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마음

조회수 2019. 3. 28. 2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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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개 네 트 워 크

보이지 않는 마음


명절.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갔다. 꽃개와 단둘이 남겨진 집은 동굴처럼 아늑하다.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청소도 마쳤고, 딱히 할 일도 없다.

꽃개와 나, 둘만의 명절


소파에 누워 TV를 본다. 가장 게으른 자세로. 무덤처럼 완만하게 솟은 아랫배에 한 팔을 걸쳐놓고 리모컨을 누른다. 안 봐도 그만인 영상이 망막에 맺혔다 사라진다. 바둑TV. 내가 좋아하는 김지석이 세계 랭킹 1위인 커제와 만났 다. 농심 신라면배 결승. 몇 달 전 시합을 재방송하는 걸로 보아 김지석 선수가 이긴 것 같다. 아내는 정지 화면을 왜 보는지 모르 겠다고 투덜거렸다. 수읽기는 보이지 않으니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역전극이었다.


오후 3시. 꽃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소형견을 데리고 나온 중년 남자들이 눈에 띈다. 목줄을 쥔 채 담배를 피우고 스마트폰을 하는 모습이 바다를 표류하는 뗏목 같다.꽃개는 나를 계단으로 이끌었다. 그대로 내려가면 지하주차장이 나온다. 차를 타고 가자는 뜻이다. 엄마와 형이 있는 데로.

적막 속의 기다림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개 껌을 준다. 녀석은 살만 발라먹더니 현관 신발 벗는 곳으로 가 배를 깔고 엎드린다. 익숙한 포즈였다. 보통 가족 중 한 사람과 남게 되면 꽃개는 조용해진다.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지치면 잠든다. 나 역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리 와서 아빠랑 같이 자자고 스킨십을 유도하지도 않는다. 녀석과 나는 간격을 유지한 채, 그 틈으로 시간을 흘려보낸다.


쌀을 씻어 압력밥솥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른다. IPTV 영화 목록에 가서 새로 업데이트 된 작품 중 볼만한 게 있는지 찾는다. 아들은 친구들과 같이 극장에 갈 정도로 컸다. 아내와 나는 더 이상 데이트를 목적으로 극장에 가지 않는다. 창밖으로 어둠이 스며든다. 증기가 배출됩니다. 안전에 주의하세 요. 취이익, 터져 나오는 소리도 꽃개를 건드리지 못한다. 어둠에 잠긴 현관 바닥에 아까 봤던 모습 그대로 누워있다.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찌개를 뚝배기에 1인분만 퍼서 보글보글 끓인다. 혼밥, 고상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집중도는 높은 편이다.


일체의 노이즈 없이 거울처럼 맑은 상태로 김치찌개와 흰쌀밥의 농밀한 조합을 즐긴다. 열기가 올라와 콧등에 땀이 맺힌다.

개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꽃개가 사료를 으드득 부수어 먹는 소리조차 우울하게 들린다.개는 하루의 단위가 7시간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평균 수명이 15년인 점을 감안하면 개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보다 서너 배 빠르다고 보는 건 그렇게 이상한 시각이 아닐 것이다. 녀석의 관점에서는 가족과 떨어진 채로 하루를 넘긴 것이다.


오후 7시. 산책을 나간다. 12층에서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탄다. 엄마 품에 안겨 배웅을 나온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다. 할머니 가지 말라고. 예전에 그런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 아누타, 접근성이 워낙 떨어져 원주민들이 공동체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곳이다. 촬영을 마친 제작진이 돌아가는 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울기 시작했다. 살짝 눈물을 비치는 정도가 아니라 가족을 잃은 것처럼 폭풍 오열해 제작진도 당황했다. 조그만 섬에서 평생을 살아 가는 저들 입장에서는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 죽은 사람과 다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와도 같은 배웅이다.


정적에 잠긴 아파트 주변을 돈다. 어둠 너머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녀석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나는 TV를 보고 녀석은 기다린다. 속절없이, 그리운 냄새가 다가올 기적의 순간을. 나는 녀석에게 틀렸다고, 그들이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갈 거라고 말하지 못한다.

 

CREDIT

글 사진 BACON  

에디터 윤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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