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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300만 명이 아사한 최악의 기근

생존자들은 그곳이 지옥이었다고 말한다.
팟빵 작성일자2018.04.20. | 32,987  view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조각상 <기근>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인해

특정 지역의 식량이 부족해져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대기근’

이 단어를 생각하면

우리는 흔히 분쟁 지역이나

극빈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바로 이웃나라인 중국에서

인류 최악의 대기근 중 하나가

발생했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허난 대기근을 다룬 영화 '1942' 스틸컷

바로 1942년 발생한

‘허난 대기근’입니다.


남겨진 자료가 많지 않아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조차

생소한 사건일 텐데요,


피해 규모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엄청납니다.


단 1년 동안,

허난성에서만

무려 300만 명이 아사했거든요.


300만 명.

우리나라 인천광역시의

전체 인구와 맞먹는 수준입니다.

산업기술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중세 이전도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40년대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굶주리며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건의 발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중일전쟁 당시 행진 중인 일본군

당시 허난성에서는

일본군장제스의 국민당군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전투중이라고는 하지만,

기세등등한 일본군의 무력에

국민당군이 속절없이 밀리는 형국이었죠.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장제스는 황하 제방을 무너뜨려

일본군이 있던 지역을 침수시켰습니다.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죠.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터진 제방을 보수할 겨를도 없이

홍수가 몰아치면서

엄청난 양의 강물이

허난성의 평야지대

넘쳐흐르기 시작한 것이죠.


이 유례없이 거대한 홍수에

죄 없는 민간인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재민은 수십만 명에 달했습니다.


황하 제방 파괴로 인한 홍수.
수십만 명이 목숨과 집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전쟁에 열중해 있던 장제스는

피해복구를 해 주기는커녕

해당 지역의 세금과 병역 의무조차

감면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피해가 겹치면서

허난성의 경작지는

기존의 절반 이하로 줄었고,


그 상태에서 1942년부터

극심한 가뭄이 시작됐습니다.


허난성의 식량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고,


죽 한 그릇도 먹지 못한 주민들은

농사를 접고  먹을 것을 찾아

산과 들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
나무 껍질을 벗겨 먹는 허난성 주민들

산나물과 온갖 들풀을 뜯어먹다가,

그것이 떨어지자

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고,

그것마저 떨어지자

기러기 똥을 먹었습니다.


풀을 캐고 있는 아이

체력과 면역력이 약한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가장 먼저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기근을 견뎌낸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길가에서 굶어 죽은 시신

쉽게 볼 수 있었고,


피골이 상접한 생존자들은

그것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반쯤 넋이 나간 것처럼

거리를 헤맸다고 하네요.


피골이 상접한 채
식량을 구걸하는 노파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주민들은 점점 이성을 잃어갔습니다.


인육을 먹었다거나 먹는 사람을 보았다는

충격적인 증언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즈음입니다.


당시의 증언 기록을 살펴보면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끔찍한 사례들이 수도 없이 있습니다.


“정신 없이 만두를 먹는데

고기 소에서 사람의 손톱이 나왔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먹는 만두

인육으로 만들어진 거라는 걸 알았다.


그 가게 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그 사람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살던 동네의 어떤 가족은

먹을 것이 다 떨어지자

남아 있는 가산을 모두 팔아서

마지막 한 끼를 배부르게 먹고는

모두 같이 자살했다.”


식량 조금을 사기 위해

부모가 자식을 팔거나

남편이 아내를 팔고,

형과 오빠가 동생을

파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성을 탈출하려는 사람들

당시 허난성은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기운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다른 지역으로 탈출했지만,


그럴 여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집에 남아

저 끔찍한 상황들을 지켜보며

죽음을 기다려야 했지요.


그렇게 1년 사이

300만 명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기근의 실태파악하고서도 

제대로 된 구휼 사업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연설 중인 장제스

오히려 이 사실이 다른 지역으로

새어나갈까 쉬쉬했을 뿐이죠.


가끔 내려오는 구휼 식량

이런저런 군벌들이 빼돌리기 일쑤였고,

허난성 대기근에 대한 보도는

중앙정부에 의해

원천적으로 통제되었습니다.

그 탓에 당시 중국 국민들은

자국에서 그런 끔찍한 재난이

진행 중이었다는 걸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대형 재난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죠.

이들의 모습을 기록한 건
소수의 외신기자뿐이었습니다.

source : 영화 <1942> 스틸컷

허난성 주민들 사이에서,

국민당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

하늘을 찌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을 죽도록 내버려두는

정부의 행태절망한 주민들은

식량을 풀며 협력을 요구하는 일본군에게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대기근이 끝난 뒤까지도

그 분노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국공내전이 발생하자

허난성 주민들의 대부분

마오쩌둥의 공산당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연설하는 마오쩌둥

대기근이 끝난 뒤 70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재난 이후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하나로 전락한 허난성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상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에 협력한

‘매국세력’이라는 오명이 따라붙은 데다


1990년대 빈곤한 농민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매혈(피를 파는 것)을 하다

집단으로 에이즈에 감염되는

사건까지 생기면서


허난성 출신자는 중국 내에서

심각한 지역차별을 받고 있는데요,


에이즈로 부모를 모두 잃은 허난성 아이

때문에 허난성의 젊은이들 중에는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 출신지를 숨기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도

여전히 공백의 역사로 남아 있는

‘허난성 대기근’


다행히 최근에는 중국 내에서도

이를 기록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고 있습니다.

2012년 중국에서 제작된 영화 <1942>
허난성 대기근을 사실적으로 다뤘습니다.

허난성 대기근을 다룬 영화와 소설,

다큐 등 여러 가지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 잊혀진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관련 작품들을 찾아 더 자세한 이야기를

알아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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