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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반품하고 싶어질 때

이창기 시인이 바라본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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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6월 지방선거 투표일이었다.
당시 사회부 기자로 일하던 때라 지시대로 자택 부근 투표소 현장 취재를 대강 마치고 나선, 한가롭게 여유를 즐겼다. 느지막이 투표를 하러 가서야 내가 주민등록증을 분실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망연자실해 있다가 거의 울먹거리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나니 여권도 신분증임이 생각났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너저분한 방안을 뒤집어엎고 여권을 찾기까지 한 시간 넘게 걸렸다. 투표 종료 시간은 다가오고 방은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가는 꼴을 보면서 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투표하고 안도했다.

2012년 총선 때는 정말로 투표를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서울에 살면서 주민등록은 고향으로 돼 있었는데, 선거 전 갑작스레 다리를 다쳐 깁스 신세를 지게 됐다. 부모님이 걱정할까봐 다친 일을 말하지 않았는데 고향에 가서 목발 짚은 모습을 보여야 할지 고민됐고, 목발 짚고 5시간 거리를 오갈 일도 아득해 가지 않았다.

두 차례 선거를 통해 나는 귀찮음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선거의 가장 큰 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평소 정치 참여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편이었지만 내 심신이 번거로울 일이 생기자, 별 대단한 행동도 아닌 투표 하나에도 갈등과 번민에 휩싸였던 것이다. 자랑할 것도 아닌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는 아래 시를 읽고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 이창기 -

a) 누군가 제멋대로 사용한 흔적이 있다. b) 평소엔 친절하게 응대하다가도 큰일이 생기면 전화를 안 받는다. c) 상담원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주 바뀐다. d) 책상을 내려치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다. e) 입소문과 달리 물건의 크기가 왜소하고 볼품이 없다. f) 광고지의 그림처럼 멋진 성충으로 자라 우화하지 않고 계속 애벌레로 지내며 아마존젤리만 축낸다. g) 약정기간 동안 반품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고지 받지 못한 경우(단 공동 구매자에 한함). h) 발육이 늦고 밤이 되면 불안해하며 문틈을 긁는다. i) 색깔이나 무늬가 마음에 안 든다: 반품설명서의 지시에 따라 라벨을 뜯지 말고 그대로 재포장해 문밖에 놓아두십시오. 택배기사 K

민주주의 하면 그 표상 같은 시 '타는 목마름으로'가 있지만, 현재 민주주의가 처한 자리는 그보다 이 시 '민주주의'가 더 잘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숨죽여 흐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민주주의의 이름을 남몰래 써야' 했던 시절은 갔고, 다들 툭하면 반품하는 게 낫다며 아우성 대는 게 지금의 민주주의다.

유머가 돋보이는 이 시는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손쉽게 물건을 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품할 수 있는 현실에 빗대 민주주의와 시민의 관계를 풀어낸다.
시의 반품사유서대로면 민주주의를 반품하는 것은 웬만한 쇼핑몰 물건 반품보다도 간단하고 친절해 보인다. 항목 하나하나가 재기 넘치고 곱씹을수록 풍자가 예리한데, 이 시는 조롱받는 민주주의의 전락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는 갖가지 이유를 들면서 반품을 논하는 민주주의의 구매자들도 비판하는 듯하다.

쭉 읽어가다가 마지막에 '반품설명서'라는 단어를 보자, 마치 어떤 민주주의라도 반품할 자격이 우리에게, 나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민주주의에 무조건적으로 과도한 낭만과 권위를 부여하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겠지만,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른 적 없는 이들만이 그것을 물건처럼 다시 보내버리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시를 소개하기에 앞서 투표 안 한 부끄러운 이야기를 구구절절 적었던 이유다.

그리고 누구라도 진심으로 민주주의를 반품하길 원하는 이는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이유에서건 민주주의가 불만족스럽더라도 최소한 그것을 계속 소유하고 바꾸기 위한 첫걸음이 투표가 아닐까. 올해 총선 즈음에 혹시 내가 또 다리를 못 쓰게 되더라도 이번에는 꼭 투표하리라 다짐한다.

글 | 김여란 前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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