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를 내 가치관을 대신 점검해주는 영화
[소중한 9000원]
눈 한번 딱 감고 빌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굳이 손해를 보고 마는 상황.
바짝 엎드려 일을 해결하긴 했는데
지나고보니 너무 숙인건가 후회되는 상황.
명분이냐, 실리냐.
나라씩이나 통치하고 있지 않더라도
누구나 꽤나 자주 맞닥뜨리는 문제다.
그리고 사회생활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명분을 따지는 게 그리 멋있지만도,
실리를 따지는 게 그리 효율적이지만도 않은
매우 복잡다단한 상황들을 겪게 된다.
쓰나미처럼 몰려드는 버전업 위기들에
갈대마냥 흔들리는 내 가치관은 대체 무엇인지
어디까지 타협해야 '내'가 '나'로 남을 것인지
제대로 숙고할 여유도 없이 결말은 성큼 다가온다.
그래서
미리 시뮬레이션을 해두는 것도 괜찮을 거다.
위기 앞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인가.
영화 '남한산성' 얘기다.
'남한산성' 간략 소개
감독 : 황동혁 (전작 : '도가니' '수상한 그녀'.. 믿을만하다)
주연 :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 등 (안믿을 수 없다)
장르 : 대사빨 끝내주는 사극 (이념 논쟁이 메인이다!)
원작 : 김훈
줄거리 :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청의 공격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해든 인조(박해일 분)가 청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최명길(이병헌 분)과 청에 맞서 대의를 지키자는 김상헌(김윤석 분)의 논리 사이에서 고민한다.
개봉 : 10월3일
예매 전 체크포인트
1. 연기들이 끝내줄 것 같아!
그렇다. 각자 원탑을 맡아도 기꺼이 티켓 값을 지불할 배우들이 단체로, 그것도 서로 완전히 차별화된 캐릭터를 선보이며 제대로 연기를 해준다.
섬세한 연기에 강한 이병헌과 굵직한 연기에 강한 김윤석은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한쪽 기울어짐이 없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붙는 장면은 예상보단 적은 편. 그래도 존재감 대결로 보자면 쉽게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박해일이 굉장히 잘해냈다고 보는데, 그는 이 두 신하 사이에서 마냥 휘둘리지도, 마냥 강하지도 않은 인조의 모습을 신선하게 그려냈다.
국사 시간에 막연히 상상해왔던 인조의 스테레오 타입을 많이 부셔낸 셈이다.
흔들리지만 흔들리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신을 바짝 차려보지만 너무나 큰 상황 앞에 유약하고 우유부단하기도 한 인조의 모습은 우리가 이입하고 들어갈 여지를 많이 만들어낸다.
또 상당히 전형적일 수 있었던 '똑똑한 천민' 역의 고수와 조우진도 특유의 시크함을 유지해내며 색다른 연기를 보여준다.
2. 쉽게 말해 '말싸움'이 메인인데, 재미는 있어?
액션 위주의 사극에 익숙한 우리에게 분명 신선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대 앞에서 윗 사람들이 어떻게 분열하고, 대립하고, 또 결론으로 나아가는지 보여주는 과정은 충분히 흥미를 유발한다.
또 그 과정에서 가장 고생을 하는 건 다름 아닌 국민들임을 강조하는 포인트도 놓치지 않는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터지는 사안 하나, 하나에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들고 추운 날씨와 식량난 등 어찌할 수 없는 고난까지 더해지는데 그때마다 등장인물들이 각자 가치관에 따라 내놓는 대사들이 얼마나 다른지, 또 나름 그 각각이 모두 얼마나 설득력을 갖고 있는지 감탄하기 충분하기도 하다.
다만 오로지 '영화적 재미'를 놓고만 본다면 "완전 오케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다.
대사들은 하나하나 다 주옥 같은데, 이것이 계속 반복되면서 정작 관객들이 집에 가서도 음미하게 될 '단 하나의 대사'가 없는 느낌이다.
극의 클라이막스를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건으로 뒀기 때문에, 절정에서 맛보게 될 극도의 카타르시스, 심리적인 폭발도 덜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엔딩의 임팩트도 약해진다. 관객들의 예상을 비켜가는 조금 다른 포인트를 심었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다.
3. 그래서 어떻게 봤어?
그럼에도 이 영화를 추천한다면, 그건 캐릭터와 연기의 훌륭합 조합 때문일 것이다.
'남한산성'은 캐릭터 구축에 굉장히 공을 들인 느낌이다. 앞서 말했던 인조는 물론이고, 다른 인물들 역시 전형적일 수 있는 함정을 매우 잘 피해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실리주의자는 곧 기회주의자일 것이다. 그런데 이병헌이 연기하는 최명길은 등장인물 중 가장 애국자로 보인다.
모두가 최명길의 '꿍꿍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이병헌은 눈빛 한번 흔들리지 않으면서 최명길 캐릭터를 매우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김윤석이 연기하는 김상헌도 비호감의 지점을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위기의 상황에서 대의만 내세우는 사람만큼 갑갑한 사람도 없는데, 그 특유의 갑갑함이 김윤석에게선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이 캐릭터가 '꼰대'로 전락하지 않게, 인간적인 매력을 몽땅 쏟아부어준 느낌이다.
'대중'의 입장에서 가장 눈이 가는 건 고수와 조우진일 것이다. 고수가 연기하는 날쇠는 헬조선 아래서 능력 한번 펴보지 못하고, 소위 '위에서 싼 똥을 치우기 급급한' 우리를 떠올리게 한다.
날쇠의 시점에서 이 영화를 다시 재구성한다면, 굉장히 매력적이면서 메시지도 훌륭한 액션 영화가 될 것 같기도 하다.
반면 조우진이 연기하는 명수는 홀로 탈조선에 성공한, 얄밉지만 사실은 동경하기도 하는 지점에 선 인물이다.
역사가 현대와 호흡을 같이 한다는 것, '남한산성'은 이를 제대로 증명해내고 있다.
사실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송영창이 연기하는 영의정 김류다.
영화를 볼 관객들을 위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누구나 한번쯤 상사로 꼭 만나게 되는 캐릭터, 정도로만 해두겠다.
주관주의 별점
작성자 특징 :
- 성격이 급해서 러닝타임 긴 영화는 인내하지 못함.
- 영화를 본 당일에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죽도록 고민할 일이 있었음.
-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건 말싸움이라고 생각함.
- 원작은 안읽은 상태.
- 남한산성, 하면 백숙부터 떠올렸음. (반성..)
연기 ★★★★★
흠 잡을 수가 없어.
각색 ★★★☆☆
클라이막스가 좀 힘이 빠졌어.
여운 ★★★☆☆
몇몇 대사는 좀 더 임팩트를 팍 넣어주지 그랬어. 너무 쓱 지나가.
재미 ★★☆☆☆
구성이 느슨하진 않은데, 많이 길어. 시계를 좀 많이 봤어.
총평 ★★★☆☆
영화를 통해 나의 가치관을 점검하는 건 매우 매력적인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