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모살이 많이 하던 그 시절, 아버지를 따라 버스에 탔다

조회수 2017. 6. 8.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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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여름이었다. 어머니가 깨끗한 옷을 골라 주며 아버지를 따라가라고 했다. _본문 中

우리 마을에는 하루 두 번 버스가 지나갔다.


친구들은 버스를 타고 읍내에 나가 목욕하거나 머리를 깎았다. 그런 날이면 예외 없이 자랑했다. 그러나 우리는 물을 끓여 목욕하고, 보자기를 어깨에 걸친 채 가위 든 어머니 앞에 앉아야 했다. 나는 매일 버스에 올라타 “오라이!” 하고 외치는 안내양이 부러웠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이었다. 어머니가 깨끗한 옷을 골라 주며 아버지를 따라가라고 했다. 언니, 오빠는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네 살 아래 남동생과 노는 중이었는데 나만 불러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끌며 버스에 올랐다. 나는 불안했다. 그토록 소원하던 버스를 탔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을 다른 집 수양딸로 보낸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친구 언니가 도시에서 식모살이한다는 말도 들었다.


버스는 낯선 곳에 아버지와 나를 내려놓았다. 행여 놓칠세라 아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짝 붙었다. 아버지는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 농기구 몇 가지를 샀다. 그리고 출입문에 붉은 천이 걸린 곳으로 들어가 짜장면을 시켰다.


'아, 나에게 맛있는 걸 사 주고 어디론가 데려가려나 보다.' 하지만 불안함도 잠시, 맛있는 냄새에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새까맣고 반들반들한 짜장면이 나왔다. 아버지는 나무젓가락을 찢어 쓱쓱 비벼 주었다. 


“오늘이 니 생일이니까네, 많이 먹어라이.”

그날은 내 열한 번째 생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나는 그릇에 코를 박고 마지막 건더기까지 입에 넣은 뒤에야 아버지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는 당신 배에서 나는 주린 소리는 생각지도 않고 배부른 자식을 보며 흐뭇해하고 계셨다.


*월간 「좋은생각」에 실린 윤숙옥 님의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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