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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요금이 아까웠던 남편은 집까지 40여 분을 걸어왔다

조회수 2018. 1. 2.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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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자리에 눕자마자 코 고는 남편을 보며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디예요?” 

“응, 지금 역에서 내려 걸어가고 있어.”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통화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걸쳐 입곤 남편을 마중 나갔다.


지난해, 갑자기 퇴직한 남편은 한동안 전전긍긍하더니 봄이 시작될 무렵 지인의 회사에 나갔다. 일을 한다기보다 도와준다는 의미로, 월급 대신 용돈 받는 정도로. 물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정년퇴직을 겪지만 보다 빨리, 뜻하지 않은 이유로 그만두다 보니 무척 당황했다. 


모아 둔 돈도 없고, 두 아이는 아직 대학생이었다. 남편은 퇴직하기 전에 여러 곳을 알아보며 다른 방법을 찾았지만 현실은 그와 무관하게 흘러갔다.


거의 일 년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에 남편 역시 막막했을 것이다. 손에 쥔 건 없어도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살아온 남편, 하다못해 한 이불 덮고 사는 내게도 꼿꼿하게 자존심을 세운다. 그뿐인가? 아이들에게는 자상하다 못해 속이 빈 것처럼 무엇이든 해 준다. 그러다 보니 정작 자신을 위해 쓸 여유가 없어 언젠가부터 남편 모습이 초라해졌다.


일 년 내내 구두 한 켤레를 신는데 그것도 낡아서 비라도 오면 양말이 흠뻑 젖어 수선집에서 창을 갈아야 한다. 남방 목 부분은 해져 깃을 바꿔 달아 입고, 소매는 수선조차 할 수 없어 접어 입고, 청바지는 짜깁기하고…….


“내 성격도 참, 한 번 마음에 든 옷만 죽어라 입으니.”

아이들 앞에서는 당신의 성격 탓으로 돌린다. 내색하진 않지만 속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러다 찾은 방법이 내년 여름까지 지인을 돕기로 한 것이다.  


“월급은 예전과 달라. 그러니까 내년 여름까지는 긴장하고 살아야 할 것 같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래도 다행이라며 되레 나를 안심시키는 남편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남편의 직장 생활에 문제가 생겼다.


회사가 강남에 있는데 퇴근 후 술 한잔하다 보면 막차를 타야 했다. 안산에 도착하면 시내버스는 끊긴 후였다. 집까지 오려면 택시를 타야 했는데 오천 원 정도 나오는 택시 요금이 아까웠던 남편은 집까지 40여 분을 걸어왔다. 


“운동도 할 겸 걷기로 했어. 좋던데?”

지난여름, 땀에 흠뻑 젖어 집으로 들어온 남편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밤 자리에 눕자마자 코 고는 남편을 보며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낯선 일. 현실이 답답해 술 한잔 마시며 마음을 비워 내고, 늦은 시간에 혼자 터덜터덜 집에 오는 남편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다음 날부터 나는 남편이 역에 내릴 시간에 마중을 갔다.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남편은 내가 너무 많이 걷지 않도록 혼자 한참을 걸은 후에야 나오라고 했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남편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 나누니 서로를 다독여 주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도 품었다. 오늘도 길 저쪽에 낯익은 모습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먼저 손 흔들었지만 아무런 답이 없다. 그래도 나는 서운하지 않다. 거리가 멀어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남편은 나를 보고 웃었을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_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정순옥 님의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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