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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푸는 분노, 자책감과 죄책감

조회수 2017. 1. 9. 17:4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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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감과 죄책감에 스스로를 너무 내어주지 말자. 사실 그건 진짜 내 목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몸을 스스로 때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자기 마음은 많이들 때린다. 바로 자책감, 죄책감이다.


사실 이건 자기가 자기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벌을 주는 것이다. 몸을 때리든 마음을 때리든 자기가 자기를 때리면 결국은 아프고 고통스럽다.


타인에게든 자신에게든 우리는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화를 내면 된다. 화와 분노는 그 나름의 역할과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흐트러진 분위기를 다 잡고 어떤 대상이나 나 자신을 경계시키는 기능이다.


일반적으론 부드럽게 친절한 것이 좋지만, 그러나 상황이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좀 더 강한 표현과 에너지가 필요할 때가 있다. 혹은 상황이나 관계나 너무 일방적으로만 흐를 때도 그로 인해 치우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연스럽게 한쪽에서 화와 분노를 표현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필요할 땐 잘 써야 한다.


하지만 자기에게든 남에게든 화를 내는 건 그 목적이나 기능이 충족되면 적당히 멈추어야지, 어느 선을 지나서까지 계속하면 당연히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 어느 정도에서 대상을 봐주는 게 좋다. 특히 자신에게 향하는 화의 경우 자기도 모르게 행하는 자기 처벌을 멈추는 게 중요하다.


자기가 자기를 때리면, 심리적으론 뭔가 의미 있는 것을 하는 듯 느껴지긴 하겠지만, 결국엔 아플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자책은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하더라도 되었다 싶으면 그만두어야 한다. 자기에게 관대해 지고, 자기와 화해하고, 자기를 기꺼이 품어 주어야 한다.



자책은 게으르고 이기적이다, 그런데 엉터리로 이기적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자책 즉 자기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잘 멈추어지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하는 것인데 내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정체를 선명히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책과 죄책감은 얼핏 보면 뭔가 착한 듯도 하고, 하는 게 좀 더 바람직한 듯하게 느껴진다. 또 스스로 하면서 ‘힘들지만 뭔가 해야 할 것을 하는’ 듯한 묘한 자족감이나 안심감을 느끼기도 한다. 일종의 자가 경계인 듯도 하고 자기 단련이나 자기 조절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착각이다.


사실 정말 내가 나에게 화를 내야 할 것이 있다면, 그래서 분위기를 다잡고, 경계를 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고, 고칠 게 있다면 그걸 하면 된다. 그게 나에게 화를 내는 자책의 본래 기능이자 목적이자 효용성이다.


문제는 이것을 한 후에도 계속 화를 내거나, 혹은 이것조차도 하지 않고 화만 내는 경우이다. 자책은 사실 ‘자기 탓’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 탓이든 자기 탓이든, 핵심은 실제 해야 할 것은 하는 것이지 ‘탓’을 하는 게 아니다. 탓하기는 일종의 핑계이자 정신적 게으름이라 할 수도 있다. 할 것은 하지 않고 탓만 하는 것이다. 그게 상대적으로 쉬우니까. 그러므로 자책은 일종의 게으름이다.


자책은 또한 이기적인 것이기도 하다. 너무 ‘나’에게만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필요한 것은 나를 비롯한 타인들을 두루 살피고, 그리고 흘러가는 진행과 전체 상황을 살펴서 고치거나 수정하거나 바꾸어야 할 것을 효율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타인 그리고 전체 흐름과 상황에 좀 더 도움이 되게 하고 효율적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책 등은 ‘나만’ 계속 보는 것이다. 내 입장만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보일지, 내가 어떤 손해와 고통과 어려움에 처하게 될지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기적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보아야 하고 챙겨야 하는 게 맞다. 내가 아니면 날 보살피고 책임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정도껏 이어야 한다. 즉 너무 지나치게 나만 보고, 나만 생각하면 시야도 좁아지며 여러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길을 갈 때는 당연히 나 이외의 길 위의 타인들, 여러 장애물들, 길의 흐름 등을 같이 보아야 한다. 나와 타인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자책감 등은 나만 보면서 가는 것과 같다. 나에게도 좋지 않다.



나에게 화를 내는 건 진짜 내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그렇게 나에게 화를 내거나, 자기 탓을 하는 건 사실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라고 여기는 어떤 과거의 잔상이다. 내가 아니기에 조절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건 내 안에 있는 어떤 ‘환상의 인물’이다. 혹은 ‘과거의 흔적’이다. 그것를 나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로 과거의 부모들일 때가 많다. 내가 어릴 때, 외부의 주입을 전혀 방어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할 때 내가 잘못을 하면 심하게 나를 야단치고 내 탓을 하던. 때로는 실제 내 잘못이 없을 때조차도 나는 야단을 맞거나, 화풀이의 대상이 되거나, 남 탓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부정적 영향을 준 과거의 다른 타인들일 수도 있다.


아이는 그렇게 받는 부당한 화풀이와 심한 야단, 부당한 탓에 대해 제대로 대처를 할 수 없다. 결국, 이런 생각의 회로가 자리 잡는다.


그래, 모든 게 내 탓이다. 내가 잘못된 존재이다. 내가 틀리게 한 것이다. 나는 화를 받을 만하다. 야단을 맞을 만하다.


그리고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그게 ‘사실’이고, 그리고 스스로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여기고, 그게 맞다고 여긴다. 사실은 이유가 없다. ‘그냥’이다.

출처: Welingelichte Kringen

그런데 우리 좌뇌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없는 것을 만들어 갖다 붙인 후 그게 진짜 이유나 원인이라고 여기는 절대적 습성이 있다. 그리고 이제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부모나 타인이 아니라 자시 자신이 된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그건 ‘나’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나 기능’ 즉 ‘주체 설정’ 기능은 묘한 구석이 있어서, 본래 없던 ‘나’라는 주체도 설정했지만, 그에 더해서 ‘나’ 아닌 것들도 얼마든지 ‘나’로 포함시키고 또 동일시할 수가 있다. 반대로 분리 시키고 대상화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 ‘나’로 합쳐진, ‘나’의 범위에 들어온 그것이 나에게 과도하게 화를 내고 나를 야단치고 나를 처벌한다. 그러면서 그게 정당하고, 합당하고, 필요한 일이라 느끼고 믿는다. 그렇게 해야 내가 좀 더 잘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뭔가 잘못되는 것이 다시 제대로 되고, 바람직하게 된다고 여긴다.


자책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뭔가 심리적 충족감도 준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순전한 착각이다. 그건 과거의 상대방들의 마음이었다. 내 마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자책을 하면서 내가 기대하는 안심, 충족, 합당 등 그런 건 없다. 불필요한 ‘자가 분노’, 즉 자책과 죄책감은 사실상 나를 위해 바람직한 일은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그 타인들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다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수십 년 전이든 1분 전이든 똑같이 과거이다. 자책은 나에게는 반대로 고통과 상처와 불안과 우울 등을 더할 뿐이다.



내 뇌 안의 ‘디폴트 네트워크’


뇌과학에 ‘디폴트 네트워크’라는 용어가 있다. 우리가 가만히 있을 때 뇌가 쉬는 게 아니라 일정 부분이 계속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렇다. 평소 활동할 때의 영역과 비교해도 상당 부분이 된다니 결코 적은 게 아니다. 이 영역에 대한 연구는 현재 진행 중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가 ‘가만히’ 있을 때 우리에게 계속 드는 느낌이나 생각 등도 이 영역의 영향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과거에 쭉 받아왔던 자극과 정보 그리고 경험치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이다.


자책감과 죄책감 그리고 평소 나에게 계속 드는 불안한 감 등도 모두 이 디폴트 네트워크의 흐름인 것이다. 즉 실제 뭔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내 뇌 속에 그런 신경회로가 남아서 그런 것일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러한 구조를 눈치채고, 그리고 평소 나에게 어떤 느낌, 기분, 감정이 들더라도 그걸 너무 ‘절대시, 전부시, 사실시’ 하지 않는 것이다. 느껴지고 생각나고 일어나지만, 그 일어난 것들에 점점 무심해지고 무관심 해지는 것이다. 심드렁해하는 것이다.


왜, 그건 그냥 아직 내 뇌에 남아있는 디폴트 네트워크의 신경회로일 뿐이니까. 우선은 이렇게 눈치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에 더해서 계속 나에게 좀 더 좋은 느낌, 기분, 생각, 경험을 주어서 자신의 디폴트 네트워크를 바꾸어 가는 것이다. 굳이 안 바꾸어도 그 게임을 아는 것으로도 충분하지만, 이왕이면 더 긍정적으로 바꾸어가는 게 좋다.


앞에서 화와 분노도 나름의 기능과 역할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화를 내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화와 분노를 긍정적 기능으로 이용하는 경우는, 있긴 하지만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에게든 나 자신에게든 불필요한 화를 내는 건 되도록이면 하지 않는 것이 유용하다. 화 대신 뭔가 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행위들을 지혜롭게 찾아서 해야 한다.


보통 화, 분노, 짜증 등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터뜨리는 불안’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불안의 터뜨림은 자기와 타인 모두에 좋지 않다. 우린 얼마든지 다른 더 효과적이고 유용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 우리에겐 그런 힘과 지혜와 사랑에 있다.



이렇게 하자!


▶ 자책이 일어나면서 스스로 ‘아, 안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계속하게 되면, 그러면서 힘들어지게 되면 이제 다음을 눈치채자. 그건 게으른 것이고 이기적인 것이다. 타인들의 것이다. 모두 지나간 과거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겐 아무런 유용성이 없다. 또한 내가 나에게만 너무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책을 통해 내가 뭔가 얻을 것이라 믿는 모든 것은 환상이다.


▶ 자책은 내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고 자기 처벌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진짜 ‘나’가 아니다. 내 속에 과거에 심어진 타인들의 상이다. 어릴 때 비판 없이 받아들였고, 그 후에 나와 동일시하면서 나의 일부로 여기게 되었을 뿐 내가 아니다.


내가 그 환상을 계속 유지할 이유는 하나도 없으며 더군나 그 환상을 나로 여길 이유도 전혀 없다. 순진하고 바보 같은 짓이다. 이러한 것들을 눈치채는 것이다. 우선은 이것이 필요하다.


▶ 이제는 제대로 해 보는 것이다. 설사 내가 나를 경계시키기 위해서, 다잡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화를 낸다면 그렇게 해서 반성하고, 성찰하고 또 고칠 것을 고치면 된다. 그 후에는 계속 화를 낼 이유가, 자책할 이유가,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위에 적은 것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스스로 계속 속고 있기에 그런 것임을 눈치채자. 선명히 알면 알수록 점점 저절로 없어진다.


▶ 그리고 나를 제대로 대접하자. 나에게도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대해 주자. 나도 나에게는 공평하게 대해줘야 할 타인이기 때문이다.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관대하게 대해 주자.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지 않은가? 타인들도 그렇게 대해주는데 하물며 나에게는 더 잘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진정한 자기 사랑이고 자기애이다.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다. 진짜 내 목소리를 찾자.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하면서 ‘아직 아니야’, ‘이 정도론 안 돼’, ‘뭔가 부족해’, ‘모자라’는 마음가짐을 우리는 많이 가진다. 그러면서 그런 마음가짐이 우리를 더 잡게 하고, 게으르지 않게 하고, 뭔가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자꾸만 자신을 위축시키고, 삶의 즐거움을 앗아가고, 일상을 위축시킨다.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다. 내 안의 과거 인물들의 목소리이다. 이럴 눈치채고 그런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과감하게 쳐내 버려야 한다. 내 마음을 점령하고 있게 두어선 안 된다.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내 목소리가 아니다.


좀 더 건강한 삶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바로 자족, 자가 만족, 자가 충족감이다. 이것들은 사실 자기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렇게 만족한다거나 해서 게을러지거나 하는 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가 만족감이 삶의 바탕이 되어, 기초가 되어 그 위에 더 튼튼하게 삶의 집을 지어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마음가짐의 바탕에서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들을 계속 추구하고 탐구하면 된다. 이런 것을 진짜 내 목소리로 만들어야 한다. 또 실제 내 목소리이기도 하다.


삶에 최선을 다하고, 계속 발전을 추구하고, 탐구를 멈추지 않되, 웬만하면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마음가짐이 좋다. ‘많이 누렸다’도 괜찮다. ‘할 만큼 했다’도 좋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마음을 가지며 더이상 무엇을 추구하거나 성취하려 하지 않거나 하자는 말이 아니다. 쉽게 현재에 안주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계속 자신이 더 원하는 데로, 필요한 데로 추구하고, 탐구하고, 행동해 나가면 된다. 그러면서 그 마음 바탕을 이렇게 가지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과 이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더 유리하고 좋은지는 자명하다. 불필요한 자책감과 죄책감보다 훨씬 나 자신에게 이익이다.


우리, 이왕 이기적이 되려면 제대로 이기적이 되어 보자.


원문: 필로 이경희의 브런치


『자기 미움』의 출간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자세히 보기: 교보문고 / YES24 / 알라딘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책 ‘자기 미움’이 출간되었습니다. 좋은 출판사 ‘북스톤’에서 정성 들여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동안 브런치에서 ‘자기 미움’을 주제로 연재해온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습니다. 책의 부제처럼 이 책이 많은 분들에게 ‘가장 가깝기에 가장 버거운, 나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책의 내용 중엔 우리 자신의 ‘자기 미움’ 심리와 더불어, ‘정체성 문제, 감정 다루기, 상처 넘어서기, 타인과의 관계’ 영역에서 실제 도움이 되는 이해와 구체적인 실천법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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