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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역대급 바람둥이 임금 TOP3

지금이었다면 이미 모두 철컹철컹...
팟빵 작성일자2018.04.04. | 253,725  view

한국사 책이나 사극을 보면

왕이 여러 명의 부인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흔히 등장합니다.

다 왕비들입니다(...)

source : KBS 사극 <제국의 아침> 캡쳐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던 시대이니

당시에야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임금의 총애나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크고 작은 분란이 계속해서 

있었던 것을 보면,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것은 

그 시대의 절대권력인 왕에게도 

녹록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왕으로서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어마어마한 수의 부인을 두고 있었던

'바람둥이' 왕들이 있습니다.


 일부다처제가 아무렇지 않던 시대에도

왕이 거느린 수많은 여인의 수에

세간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였던 걸까요?


가장 대표적인 세 명을 뽑아보았습니다.



1. 혼인동맹의 원조, 태조 왕건

태조 왕건

고려의 시조인 태조 왕건은

왕후 6명과 부인 23명,

합해서 29명의 배우자가 있었습니다.


기록이 남아 있는 왕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수인데요,

이들에게서 태어난 자녀의 수는

34명이나 됩니다...ㄷㄷㄷ


후덜덜

사실 왕건은 많은 부인을 두었으나,

'바람둥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약간 어폐가 있는데요,


그는 단지 여성편력이 심해

여러 여인을 곁에 두었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략으로서

결혼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혼돈과 공포의 10세기 한반도(...)

source : @code404

왕건이 새 나라를 건국하고자 했던

통일신라 말기는 극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힘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더 큰 권력을 쥐고자 경쟁했고,

이 다툼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에도

쉬이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혼란을 막고 지지 기반을 확실히 하려면

각 지방의 실권을 쥐고 있는 호족들을

반드시 한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그때,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왕건의 전략이 바로 혼인이었습니다.


지역 호족들의 딸이나 누이와 혼인하여

그들을 왕실의 외척으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화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후대에 와서는 이 과정을

‘혼인동맹’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왕건의 부인 지도'를 설명한 방송.
전국 각지에서 고르게 혼인한 것을 보면
혼인을 통해 왕건이 이루고자 했던
정치적 목적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source : OtvN · 들어는 봤나, 왕건의 ′부인 지도′!

'부인을 볼모로 삼은 것이 아니냐'

눈살을 찌푸리시는 분도 있을 텐데요,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기도 하고

지금이라면 결코 용납되지 않을 일이지만,


당시의 정서로는 그것이 가능했고

또 그 전략(?)이 상당 부분 유효하게

먹혀들기도 했습니다.


왕건이 처음 목적했던

통일국가 건국에 성공했으니까요.

...그랬다고는 하지만,

물론 혼인동맹의 부작용

만만치 않았습니다.


전국 팔도에 부인들이 있다 보니,

부인들로서는 남편인 왕건을 만나기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고 합니다.


때문에 모든 부인들이 공평하게

남편을 만날 수 있도록(...)

날짜를 정해 왕건을 만났다고 하네요,

왕과 그의 장인어른s

source : KBS 드라마 <태조 왕건> 캡쳐

혼인 정책의 가장 큰 문제

왕건이 사망한 후 발생했습니다.


왕자만 25명에 달하고,

그들 각자의 외가가 모두

지방에서 한다 하는 세력들이다 보니

왕위를 쟁탈하기 위한 다툼

어느 시대보다 치열했던 것이죠.


한동안 형제 간에 피바람이

끊이지 않았으니,

왕건의 '혼인 동맹'을

완벽한 성공이라 보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2. '삼천 궁녀' 전설의 의자왕

의자왕

'의자왕의 삼천 궁녀'

노래 가사로도 있을 정도니

다들 알고 계시죠?


말이야 쉽지만...

3천 명이면 정말 어마어마한 수인데요,

정말 백제의 의자왕은

3천 명의 궁녀를 거느렸을까요?

바람둥이를 흔히 '의자왕'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source : 유토이미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3천 명은 아닙니다.


기록을 분석해 볼 때,

의자왕의 재위기간에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에는

약 5만 명 정도의 인구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그 정도 규모의 도시에서

3천 명 이상의 궁녀를 차출한다는 건

인구학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인구 규모가 백제의 수십 배인 조선

궁녀 수를 5-600명 선으로 유지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의자왕이 3천 명의 궁녀를 거느렸다는 건

과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3천 명이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과장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많은 없는데요,


이 표현에는 왕의 사치를 원망하는

백성과 신하들의 마음

투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재위 초기의 의자왕은

성군으로 칭송받던 임금이었습니다.


적극적인 외교와 정벌로

영토를 넓히고 부를 확보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욕과 사치에 빠져들며

국정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국내 정치를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왕자 41명에게 모두

'좌평'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고,

이는 관료들 사이에서

큰 혼란과 분노를 야기했습니다.


귀족들은 왕에게 조력하기를 거부했고,

군사적 지원도 끊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부의 침입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죠.

'삼천 궁녀'라는 말은

결국 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의자왕의 불통과 독선,

향락과 사치를 통틀어 일컫는

상징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흥청망청 폭군, 연산군

조선 최악의 폭군 중 한 명인 연산군.


위의 두 임금과 달리

그의 변태적인 여성편력

비교적 상세하고 객관적으로

기록되어 남아 있습니다.


그는 그와 함께 국정을 어지럽힌

후궁 장녹수를 비롯해,

신분과 결혼 유무를 막론하고

눈에 띄는 여성은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인 성종의 후궁

친척, 신하의 아내도 있었습니다.


이 같은 그의 패륜은

추후 중종반정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지요.

이로도 탐욕을 채우지 못한 그는

전국에서 용모와 재주가 뛰어난

젊은 여성들을 데려와

춤과 노래를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연산군은 그들에게

'흥청'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요,

이 흥청들은 각자 집과 노비를 받고

세금도 모두 면제받았습니다.


한참 때는 이들이 2천여 명

다다를 정도였다니,

연산군의 사치에 들어간 돈이

얼마나 엄청난지 짐작이 되시나요?


어쨌든, 연산군은 이 흥청들과

매일같이 호화로운 연회를 벌이며

방탕한 나날을 보냈는데요,


이 모습을 보고 혀를 차던 사람들에게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처음 탄생했다고 합니다. 




바람둥이 왕들의 경악스러운 행적,

어떻게 보셨나요?


아마 지금이었다면

다들 이미 법의 심판

받았을 것 같습니다(...)

 

하긴,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도

끝은 모두 좋지 않았군요.



그게 말야

오늘 준비한 역사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모아서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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