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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가 익을 무렵이면

조회수 2018. 3. 29. 09:2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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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은 그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고향 집 뒤란에는 앵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해마다 앵두가 빨갛게 익으면 그 모양이 어찌나 곱고 탐스럽던지, 장독대 옆에 화사하던 작약도 기가 죽어 고개 숙이며 시들었다.


서울에 살 때, 앵두가 익어 갈 무렵이면 향수병이 도졌다. 그럴 때면 어머니가 바쁜 농사일도 접고 앵두를 한 소쿠리 따 가지고 날 보러 왔다.


결혼 후 십 년 만에 집을 장만할 때도 나는 뜰에 앵두나무가 있는 게 좋아 이 집을 택했다. 마당을 텃밭 삼아 호박과 오이, 상추, 고추를 심었다. 여름이면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갓 걷은 채소와 곁들이며 밤이 이슥하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한순간에 깨졌다. 야무지고 튼튼하던 딸아이가 난치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먼 대학 병원에 다니며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아프지 않은 곳으로 떠났다.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였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얼마 뒤엔 아들마저 입대하면서 텃밭을 가꾸고 싶은 의욕도 사라졌다. 그냥 버려두었다. 그나마 딸이 잡초를 뽑다 씨를 떨어뜨려 돋아난 어린 앵두나무를 살피는 일이 위안거리였다.


딸을 보내고 두 번째 맞이하는 봄, 안방 창가의 양지바른 곳에 있는 어린나무가 꽃을 피우더니 올망졸망 열매 맺었다. 자고 일어나면 먼저 창문을 열어 딸의 나무를 살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미 앵두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을수록 어린 앵두나무의 연두색 열매가 점점 커지더니 하얘졌다. 앵두 알이 굵어질수록 흰빛을 띠다 못해 투명해져서 과육 안의 씨까지 다 보였다. 딸아이의 우윳빛 피부색과 닮았다. 해맑은 그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해마다 앵두가 익는 계절이 오면 주인 잃은 딸의 앵두나무는 상복을 입은 것처럼 하얀 빛깔로 익어 간다. 여느 앵두보다 알이 굵은 하얀 앵두는 신맛이 거의 없고 유난히 달고 연하다. 앵두가 익을 무렵이면, 하늘에 올라간 딸이 환히 웃으며 꿈길을 달려 잠시 나에게 다녀가곤 한다.


_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유영옥 님의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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