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신구와 이상윤이 만난 이유는?

조회수 2020. 7. 31. 10:2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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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라스트 세션> 을 위해 배우 신구와 이상윤이 만났다.

신구의 레드 더블브레스트 재킷, 오픈칼라 셔츠 모두 Lardini by Shinsegae International. 브라운 시어서커 팬츠 Man on the Boon. 이상윤의 플라워 프린트 셔츠, 블랙 팬츠 모두 Prada.

# 무대 위와 아래, 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대결

연극 <라스트 세션>은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아맨드 니콜라이의 저서 (2002)이 원작이다. 20세기의 위대한 과학자라 불리는 프로이트와 20세기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영문학자였던 클라이브 루이스가 남긴 저술 활동과 자료를 토대로 신과 사랑, 성(性)과 인생에 대해 논한다. 당대 대표적 유신론자였던 루이스와 무신론자였던 프로이트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서로의 이론과 생각에 대해 학자로서 어떤 비판을 하고 무엇을 공감했는지, 저자는 정신과학자 입장에서 낱낱이 분석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대상과 철학, 심리 등 인문학 전반에 걸친 이해가 필요하기에 독자는 따라가기조차 쉽지 않은 지적 유희에 가깝다. 이를 두고 미국의 극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이 만약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나 토론을 벌인다면 어떤 모습일지 가정하고 2인극 으로 원작을 각색했다. 영국이 독일과 전면전을 선포해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 3일, 프로이트의 서재를 배경으로 두 사람은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이 작품은 2010년 뉴욕 초연 이후 영국, 스페인 등에서 크게 호평받았다. 한국판은 이야기의 본질에 집중한 깊은 해석으로 정평 난 오경택이 연출을 맡았다. 프로이트 역은 신구와 남명렬이, 루이스 역은 이석준과 이상윤이 맡아 열연을 펼친다. 모자랄 것 없는 조합. 공교롭게도 배우들은 각각의 인물처럼 실제 삶에서도 신에 대한 믿음이 다르다. 신구와 남명렬은 종교가 없는 반면, 이석준과 이상윤은 독실한 크리스천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공평한 죽음에 대한 생각과 신이나 운명이 안기는 고통으로 깨닫는 나라는 존재. 매일 자문하면서도 정답이 없는 이야기를, 이 노련한 배우들이 어떻게 해석해줄지는 막이 내린 이후 각자의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운 좋게도 조용히 숨어 볼 수 있던 연습실의 에너지는 이어질 두 배우의 대화가 겸양으로 느껴질 만큼 뜨거웠다.

아이보리 리넨 재킷 Man on the Boon, 아이보리 시어서커 셔츠 Boglioli by Boon the shop Classic, 스트라이프 패턴 타이 Kenji Kaga by Boon the shop Classic

# 여든다섯 살 신구는 여든세 살의 프로이트를 떠올린다

무대 밖의 신구는 말수가 적다. 발걸음은 말투처럼 느긋하지만 가볍다. 가까이에서 보면 여든다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움직임이 부드러워 오랜 시간 몸속 깊은 곳까지 연기를 연마해온 사람이라는 걸 금세 느낄 수 있다. 유유히 흐르는 개울물처럼, 스며드는 지하수처럼 자신이 서 있는 공간에 젖어드는 사람. 잔잔한 물줄기가 결국 바위를 뚫듯, 그의 지난 시간은 저돌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연기를 향한 외길이었다.

“연기가 한 번도 지겨운 적이 없었어요. 재미있지 않으면 어떻게 평생 할 수 있겠어요. 내가 하고 싶고, 다른 일보다 의미 있다고 생각하니 하루 종일 연습실에 매여 있는 거죠.”

신구는 1962년 연극 <소>로 데뷔했다. 신순기라는 본명 대신 남산 드라마센터 연극 아카데미 1기생 시절 극작가 유치진이 지어준 예명 신구로 활동했다. 60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딱 한 해 일이 들어오지 않은 때가 있었는데, 아내가 말해줘서 알았다고 할 만큼 바쁘게 살아온 그다. 지금 40대 이하 세대는 그를 한 햄버거 광고에서 “니들이 게 맛을 알어?”라는 유행어를 남긴 사람이나 시트콤에서의 고집불통 할아버지, tvN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의 귀여운 둘째 형으로만 알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그렇게 힘을 쏙 뺄 수 있을 만큼 그도 젊은 시절엔 날이 서 있었다. 1936년생인 그는 당시 가난해도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 덕에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 두 번 떨어지고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에 갔으나 연극에 빠져 중퇴했다. 국립극단에서 활동하다 1972년 배우 박인환의 소개로 KBS 드라마 <허생전>에 출연한 뒤 ‘탤런트’가 됐다. “연극만 하다가는 여자(아내)를 놓치겠더라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워야지 싶어 드라마를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일이 연달아 물리고, 먹고사느라 연극을 못하게 됐어요. 지금은 쓰임새가 덜하다 보니 여유가 좀 생겨 이제 좋아하는 거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쓰임새가 준 것이 아니라 확장된 것임이 분명하다. 신구는 예능 외에도 요 몇 년 연극 <장수상회>, <앙리 할아버지와 나> 등 무대 위 주연으로 만날 수 있었다. 100% 라이브로 진행하는 연극은 체력과 정신력이 모두 필요한 일. 올여름에는 연극 <라스트 세션>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가면서 술도 잠시 끊었다. 평소 애주가로 유명한 터라 주변 제작진에게 대선배의 절주 소식은 단연코 화제. “술이야, 뭐 밥 먹듯이 한 건데.(웃음) 어지간히 살다 보니까. 그런 것들이 일에 영향을 많이 줘요. 뭔가 탓하고 싶진 않은데 지금 주말 빼고 낮 시간 내내 연습하거든요. 체력이 떨어져서 일에 지장받은 적은 없는데, 요즘은 몸의 변화를 느껴요. 팔십이 넘었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걸음걸이도 달라지고 행동도 느려지고, 이상해요. 헬스도 계속하고 있는데, 언제부터인지 에스컬레이터처럼 차츰 내려가는 것 같아.”

신구가 연극 <라스트 세션> 제작사로부터 83세의 프로이트 역을 제안받은 건 그 역시 83세였던 2년 전 일이다. 연기에 대한 경외심은 있어도 표현의 어려움이란 도통 없을 것 같은 그지만, 그땐 자신이 없었다. “거절을 했다가 다시 생각을 해봤지. 뭔가 내 나이에 마무리한다는 의미가 될 작품을 선택해야겠다 싶었어요. 역시 시작해보니 힘들고 어려워요. 프로이트는 누구나 아는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그의 이론을 공부해본 적은 없죠. 단어의 내용을 알아야 표현도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일상에서 쓰는 언어가 아니거든요. 전문 용어가 많아 낯설고 정신분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갈수록 어려워요. 극복해야죠.” 프로이트의 생전 사진과 꼭 닮은 배우는 손사래를 쳤다. “상윤에게 더 물어봐요. 난 아직 프로이트 공부를 다 못했어요.(웃음)”

스트라이프 슈트 SuitSupply, 플라워 패턴 셔츠 S.T. Dupont Classics.

# 마흔 살 이상윤은 마흔 살의 루이스처럼 살고 있다

“루이스가 영화 <나니아 연대기> 원작자라는 말을 듣고 놀랐어요. 오히려 그 사실이 프로이트와 대화 중 놀림의 단서가 될 만큼 학자로서 루이스는 분위기가 다르거든요. 신을 부정한 청년기에서 다시 돌아서는 계기나 성장 배경까지. 대사량도 엄청나지만 알아야 할 게 정말 많아요. 저는 연극이 처음이라 비교할 기준이 없죠. 매일 모든 것이 새로워요. 이것만 ‘올인’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들어왔는데,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브라운관 속 이상윤은 어딘가 모르게 수줍고 말이 없지만, 배역을 맡은 배우로서는 거침이 없다. 극 중 루이스의 나이와 같은 마흔 살. <라스트 세션>의 루이스 역에 집중하기 위해 SBS <집사부일체>에서도 하차했고, 촬영 스케줄도 모두 없앴다. 그래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운동화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대학로 연습실에서 선배 이석준과 역할 분석에 골몰한다. 익숙함과 능란함 사이를 지나고 있을 15년 남짓한 경력. 첫 연극부터 대선배들과 논쟁을 벌이며 퇴장 한번 하기 어려운 2인극을 고른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지금은 루이스를 믿어요. 젊은 학자인 루이스는 프로이트의 반문에 전혀 뒤지지 않아요. 현실의 이상윤은 감히 그럴 수 없지만요.(웃음) 그래야 기죽지 않죠. 연기에 좀 더 욕심을 냈달까요. 제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계속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어릴 때는 멋모르고 열심히만 했다면 지금은 뭔가 책임감 있게 즐기면서 하고 싶어요. 그동안 계기랄 게 없다가 신구 선생님의 합류 소식을 듣고 용기를 냈죠.”

<라스트 세션> 연습실에는 루이스의 지정석이 따로 있다. 이상윤은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이석준에게 실전을 배운다.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고, 그의 연습 장면을 보며 좋은 것은 슬쩍 베끼기도 한다. 신구는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존재다. “무대 위에서는 예의 차리지 말고 편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어떻게 보면 프로이트와 루이스도 세대를 뛰어넘어 대화하는 거잖아요. 서양 문화에서 동등하게 논쟁할 수 있는 관계니까, 서로 예의를 갖추되 개인 대 개인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걸 강조하세요.” 이상윤은 연극 외에도 새로운 연기 변신을 앞두고 있다. 그가 연극에 몰입하는 8월, 영화 <오케이 마담>이 개봉하는 것.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악역, 암살자 철승 역을 맡았다. 올해는 자신의 연기 인생에도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카메라 앞에만 서던 사람에게 날것 그대로 관객과 호흡을 주고받는 연극은 그런 힘이 있다. 배우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겸허하게 만든다. 옆에서 지켜보던 신구가 한마디 거들었다. “연기를 오래 해서 좋은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서 좋을 때도 있어요. 많이 한 사람은 때가 많이 낄 수밖에 없거든.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서 참신한 모습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연기에서는 모두 동등한 위치지. 위아래가 없어요. 이 사람은 얼마나 스마트해요. 나와 달리 드라마에서 주역을 맡는 사람인 데다 더 좋은 기회도 많을 텐데, 연극을 택한 걸 보고 사실 좀 놀랐어요. 잘한 것 같아요. 힘을 분산하지 않고 집중하면 이후에 더 많은 작품이 들어올 거예요. 우리는 1년만 사는 게 아니잖아요.”

며칠 후 연습실에서 본 두 사람의 모습은 구강암에 걸린 프로이트가 고통을 토로하는 대목에서도 지켜보는 이가 압도될 만큼 치열했다. 하지만 신구는 관객을 맞이하는 지금도 두렵다. 대본 리딩 초기 원문에 ‘desire’라는 단어 하나로도 갈망인지 열망인지 한참을 토론했는데, 과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한다. 다만 신구는 자기 역할을 책임지는 배우가 되길 바라는 바로 옆 젊은 동료에게 이런 부탁은 하고 싶다. “늘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요. 연습을 공연같이 하자. 공연 때 더 잘하려고 해봤자, 더 잘 나오지 않아요. 공연은 연습한 걸 보는 거죠. 책임감은 평생 가는 거예요. 자기 삶이든 작품이든 끝까지 책임지는 게 당연하죠. 저도 그랬어요. 직업인으로서, 프로로서 당연한 것 같아요. 그때마다 자신이 가진 걸 다 뽑아내야 해요.” 이 지적인 대화의 결과는 9월 15일까지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이어진다.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사진 김제원

취재 협조 파크컴퍼니

패션 스타일링 박정희

헤어 양인경(김활란 뮤제네프)

메이크업 서지윤(김활란 뮤제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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