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신애가 반한 마데이라 와인

조회수 2020. 3. 20. 10: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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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묵은 매실청처럼 오묘한 맛, 요리연구가 홍신애가 소개하는 마데이라 와인의 특별함.
1 마데이라는 포르투갈에서 약 1200킬로, 모로코에서 약 500킬로 떨어져 있는 섬이다. 리스본에서 비행기를 타면 약 두 시간 정도 소요된다. ⓒgooglemap
2 이런 지형에 나무까지 빽빽해서 섬 이름이 ‘마데이라’ 즉, ‘숲’ 이다.

“이거 마셔봐, 신기해!”

동생이 술을 한 병 가지고 놀러 왔다. 자리 몽땅한 병 모양이나 흰색으로 각인된 글씨 모두 영락없는 포트와인, 즉 포르투갈 와인같이 생겼다. “에이~ 이거 포트와인 아니야. 마데이라야! 완전 달라!” 뭐가 다른지 설명도 못하는 동생. 버벅대며 병을 따고 작은 잔에 콸콸 급히 따른다. 색은 투명하고 맑은 갈색이다. 다르다던 그 와인은 새콤한 향과 함께 뭔가 익숙한 농익은 맛이 났다. 많이 마셔본 듯한 이 맛이 뭐였지? 할머니가 찬장에서 꺼내 주던 십 년 묵은 매실청인가?! 익숙한 듯 새로운 이 맛은 과연 무엇일까?


마데이라의 자연 경관은 이렇게 깎아 내린듯한 절벽과 가파른 산, 그리고 바다로 이루어져있다.

마데이라(Madeira) 는 ‘숲’이란 뜻의 작은 섬이다.

포르투갈에 속해있긴 해도 지리적으로는 아프리카에 더 가깝다. 리스본 공항에서 작은 비행기를 타고 두어 시간 더 가면 도착하는 작은 섬 마데이라. 면적은 제주도 삼분의 이 정도 크기이며 축구 영웅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곳. 실제로 이 섬에 유일하게 있는 공항도 그의 이름을 따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국제공항’ (Aeroporto Cristiano Ronaldo)으로 불리며 호날두의 박물관과 호텔 등도 이 섬에 있다. 전 세계에서 각양각색의 축구팬들이 모여들기도 하는 호날두 공화국 같은 지역이지만 사실 이 섬의 진짜 셀러브리티는 바로 마데이라 와인이다.

마데이라 국제공항의 모습. 축구영웅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출생지로 유명한 마데이라는 공항에도 그의 조각상과 전시물이 즐비하다.

마데이라섬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해상 무역 및 군사요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영국이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17세기, 프랑스 와인 대신 포르투갈의 와인에 좀 더 큰 관세혜택을 주는 ‘메수엔 조약’ (Treaty of Methuen)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은 프랑스 와인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영국이 포르투갈 와인에 대한 관세를 프랑스 와인의 삼분의 일로 줄여주고 대신 영국산 직물을 포르투갈에서 더 많이 판매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영국, 포르투갈 윈윈 정책이었다. 이 조약 덕분에 포트와인은 영국 시민들 사이에서 대유행하게 되었으며 물량 조달이 힘들어 가짜 포트와인이 판을 치기도 했다는 기록이 여럿 남아있다. 아마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포트와인의 명성은 이때 다 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3 미국 독립기념일 선언 회의를 그린 존 트럼불의 그림. ⓒwikipidia
4 마데이라 섬의 포도나무.
5 오래된 마데이라 와인의 레이블. 백 년 가까이 된 이 와인의 맛은 밸런스가 좋고 맛있는 발사믹 식초와 비슷했다.

이 포트와인의 인기는 영국 본토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 새로운 식민지로 여겨지던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이어졌다. 특히 독특한 풍미와 맛을 지닌 마데이라 와인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영국 본토에서는 본인들과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산의 와인을 마시는 것보다 포르투갈 와인을 마실 것을 적극 권장했으며 덕분에 포트와 마데이라 와인의 미국 수입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영국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설탕과 마데이라 와인에 대한 관세 부과 및 수입 물량 관리에 큰 혼선을 초래하게 되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먼저 건너간 영국의 이민자들은 당시 자유무역지대였던 마데이라를 닮은 독립국가를 꿈꾸게 된다. 이후 1769년, 마데이라 와인을 운반하던 배 ‘리버티호’를 강제로 영국 해군에 귀속시키고 억류 해 놓은 것에 반발한 미국 시민이 배에 불을 지르는 ‘리버티호 방화사건’ ‘보스턴 학살사건’으로 이어진 독립의 움직임은 결국 ‘보스턴 티 파티 사건’까지 전개되고 영국 본토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미국 독립의 불씨가 된다. 프랑스를 견제하던 영국의 초강수였던 포르투갈 마데이라 와인이 결국 미국이라는 독립국가를 만드는 원인제공을 한 셈이다. 이런 스토리 덕에 미국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축배를 들 때 사용된 와인이 바로 마데이라 와인이었으며 1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이후 대통령 취임식 때에는 모두 마데이라 와인이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6 우연히 만난 1976년이 각인 된 마데이라. 사진의 76년도 산 마데이라는 필자의 생일 빈티지이기에 비싸지만 구입했다.
7 20년 이상 된 콜레이타 (Colheita) 마데이라를 서비스 하는 직원분. 이제 스무살 조금 넘은 와인의 풍미가 아주 좋았다.

그렇다면 마데이라 와인은 뭐가 다를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데이라 와인은 포트와인이 아니다. 주정강화 와인이란 점을 제외하면 포트와인과 비슷하지도 않다. 사전에서 마데이라 와인을 찾아보면 ‘45도 이상의 온도에서 숙성한 와인’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이 포트와인과 구분되는 가장 큰 핵심 내용이긴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마데이라 와인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면 나무가 가득했던 섬을 경작지로 만들기 위해 불을 질렀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얼마나 나무가 울창했는지 이 불은 7년 동안 섬의 곳곳을 태우고도 꺼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불 덕분에 사탕수수 재배 이후 포도농사까지 이어질 수 있었고 마데이라 섬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재배법 및 포도 품종도 생겨나게 된다.

8 주스티노스 와이너리의 칸테이로. 천장을 유리로 만들고 햇빛을 최대한 이용하는 전통방식이 바로 칸테이로다. 이 때문에 마데이라 와이너리들은 모두 햇빛 찬란한 밝은 분위기이다.
9 주스티노스 와이너리의 와인 메이커 주앙. 주스티노스 와인은 마데이라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와이너리를 가진 회사다. 미리 예약하면 와이너리 및 포도밭 견학이 가능하고 귀하고 오래된 마데이라 와인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이 가능하다.

원래 마데이라 와인은 처음에 그냥 순수한 “화이트 와인”이었다. 상큼하고 맛 좋기로 유명했던 마데이라의 화이트 와인은 영국의 클레런스 공작이 (Duke of Clarence)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할 때 이 마데이라 와인 통 안에 수장되어 죽겠다고 스스로 제안할 정도로 귀족 사회에서 인기 있는 와인이었다. 이 인기 있는 화이트 와인은 영국 혹은 신대륙으로 가는 배에 실려 적도를 지나거나 더운 기후에 오랜 시간 노출이 되면서 자주 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95도 정도의 센 사탕수수 주정을 넣어 상하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을 썼는데, 이후 신대륙에 가져갔다가 팔지도 마시지도 못한 와인을 다시 마데이라로 들고 돌아온 한 상인에 의해 이 상상을 초월하는 맛이 발견된다. 강한 주정을 방패 삼아 햇빛과 고온을 아주 오랜 시간 버텨낸 산화된 와인. 혹은 어떤 이는 이것을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와인 (round-trip-wine) 이라고도 부르며 바르게 산화, 숙성된다는 뜻으로 ‘마데이라 화 된다’ (maderization, madeiraised)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말이 좋아 ‘산화’인 거지 어찌 보면 햇빛에 장시간 노출된 변질된 와인이라고 보는 편이 일반적이다. 그 어떤 것도 햇빛과 태양열 앞에서 영원한 건 없으므로. 하지만 한편으로 견고하게 잘 버텨낸 그 무엇을 다른 ‘맛’으로 본다면 이 마데이라 와인이야말로 태양과 시간이 만든 걸작품인 셈이다.


상대적으로 어두운 포르투 가이아 지역의 와인창고. 쾌걸 조로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포트와인의 이름은 샌드맨(Sandeman)으로 포르투에서 처음으로 포트와인을 병에 넣어 수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마데이라의 상인들은 일찍부터 산화에 눈을 떴다. 이 열에 의한 산화가 포르투갈 본토의 흔하디 흔한 포트와인과 확연히 구분이 되는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거다. 그래서 1700년대 초에 와인에 열을 가하는 우리네 온돌 같은 시스템의 와인 저장실을 개발했고 그 이름을 에스투파(Estufa) 라고 부른다. 와인통을 햇빛에 노출시켜 자연스럽게 산화될 수 있도록 하는 칸테이로(Canteiro) 방식은 일정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기 어렵고 무엇보다 많은 양을 생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전통적인 이 칸테이로 방식으로 생산되는 마데이라 와인은 최고급 대접을 받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으로 거래된다. 이렇게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열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보니 와이너리는 어디든 환하고 화창하다. 어두컴컴한 지하 저장고에서 고요하게 숙성해야 하는 포트와인과는 사뭇 대조되는 분위기이다.

또 다른 점은 마데이라에서만 나오는 토착 품종들이다. 단맛이 가장 적고 새콤한 산미가 충격적인 세르시알(Sercial), 뚜렷한 캐러멜향이 있으면서도 산미가 동시에 느껴지는 배르델료(Verdelho), 단맛과 신맛이 복합적으로 잘 어우러지고 무게감도 있으면서 왠지 여성스러운 보알(Boal), 단맛이 도드라지고 혀를 누르는 묵직함이 압권인 말바지아(Malvasia), 그리고 유일한 적포도 품종으로 틴타 네그라(Tinta Negra)가 사용된다. 어떤 품종을 사용하든 단일품종 85% 이상을 쓰면 병에 품종을 표기할 수 있고 나머지는 품종을 섞어서 쓰는 블렌디드 제품으로 판매가 된다. 대부분의 블렌디드 제품은 3-5 년 혹은 10년 미만으로 숙성한 것들이며 10년 이상 숙성을 하고 가격도 잘 받을 수 있는 상품은 단일품종으로 만든다. 20년 이상부터 100년까지 오래도록 숙성한 제품은 콜레이타(Colheita), 프라스케이라(Frasqueira)라는 이름으로 따로 구분하고 포트와인과의 차별을 기하기 위해 빈티지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다.

10 마데이라 섬에서만 먹을 수 있는 해산물 중 하나인 라바시(Lapas). 생긴것은 작은 전복같고 주황색 흰색의 살이 있는 것이 마치 전복과 홍합을 합쳐놓은 듯 한 맛이다.
11 마데이라 와인의 색. 투명하고 맑은 느낌의 주정강화 와인이다.

맨 처음 마데이라 와인을 마셨을 때의 그 익숙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새콤하고 농익은 그 맛은 마치 할머니 품속에서 나온 미지근한 매실청과 흡사했다. 마냥 달기만 한 것도 아닌, 오래도록 세월의 갖은 풍파를 다 견뎌낸 견고한 그 무엇. 할머니가 손주에게 바라는 건강과 행복, 그리고 본인이 누리지 못한 영생에 대한 막연한 희망까지 녹아들어 있는 맛. 그래서인지 기름진 고등어를 막걸리에 담갔다 껍질채 연탄불에 던져 구워내는 고갈비나 달큼하게 조근조근 양념해 볶아낸 소불고기, 푹푹 끓여낸 김치찌개 등 갖가지 복합적인 한식 요리에도 깔끔하게 찰떡궁합이다. 특히 새콤한 세르시알 품종의 마데이라와 상쾌한 향이 나는 좋은 고춧가루로 양념을 해 슬쩍 조린 갈치조림의 궁합은 표현할 언어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좋다. 뜨거워서 호호 불어 입 안에 넣으면 매콤함과 달큼함이 한 번에 밀려오는 간이 쏙 벤 무 한쪽, 빨간 양념이 한쪽에 살짝 붙어있는 포실포실 갈치의 하얀 속살, 그리고 입 안이 뜨거운 무, 기름진 생선, 매콤한 양념으로 뒤 섞여 있을 때 싸악 씻어주는 단비 같은 마데이라 와인 한 모금! 이것이 바로 태양열에도, 시간에도, 사람들의 온갖 욕심, 욕망 가운데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마데이라 와인만의 힘이다. 영원히 살 것 같은 맛. Madeira wine never dies!


글과 사진 홍신애 (요리연구가)

에디터 이다영(yida@noblesse.com)

디자인 장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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