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아파트에 화재가 났다

조회수 2017. 10. 21.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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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소파에 누워 뉴스를 보는데, 한 아파트의 화재 소식이 나왔다. 그걸보니 예전 일이 떠올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올해 초, 소파에 누워 뉴스를 보는데, 한 아파트의 화재 소식이 나왔다. 그걸보니 예전 일이 떠올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1988년 1월 25일, 그날은 작은아들의 돌잔치 음식 준비에 아침부터 바빴다. 큰솥에 물을 가득 담아 연탄불 위에 올려놓고, 아이를 재우기 위해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불이야!”라고 소리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집으로 달려갔다.


불이 난 곳은 우리 집이었다. 잠깐 집을 비운 사이 큰아이 친구가 놀러 온 모양이었다. 어른들이 없는 공간에서 네 살배기 아이 둘은 얼마나 신났을까. 아들 친구 손에 들린 라이터가 화근이었다.


불은 아래, 윗집에도 피해를 줬다. 동네 어른들은 남의 집 아이가 불을 낸 데다, 여섯 살이 넘지 않은 아이가 저지른 화재는 법적 책임이 없다며 얼른 도망가라 했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피해를 입은 이웃들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없었다. 법을 떠나 그날 화재는 집안을 잘 돌보지 못한 내 책임이었다.


전 재산인 전셋돈과 돌잔치 하려고 모아 둔 돈, 큰아이 백일과 돌 때 들어온 금반지 등 가진건 모두 내놓았다. 보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까지는 석 달 반이나 걸렸다.


동네를 떠나던 날, 리어카에 실린 타다 남은 냄비와 구호품으로 받은 그릇과담요를 내려다보는데, 그제야 암담한 현실이 느껴졌는지 팔은 제멋대로 흐느적거렸고 관절은 풍선 바람 빠지듯 힘없이 접혔다.


우린 성남의 어느 구릉 위 집에 도착했다. 이삿짐을 내리는데 문득 떠나기 전, 동네 어르신 한 분이 나중에 열어 보라며 냄비 속에 무언가 넣는 모습이 떠올랐다.


냄비를 열어 보니 지폐와 동전이 뒤엉켜 있었다. 급하게 쓴 쪽지도 있었다. 삐뚤 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살면 좋은 날 있을 거야. 열심히 사는 모습이 예쁘고 고마워서, 사랑을 줄 수밖에 없었어.”


세월이 약이라더니 우리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고 어르신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 옛 동네를 찾았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니 예전에 불던 바람이 뛰어나와 반기듯 나를 감쌌다. 코끝이 시큰했다. 삼거리 슈퍼도 보였다. 하루에 한 번은 꼭 들락댔던 그곳의 문을 여니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불에 탄 냄비가 떠올라 한동안 잠을 못 잤는데.”


슈퍼 아주머니가 나를 반겼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기쁨보다는 가슴이 아렸다. 주인아주머니를 뒤로하고 걷는데 동네 길목이 눈에 들어왔다. 옛 모습 그대로였다. 어르신들이 집 앞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 나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며,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쉴 새 없이 물었다. 혹시 젊은 새댁이 큰일을 당해서 엉뚱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했단다.


그날의 화재는 저녁 뉴스에도 나와 동네 사람들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바로 앞집에 살던 할머니는 “불쌍해서 어쩌누.” 하며 연신 혀를 찼다. 할머니는 일곱 살인 손자를 돌봐 주고 있었는데, 우리 소식을 듣고 손자가 작아서 입지 못하던 옷을 모조리 줬다. 옷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이들 옷을 5년간 산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이사 날 냄비에 돈을 넣어 준 어르신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야기해 주었다. 그해 겨울은 바람도 많이 불어 몹시 추웠고, 그 날씨에 동네 어르신들이 너 나할 거 없이 조를 나눠 구걸 아닌 구걸로 모은 돈이라는 거였다.


생각에 잠긴 어르신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날의 화재는 어르신들에게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게아니었을까. 그때의 고생이 뿌듯했다며 자연스레 짓는 미소를 어떻게 잊을 수있을까. 뉴스 속 화재의 당사자도 이웃의 사랑으로 얼른 상처가 아물길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_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홍서연 님이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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