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서울생활을 정리하며 느낀 것.txt

조회수 2020. 9. 25. 15: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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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나의 리틀포레스트

나는 20살이 되자마자 캐리어를 하나 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젊었을 때 더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살에 바로 일을 시작했고, 지금은 7년 차 프리랜서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온 지 2달이 다 되어간다.


치열했던 나의 서울살이

7년 동안 나는 정말 쉬지 않고 달려왔다. 안정적이고 완벽한 생활보다는 자유롭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어서 프리랜서로 활동을 하기로 했고, 여행을 너무 좋아해 꼭 일 년에 한 달 정도는 원하는 도시에 가서 살아보았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내 스스로가 여전히 너무 용기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코로나가 시작되며 안정적이던 사람들조차 불안정한 세상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프리랜서인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세상이 멈추게 되자 나도 함께 멈추게 되었다. 코로나를 계기로 서울을 떠나게 되었지만, 어쩌면 그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치열했던 나의 서울살이에 번아웃이 왔고, 멈추지 못했던 당연했던 일상을 코로나로 인해 멈추게 된 건 아닌가 싶다.

이런 취급까지 당해야 하나

누구나 겪는 일일 수도 있고, 나만 힘들었다는 건 아니지만 홀로 하는 서울살이는 꽤 외롭고 지쳤다.


나는 20살 때부터 독립을 했다. 몸만 독립한 게 아니고 모든 생활, 금전적인 부분을 다 스스로 책임졌다. 월세부터 핸드폰 요금, 교통비, 보험금, 식비, 생활비까지 숨만 쉬어도 한 달에 돈 100은 그냥 나갔다. 그 돈을 또 아끼고 아껴 적금도 들고, 여행도 갔다. 그게 당연한 걸 수도 있겠지만 또래 친구들은 부모님이 내주시는 월세로 살아가고, 비싼 옷을 사 입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무심하거나 돈을 못 버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나를 독립심이 강하게 키우신 건 맞다.


그러다 보니 일을 하며 알바를 병행하는 건 기본이었다. 어떤 때는 쓰리잡까지 하기도 했다. 프리랜서 특성상 일이 많을 때는 주말이나 밤낮없이 바쁘다가, 없을 때는 백수가 되기도 한다. 수익이 일정하지 않으니 남는 시간에 알바를 했던 것이다. 다행히 함께 일하는 언니는 가족만큼 나를 아껴주었지만, 알바를 했던 곳들은 달랐다. 내가 하지도 않은 실수 때문에 욕먹는 일은 허다했고, 월급을 떼이거나 달라고 말했다가 협박을 당하고, 신고까지 해서 구차하게 돈을 받을 때도 있었다. 

월세살이도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서울에서 괜찮고 저렴한 집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고, 마음에 드는 집을 구했다 싶으면 집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문이 부서질 듯 두드리며 화를 내거나, 이사 가기 전 다른 사람에게 집을 보여 준다며 허락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집주인도 있었다. 시골로 내려오기 전, 이사 갈 집을 구하다가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집을 구하는 걸 포기했다.

서울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

서울살이가 힘들었지만 쉽게 떠날 수는 없었다. 서울을 떠나면 왠지 뒤처질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지만, 더 컸던 건 나를 버티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나를 아껴주고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만으로도 나의 서울살이는 충분했다. 함께 7년간 일해온 가족 같은 언니, 오랫동안 나와 함께해준 친구들, 같이 일했던 동료들과 알바하며 친해진 단골손님들까지. 서울에 살며 만났던 몇몇 사람들은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내가 서울을 떠나기 전날 날 위해 송별회까지 해주었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참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친구를 만나면 아끼던 엽서에 편지를 써주고, 누군가의 고민에 진심을 다해 위로를 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차갑고 냉정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마음엔 여유가 없고 외롭고 작은 일에도 예민해지고 화가 났다.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게 되었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상처를 주는 편을 택했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가 먹고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몇몇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나도 그들처럼 더 여유 있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단단하지만 유연한 사람 말이다. 물론 서울에서도 충분히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지만, 나는 의지가 부족했기에 환경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낭만적인 나의 리틀포레스트

다행히 내가 하는 일은 꼭 서울이 아니어도 가능했기에 떠나는 건 수월했다. 뭐가 그렇게 내 발목을 잡았는지, 이삿짐만 옮기니 서울은 낯선 도시로 변해있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의 시골살이는 만족스러운가? 난 요즘 너무 행복하다.


온 가족이 15년 만에 완전체로 함께 살게 되었고, 부모님의 품이 이렇게 안정적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우리 가족은 야구를 좋아해서 어릴 적 항상 집에는 야구 소리가 들렸다. 서울에 살며 외로움이 짙어진 어느 날부터는 혼자 집에 있을 때 항상 야구를 틀어두기도 했다. 그 소리가 들리면 왠지 마음이 편안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가족들이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푸르른 자연이 늘 함께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아름답다. 서울에서부터 자전거 타는 걸 좋아했지만, 항상 차가 많은 도로에서 미세먼지를 맡으며 높은 건물들 사이를 아슬아슬 피해 다녔다. 여기는 산과 나무가 가득하고 풀냄새가 참 향기롭다. 얼마 전에는 마을회관에서 꽃을 나눠줘서 마당에 꽃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밭에서 캐온 고구마를 삶아먹기도 한다. 내 방 창밖으로는 대나무 담장이 보이고, 아침에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그 무엇보다 내 마음이 참 여유롭고 편안하다. 이것이 나의 낭만적인 리틀포레스트다.


글을 마치려다 보니 정말 코로나는 핑계이구나 싶다. 그전에는 서울을 떠날 생각도 못 했고, 내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강제로 멈추는 시간을 갖게 되다 보니, 현재 내 상태가 어떤지를 점검하게 되었다. 물론 코로나는 우리에게 너무 큰 아픔을 안겨주고 있다. 직장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 의사 간호사분들의 희생은 너무나도 위대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두 손 높고 무기력하게 우울해지기만 한다면, 언젠가 코로나가 끝났을 때 다시 일어날 힘은 사라질 것이다.


정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오던 스스로를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내가 귀 기울이지 못했던 나의 마음을 점검해보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오고 있는 것들을 멈출 수 있는 용기를 내어보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어떤 풍경을 눈으로 담고,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이다. 더 멀리 뻗어갈 미래를 위해, 잠시 움츠러들어도 괜찮은 시기이니깐 말이다.

글쓴이 ㅣ황고운(susan1230h@naver.com)  

블로그 ㅣhttps://blog.naver.com/hgwoon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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