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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여행하는 독일 뒤스부르크

조회수 2020. 4. 24. 15: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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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된 뒤스부르크로의 여행과 여행자의 마음에 남은 깊은 여운을 함께 나눈다.

그 여정의 시작은 뒤셀도르프 K20 미술관에서였다. 콘크리트 벽에 떨어지는 굵은 빛줄기 그리고 그 사이의 가느다란 사람의 흉상 하나를 찍은 고요한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의 제목은 ‘빌헬름 렘브루크 뮤지엄에서’였다. 주로 스펙터클한 현대사회의 요동치는 광경을 엄정한 사진으로 보여주는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사진이라고는 믿기 힘든 어딘가 명상적인 분위기였다. 빌헬름 렘브루크 뮤지엄은 그렇게 내 메모장 한 귀퉁이에 적혔고, 이듬해 여름 또 한번의 독일 여행의 내적 동기를 당겨주었다.

빌헬름 렘브루크는 1881년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태어난 독일 근대 조각사에서 빠질 수 없는 예술가이다. 청년 시절 고전주의에서 출발해 1910년부터 4년 간 파리에 머물며 조각가 마이욜과 로댕에게 매료된 그는 인체의 풍만한 완결성, 공간과 매스의 독특한 긴장을 표현한 독일 근대 조각의 예견된 예술가였다. 다만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조각’을 향한 그의 예술에의 순수한 몰입을 세상은 쉬이 허용하지 않았다.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베를린 프리데나우 야전병원 위생병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어 '야전군 전쟁화가'로 스트라스부르에 전출되었다. 전쟁의 참사가 일으키는 공포와 그 결과는 그의 예민한 영혼에 깊은 상흔을 남겼고, 결국 1919년 서른 여덟이라는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천재적 재능은 끝이 나기에 이른다. 1950년대 중반부터 독일 미술계는 빌헬름 렘브루크의 작품들이 뒤스부르크 그리고 독일의 역사와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이라 믿으며 그의 작품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결국 1964년 빌헬름 렘브루크 미술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우연히 마주친 사진 한 장으로 뒤스부르크까지 오면서, 이런 만남을 촉발한 100년 전에 죽은 예술가의 존재를 희미하게 떠올렸다. 중앙역에서 내려 미술관이 위치한 칸트 공원까지 가는 길은 7월의 녹음으로 가득했다. 작은 공업 도시가 가진 문화적 풍요가 바람결에서 느껴지는 듯 했다. 15분쯤 걸어가자 개방감이 느껴지는 새하얀 건물이 나타났다. 이 미술관의 설계는 흥미롭게도 빌헬름 렘브루크의 아들 만프레드 렘브루크가 맡았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고작 6년 정도였던 아들이 어느덧 견실한 건축가가 되어 그에게 헌정하는 미술관을 지었다니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어둠에 이끌리듯 건물 왼쪽의 렘브루크 윙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갔다. 전시장 내부의 벽체와 바닥은 어두운 색감의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이 되어 있고 천장의 원형 창 사이로 엄정한 직광이 반듯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콘크리트가 발색하는 어두운 회색의 배경 안에서 숨쉬고 있는 렘브루크의 조각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거센 숨을 쉬고 있었다. 여인의 토르소, 한 쪽 무릎을 굽히고 미묘한 율동감을 만들어내는 여자, 몇 개의 음울한 두상들을 명상적인 공간 안에서 고요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곁에 가로로 길게 누운 그의 대표작 <패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떠한 장식도 걸치고 있는 옷도 없이 알몸으로 스러진 채 죽어가는 남자, 오로지 그 처절한 몸짓으로만 자신의 꺾인 의지를 증명해 보이는 남자는 빌헬름 렘브루크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유리로 안과 밖을 나눈 중정 밖으로는 한 발을 내딛은 채 높은 곳에 시야를 둔, 상승의지가 느껴지는 한 남자의 몸짓이 눈에 띈다. 1년 전, 뒤셀도르프에서 보았던 거스키의 사진 속 구도와 같은 자리를 서성이며 너울거리는 조각들의 흐름을 탐한다.

햇살이 추상의 실루엣을 던져내는 내내 예술가의 절규에 가담해보려 했지만 어떤 진실에도 닿을 수 없었다. 다만 젊은 예술가의 창조적 의지가 만들어낸 솔직한 조각들과 그 물성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담아낸 건축가의 공간이 만들어낸 그윽한 울림이 어떤 특별한 아름다움에 도달하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의 건축에 들어서면 아무도 큰 소리를 안 내게 돼. 마음이 포근해지는 촉감이라든가 부드럽게 들어오는 광선이라든가… 한참을 지나서야 겨우 알아챌 수 있는 장치들이 소곤소곤 말을 걸어오는 것 같거든.”

렘브루크 윙을 나와 오른쪽 건물로 이동하면 더 환하고 넓은 규모의 전시 공간을 마주한다. 1985년 증축된 이 신관에는 도널드 저드, 알렉산더 칼더, 야네스 쿠넬리스, 장 팅글리 같은 현대 조각의 혜성들이 각기 다른 조각적 변주를 만들어낸다.

마치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조각의 충실한 임무를 함께 연대한 것만 같은 리드미컬한 풍경. 그 숱한 이름들이 만들어낸 다채로운 조각과의 만남은 렘브루크 미술관에서 더욱 명징하고 깊은 여운을 만들어 준다. 이따금 먼 여정의 길에서 발현되는 예술적 경험만큼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도 없다.

Lehmbruck Museum

Düsseldorfer Str. 51, 47051 Duisburg, Germany

빌헬름 렘부르크 뮤지엄 ▶ lehmbruckmuseum.de

글, 사진 박선영

에디터 이태영(taeyi07@noblesse.com) 디자인 오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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