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의 미스터리..꼭대기에 정자가 있었다?
신라시대의 천문관측 시설로
널리 알려진 경주 첨성대.
그런데 우리가 접하는 현재 모습과
과거의 모습이 달랐다는
문헌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경주 순창 설시 세헌편에
나오는 구절에는 첨성대에
'백구정'이라는 정자가 존재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게다가 그 정자에는
신라 3대 문장가로 알려진
설총이 친필로 쓴 현판이
걸려있었다고도 적혀있죠.
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문신인
홍적의 문집 '하의유고'에도
첨성대에 누각이 있었음이
기록돼있습니다.
일본 근대 기상학의 선구자인
와다 유지는 더 나아가
직접 첨성대 원형 추정도를
그리기까지 했는데요.
그는 첨성대 위에 관측기구를 설치해
천문 관측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 기록에 나타난대로
첨성대 위에 정자가 있었다면,
그 진짜 용도는 무엇이었을지
궁금증이 드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첨성대는 이 외에도
숱한 미스터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천문을 살펴보던 기구인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형태가 워낙 기이하다보니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죠.
불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우물?
박혁거세 등 성스로운 조상의
탄생을 형상화했다는 관점입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뒤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가 신성한 인물의 후예임을
천명해야 했는데,
우물 모양의 첨성대를 통해
신성한 우물 옆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후계자라는 것을
과시하려 했다는 해석입니다.
여기에 불교적 의미도 더해집니다.
불룩한 아랫부분은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엉덩이를,
중간 창문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오른쪽 옆구리라는 견해입니다.
더 나아가 한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우주우물'로서
첨성대를 만들었다는 해석입니다.
첨성대는 일종의 불탑?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주변 여덟 나라가 갈등을 빚자
중재자가 사리를 8등분해
각국에 보내 사리탑을 만들었는데,
사리를 분배받지 못한 신라에서
유골을 담았던 병을 가져와
'병탑'으로서 첨성대를 만들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 밖에 온갖 학설들
태양에 비치는 첨성대의 그림자로
24절기를 측정했다는 규표설,
신라시대 수학인 주비산경이
집약됐다는 주비산경설,
농업신인 영성을 숭배하던
제단이라는 영성제단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구라트를 모방했다는
지구라트설 등이 제기됩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
하지만 첨성대 지하는 한 번도
발굴 조사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많은 정보가 숨겨져 있을 것 같은데요.
언젠가 주변을 발굴하게 되면
수많은 의문들이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배한철 기자 / 이장경 에디터]
관련기사: 경주 첨성대 위엔 정자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