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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대한제국의 7가지 쌩얼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그 시대의 진짜 모습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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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대한제국 시대를 전후한 근대는 매력적인 시대다. 


서구문물이 들어오며 생활문화가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자유연애가 확산되며 남녀 관계가 변화하고, 극장이 들어서고, 철도, 전기, 전화가 도입되었다. 한편 나라는 망국을 향해 가며 오늘의 헬조선을 넘어서는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그 시대의 진짜 모습을 몇 가지 소개한다.



1. 100년 전에도 영어 할 줄 안다며 허세를 부렸다

나는 읽을 줄은 전혀 모르면서도, 어쩐지 내 모습이 초라하다고 생각되어, 혹 영자 신문이라도 읽고 있으면 남 보기에 체면이 좀 설까 하는 가련한 생각에, 10전 은화를 주고서 오늘자 <차이나프레스>를 샀다. 기껏 사기는 했지만 영어를 읽을 줄 몰라서, 광고 그림과 사진만 몇 장 본 뒤, 외투 호주머니에 ‘신문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반쯤 삐져나오게 집어넣어서 몸 치장용으로 삼았다.

1932년 <차이나 프레스> 1면

출처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저 이광수가 1915년 <청춘> 6호에 싣은 블라디보스토크 기행문 중 일부다. 자기가 가련해서 영자신문 읽는 ‘인텔리’인 척하고 싶었다니.


어디 이 뿐이랴. 음악가 홍난파는 러시아 소설을 굳이 ‘영역본’으로 읽는다고 허세를 부린 적이 있고, 문예지 <창조>에 글줄 몇 개 쓰던 자는 자기가 화류계 구경 시켜달라고 졸랐으면서 막상 그 앞에선 신문기자라며 거드름을 피운다.


그들도 그때는 고작 20대에 막 들어선 청춘이었다. 100년 전 우리 선조들 역시 젊은 시절엔 그토록 찌질하였다.



2. 100년 전에 개에다 주인 이름을 달도록 했다

①개의 목에 주인의 이름이 적힌 목걸이를 걸어 둘 것. ②만일 목걸이가 없는 개가 있다면 떠돌이 개로 간주하고 살처분 할 것. ③광견병에 걸린 개는 주인 유무에 관계없이 살처분할 것.” <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 13일자에 실린 ‘축견취체규칙’ 즉, 개를 기르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이다.

오늘날과 진배없이 당연해 보이는 이 규칙이 당시에는 큰 반발을 샀다. 당시에는 개를 요즘처럼 집안에서 애지중지 애완동물 혹은 반려동물로 키우지 않았다. 개가 동네 어귀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키우던 시절이라 개에게 목줄을 채우고 주인을 밝히는 게 낯설었다.


더구나 양반들은 어찌 지체 높은 양반의 이름을 개에게 달아주냐며 크게 반발했다. 이미 신분제는 폐지 됐지만 사회 관습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3. 100년 전 민심은 인력거꾼에게 물어라


근대에 들어서면서 우리에게도 탈 것이 풍부해졌다. 전에는 기껏해야 수레나 가마 정도였다면 대한제국 시대에는 기차, 전차, 그리고 인력거가 생겨난 것이다.


당시 인력거가 늘어나자 정부는 인력거에 대한 규칙도 세웠다. 차량을 등록제로 하여 함부로 개조하지 못하게 하고, 호객 행위나 승차 거부를 금하고, 야간에는 등화를 밝히고, 추월을 할 때는 먼저 소리로 추월 의사를 알린 후, 선행차는 좌측으로 후행차는 우측으로 추월한다는 것 등이다.

1920년대 말 기생을 태우고 가는 인력거

민심을 알아보려면 택시를 타보라는 말이 있는데, 당시에도 인력거꾼은 기자들에게 여러모로 좋은 소재였다. 인력거꾼이 보고 듣는게 많기 때문이다. 꺼리가 풍부하니 ‘거부오해’라는 시리즈까지 만들어 연재했다. 하나를 읽어보자.

일간에 일본에서 통감이 건너온다 하니 알 수 없네. 정부 관리들이 공부를 더 하려 함인가. 우리나라에도 통감이 없을 리가 없는데 하필 일본에서 가져올 것이 무엇인가.

이는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초대 통감(統監)으로 오는 이토 히로부미를 역사책 <통감(通鑑)>으로 오해한 대목이다. 오해를 빙자해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서려있다.



4. 100년 전에도 결혼을 포기하는 세태를 걱정했다


1920년대는 서양식으로 옷을 입은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등장하고, 자유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고루한 유교사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으나 부작용도 있었다. 1922년 경성에서 일어난 자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연애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동경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전통 교육을 받은 아내를 두고도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과 연애를 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러자 이혼이 급속히 증가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이제는 독신자와 늦게 결혼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만혼 타개 좌담회’라는 게 열렸는데 되려 이런 얘기가 오고갔다. “행복한 결혼보다 불행한 결혼이 많다는 점에서 독신 생활을 주장하는 건 당연해요. (나혜석)”, “혼자 살기도 어려운 세상에 아내까지 얻어서는 생활할 도리가 없다 보니 젉은 남자들도 결혼하지 않는 겁니다. 경제적 요인이 가장 큰 이유죠.(이광수)” 이것 참 예나 지금이나…


그런데 또 재밌는 건 나혜석과 이광수가 일본 유학 시절 서로 연애 감정을 품었다는 썰이 있다는 것. 이 썰에 의하면 나혜석의 친오빠인 나경석의 반대로 두 사람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이광수의 소설 <어린 벗에게>는 이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고 있다고 한다.



5. 100년 전에도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 있었다


1898년 <황성신문> 11월 3일자 논설에 보면 기자와 시골 손님이 주고받는 대화 중 ‘여성 교육이 왜 필요한가?’ 라는 대목이 나온다. 기자는 “한 나라의 어미에게 배움이 있으면 그 자녀들이 예의를 익힐 것이요, 천하의 아내들에게 배움이 있으면 그 남편들이 다 대신들이 될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1890년대 이후 여성들도 규중에서 벗어나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결코 여성 ‘개인’의 인격과 자아실현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신식 교육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맞는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1914년 <매일신보>에서는 일본어 회화도 가능할 정도로 배운 여자가 결혼 후에 허영심을 누르지 못하고 유행이나 쫓아 다닌다며 비판했다. 그녀를 가르켜 ‘얼개화(완전하지 않고 어중간하게 된 개화)’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했다. 우리가 정해준 울타리 안에 있으라는 주류의 프레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6. 100년 전에도 학생들의 꿈은 공무원이었다


1915년 <청춘>이라는 잡지의 한 대목을 보자. 글쓴이는 가끔 학생들을 만나 “너는 앞으로 무엇이 되려고 하니?”라고 묻는다. 그러면 보통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한단다. 그나마 대답을 한다는 게 “공무원 시험이나 볼까해요.”라면서 혀를 찬다.


한 번은 수학을 열심히 하는 학생이 있길래 같은 질문을 했더니 “교사 자격증 따면 중학교 선생 노릇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2016년이 아니다. 1915년이다.


요즘 학생들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하는 건 불확실성이 큰 세상이기 때문이다. 큰 뜻을 품고 노력해도 보상은 적고, 만약 실패하면 재기할 기회조차 없다. 그래서 누구나 안정된 직장을 찾게 된다.

1910년대 역시 그러했다. 식민지치하 교육방침 아래서 어떤 포부나 이상을 품을 수 있었을까? 망국이 되어버린 대한제국 학생들과 OECD 가입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학생들의 현실인식이 비슷하다는 건 다소 충격이지만 오늘이 달리 헬조선이겠는가.



7. 100년 전, 대한제국 백성들은 광장으로 모였다


우리가 ‘백정도 연설했다더라’ 정도로 알고있는 만민공동회는 사실 시민혁명의 시초였다. 1898년 3월 종로에는 약 1만여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부산의 절영도를 러시아에 석탄 저장소로 빌려주기로 했다는 소식에, 나라 땅을 외국인에게 팔아 넘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집회는 며칠동안 이어졌고 결국 정부는 결정을 철회하고 외무대신을 해임시킨다. 관료도 양반도 아닌 평범한 백성들이 모여 나랏일에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킨 최초의 사례였다.

만민공동회

출처우리역사넷

그리고 1898년 10월, 대한제국 백성들은 다시 광장으로 모인다. 독립협회가 국정 개혁의 대원칙을 세우자며 개혁 관료 세력과 연합해 대대적인 규모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것이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을 개혁하기 위한 6개의 조항, 즉 ‘헌의 6조’를 만들어 고종에게 전달한다. 고종은 처음에는 매우 반기는 듯 하더니, 11월 5일 새벽 독립협회 간부 17인을 긴급 체포했다. ‘역모’를 꾀한다는 제보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 나왔다. 백성들은 17인을 즉각 석방하고 헌의 6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여러 학교 학생들이 독립협회 회원을 충군애국지사로 여겨 자기들도 참여하고 싶다며 나섰다.


지나가던 사람은 협회원들이 밤을 새우는 모습을 보기 안쓰러워 장국밥 300그릇을 보내왔다. 열두 살 아이도 공동회에서 연설을 하다가 우리나라 망하겠소 한마디에 사람들이 통곡했고, 가진 것 없고 평범한 사람들이 2원씩, 3원씩 후원했다. 시골 사는 콩나물 장사 하는 늙은 여인이 서울까지 와 콩나물을 팔고는 그 돈으로 후원금을 내고 갔다.


이런 제보가 끝도 없이 많았다. 실로 2016년 11월 정부의 거짓과 무능 앞에 100만인이 촛불을 들고 선 오늘의 우리와 정확히 겹쳐진다. 우리는 과연 지난 100년 간 얼마나 나은 세상을 만들었는가? 이 질문을 던지기 앞서 우리는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과 정치 환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딱딱하게 굳은 지식이 아니라 그 시대의 눈과 입으로 전하는, 피가 돌고 생기가 흘러 살아있는 ‘표정’으로 접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100년 전 신문으로 읽는 오늘의 인문학’은 과거를 비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기 위한 작은 시도다. 100년 전 신문에서 지금도 의미있는 이야기를 가려 뽑았고, 누구나 읽기 쉽도록 현대어로 각색했다. 이제 이 책을 읽어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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