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점점 의식을 잃어 갔다

조회수 2018. 9. 18.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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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이 말벌에 쏘였다는 것이다.

햇살 좋은 어느 날, 시장에 나가 햇양파 한 망을 샀다. 양파는 냉장고에 보관하고 망은 어찌할까 가만히 접다 보니 아련한 추억 한 조각이 떠오른다. 


추석 전날, 아버님은 아들과 벌초에 나섰다. 한참 후 남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이 말벌에 쏘였다는 것이다. 가족 모두 놀라 달려 나갔다. 아버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점점 의식을 잃어 갔다. 


남편은 서둘러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빠른 치료 덕분에 멀쩡히 걸어오는 아버님 모습에 다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 날, 차례를 마친 가족들은 둘러앉아 말벌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때 의리의 작은아버님 왈, 형님이 벌에게 당한 것이 억울하단다. 그러더니 원수는 꼭 갚아야 직성이 풀린다며 아버님을 부추겼다.


음복주로 얼큰히 취기가 오른 두 분은 헛간에서 빨간 양파 망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노란색 비옷은 갑옷이 되었고 양손엔 고무장갑을 끼고, 긴 장화까지 신었다. 모기와 파리를 잡는 약까지 챙겨 산을 오를 태세였다. 다들 위험하다며 극구 말리다 두 분의 고집에 손을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두 분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출발할 때 위풍당당한 모습은 오간 데 없고 풀 죽은 패잔병처럼 서 있는 게 아닌가. 양파 망 안의 얼굴은 벌에 쏘여 퉁퉁 부어 있었다. 


두 분은 “당했다.”라는 짧은 말만 내뱉었다. 다행히 전날과 달리 상처는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씁쓸한 표정으로 상처에 꿀과 된장을 바르는 두 분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였다.


그 우스꽝스런 광경에 다들 웃음보가 터졌고, 두 분이 민망할까 봐 뒤돌아서 배를 잡고 눈물이 날 때까지 한바탕 웃고 말았다.


그날의 소동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짧은 에피소드로 끝났지만 아찔했던 상황만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악몽으로 남았다.


_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한미정 님의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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