 획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즉 이 글을 헵타포드식으로 쓰면 바로 이곳과 글 첫 부분이 한 획으로 붙어있다. 지금 이 부분을 이렇게 쓸지를 미리 알았어야만 첫 획을 긋기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문자는 선형적이다. 어떤 논리의 순서대로 문자를 적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만약 내가 지금 이 글을 다짜고짜 아래처럼 시작하면 독자들은 이해 못 한다.

입으로 발음하는 언어가 따로 있고, 그건 글로 쓸 수 없다.

말로 하는 언어, 글자로 쓰는 언어 2종류다. 하지만 시간을 선형적으로 살지 않는 헵타포드는 이해 가능하고, 문자도 그렇게 쓴다. 영화와 소설에서 주인공들 문자를 해석하며 계속 이상하다며 고민하다가 헵타포드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챈다.


영화에선 별 역할 없었으나 소설에선 물리학자 남자도 역할이 있다. 물리학자가 헵타포드들이 물리학에 관해 소통하는 장면이 나온다. 헵타포드는 우리에게 쉬운 개념은 복잡하게 설명하고, 어려운 개념은 당연한 듯 너무 대충 설명한다.


소설은 물리학 법칙 중 '페르마의 원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한 점에서 나온 빛이 반사와 굴절을 통해 다른 점에 도달할 때 경로는, 실제 가장 짧은 거리가 아니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가장 빠른 경로를 택한다는 원리다.

이 원리는 약간 이상하다(라고 하더라. 나는 물리학 식견이 부족하다).


아시다시피 빛은 '입자'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빛을 비춘다는 건, 빛 입자가 출발해 어딘가로 향해 닿는다는 것. 그런데 페르마의 원리대로라면 빛이 출발하는 순간 자신이 닿을 '다른 지점'이 어딘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가장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목적까지 띄고 있다. 자연의 원리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물알못인 내가 봐도 약간 묘하다.


이게 바로 영화 주제하고 이어지는데, 그게 뭐냐면.



3. 자유의지란 무엇일까?


(다음은 순전히 내가 생각하는 주제다. 원래 소설이나 영화의 주제란 게 독자가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여주인공은 미래와 과거, 현재를 함께 살게 된다. 그건 무슨 이야기냐 하면, 곧 한 남자(물리학자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십수 년의 세월 뒤 남편하고는 이혼하고, 딸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할 것이라는 점(소설에선 등반 사고)을 처음부터 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남자와 결혼을 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결국 고통받을 텐데 말이다.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자. 내가 생각하는 <컨택트>의 가장 독특한 점은, 고작 이 주제를 말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오만가지 기묘한 SF소설적 장치를 교묘하게 또 효과적으로 이어붙였다는 것이다. 그 주제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 삶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을 수 있어. 처음엔 좋았다가 마지막에 나빠질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 삶이야. 부분부분은 모두 연결돼 있는 거야. 행복으로 충만한 순간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게 바꿀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면 우리는 그 순간을 위해 인생을 살아낼 만한 거야.

언젠가 아는 사진작가님과 술을 마시다가 엄청 취해서 "작가님 1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세요?"라고 물어본 적 있다. 지금은 잘 나가시는 작가지만 결혼한지 얼마 안돼 자식을 막 낳았던 그 시절은 여러모로 힘들었다.

"1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재밌게 지내고, 형수님은 다시 만나면 되고."


오래전 취해 들었던 대답이 아직도 기억난다.

"안돼요. 그러다가 우리 윤호(아들 이름) 안 태어나면 어떡해요."

자식이야 낳겠지만 딱 지금 이 아들은 아닐 수도 있어서 걱정된다고 했다. 딱 이 아이가 아니어도 예쁘겠지만, 태어난 이상 이 아이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무엇이고, 아무리 행복해지더라도 과거로 돌아갈 순 없다는 대답이었다.


영화 <컨택트>의 루이스 역시 마찬가지다. 딸 한나는 존재했었고, 존재했던 순간 무엇보다 가치 있었다. 웃음 하나로 루이스의 기분을 하늘로 올려놓았고, 어느 날 부쩍 어른스러워진 모습으로 루이스에게 큰 미스테리를 선사하기도 했다.


태어나서 행복과 미스테리를 주고 먼저 떠날 딸 한나를 낳기 위해 루이스는 정해진 삶을 차분히 밟아나간다.

결론이 정해진 세상에서 자유의지란 무엇일까? <컨택트>는 꼭 이런 철학적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영화 같지만, 그건 사실 한 요소일 뿐이다. 실제로 건네고자 한 건 우리 삶 순간순간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어떤 독자는 고작 그 이야길 하려고 이렇게 어렵게 영화를 만들었냐고 하겠는데. 그거야말로 순간의 소중함을 즐기지 못하는 자세다. 테드 창과 드니 빌뇌브가 만든 장치를 따라가는 순간 우린 행복한 지적 자극을 느끼지 않았는가.


원문: 이정섭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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