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옆에만 있어주면 되니까

조회수 2019. 4. 2. 2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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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랑 노 견 생 활 기

괜찮아, 옆에만 있어주면 되니까 

화장실만큼은 척척박사였지만


이뿌니는 여러 면에서 호락호락하지 않은 난이도 높은 개지만 17년간 배변 생활 하나는 흠 잡을 데 없었다. 어린 시절 뻔뻔 하게도 식탁 다리에 소변을 찍- 하고 갈기길래 중성화 수술을 시킨 이래론 두 번 다시 실수가 없었다. 괄약근은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은 자기가 싼 응가를 먹기도 하고, 집에 카펫이나 러그를 깔아두는 건 상상도 못한다고 하는데 우리 이뿌니는 그런 부분에선 실망 한번 시킨 적이 없다.


개를 키울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채 얼떨결에 이뿌니와 가족이 되었다. 그런 내가 얼마나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켰겠는가.


하지만 이뿌니는 알아서 화장실과 생활공간을 철저히 분리하며 깔끔한 위생관념을 지닌 개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가끔 길가에서 아무거나 주워 먹는 개 치고는 배변 활동에 관해 서는 제법 청결한 척 하는 의외의 모습이 기특하기도 했다.


이뿌니의 이런 면은 일종의 거래 같기도 하다. 배변 활동을 완벽하게 하는 대신 집에서 목욕은 하지 않겠다는 발칙한 선언을 했다. 자기가 부잣집에 들어왔다 착각이라도 하는 건 아닐 까. 남들은 집에서 맘 편히 공짜 목욕을 하는구먼. 굳이 돈을 내고 남의 손에 맡겨놔야 목욕 이라는 것을 하겠단다. 결혼 초에 목욕비 좀 아껴보겠다고 호기롭게 욕실에 같이 들어갔다가 성질을 부리며 나온 남편도 군말 없이 목욕은 전문가에게 맡기자 했다. 내 손에 말랑하게 제 몸을 맡기고 목욕을 허락하는 대신 쉬와 응가를 아무데나 질펀하게 싸지르는 쪽이 더 곤란 하겠다 싶어 차라리 다행이다 했는데, 그렇게 깔끔 떨던 이뿌 니의 괄약근이 얼마 전부터 고장나버렸다.​ 

침대마저 점령해버리다


처음은 거실에서 시작됐다. 거실 쪽 베란다가 이뿌니의 화장 실인데, 베란다에서 채 끊고 나오지 못한 것이 실수로 거실에 떨어졌나 싶었다. 이윽고 전혀 동선을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똥 덩어리들이 발견되더니, 최종적으로는 침실까지 영역이 넓어졌다. 초반에는 침대 끝자리에만 슬쩍 걸쳐놓더니 점점 더과감하게 한가운데로 나아가며 침대는 완전히 점령당했다. 아침에 눈을 떠 밤새 물컹한 똥 덩어리와 함께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통탄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눈치도 못 채고잘 수가 있었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얼마 전에는 남편이 변을 당했다. 자고 일어난 남편의 베개에는 앙증맞은 똥 덩어리들이 놓여 있었다. 고스란히 머리카락에 짓눌려진 변은 베개에 흔적을 남겼다. 이 정도의 체험은 똥테러의 끝판왕이 아닌가.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가신 것도 아니고 자는 동안 머리맡에 살포시 놓인 똥이라니.


​차 안에서도 그런 일들은 종종 발생했다. 한번은 정차 중에 운전석으로 건너와 대여섯 개의 똥 덩어리들을 선물로 남겨주고 가기도 했고, 가만히 누워 있다가 애견 카시트에 뿌지직 하고 내빼는 일도 있었다. 배변 산책을 유도한 뒤에 차에 태워도 보란 듯이 좌석에 실수를 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계단을 안고 오르는 중에 층층마다 똑똑 떨어뜨리는 일은 베개에 싸는 것에 비하면 애교나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제어가 안 되는 수준, 이제는 어떤 장소에서도 방심할 수가 없다. 그 잘난 괄약근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괜찮아, 옆에만 있어주면 되니까


이런 지경이지만 아직까지 소변은 단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될 곳에 흘린 적이 없다. 태도나 표정으로 볼 때 이러한 항문 테러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동물 병원에서 처방받은 면역억제제 부작용은 약한 방광염 정도일 것이라고 했으니, 소변 쪽은 아직까지는 잘 견뎌주거나,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이뿌니의 항문은 노력만으로 잠글 수 없게 된 것일까.


이것도 노화의 한 과정이려나. 옛말에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산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조상님들 참 지혜롭기도 하시지, 옛말 틀린 거 없다는 것을 우리 이뿌니가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고 있다. 그래, 의지로도 참아지지 않는 건데 어쩌겠는가. 지금으 로서는 그저 오래만 살면 그만이다.


개와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처음에는 시간이 더디게 흘렀던 것도 같은데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이뿌니의 시간은 이제 가속이 붙은 자동차처럼 빠르게 질주하고 있다. 어쩌면 이미 더 갈 곳 없는 마지막 정류장에 도착해서 필 사적인 의지로 버텨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더는 무너지지 않겠다고 온몸에 힘을 주느라 차마 엉덩이까지 그 힘이 닿지 못하는 거라면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똥 테러쯤은 오늘의 일과려니 호들갑 떨지 않고 치워낼 수 있다. 지난 17년간 완벽하게 때와 장소를 가려준 근면 성실한 괄약근이니 이제는 그만 은퇴시켜도 되겠지. 수고하셨습니다. 이뿌니의 항문 괄약근.​


개와 함께 산다는 것


‘개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절반쯤은 똥과 함께 살아가는 거니 까요.’ 올드독의 노견일기에서 본 한 구절이다. 개를 키운 이래로 요즘처럼 개똥과 가까운 사이가 되어본 적이 없다. 시시 각각 확인하고 접촉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다지 친밀해지고 싶지 않지만 멀리할 수도 없는 존재. 이뿌니가 생산 해내고 내가 수습해야 하는 우리 사이의 필수 매개체이다. 개와 살며 비위도 참 강해졌다. 이제 똥으로부터 안전한 구역은 없다. 어디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싸주렴. 기쁜 마음으로 치워주마.​


CREDIT​​

​글·사진 한진 

에디터 윤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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