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서 인사불성으로 취한 적이 많았던 세종

조회수 2019. 7. 18. 15: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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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침 도는 매콤달콤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실록은 왕을 비하하는 것을 금기시합니다.

그러나 고전은 왕의 치부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요. 

출처: 나무위키
세종대왕 표준영정

한글을 창제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유교 정치의 기틀도 마련한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독보적 성군으로 꼽힙니다.


그런 세종대왕이 밖으로 돌아 다니기 좋아해

한 달 이상 대궐을 비우기 일쑤였고

대궐 밖에서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만취한 날이 많았다는 게 사실일까요?


놀 땐 확실히 놀았던 세종

선조 때 문신인 박동량(1569~1635)이  

야사집 <기재잡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내(박동량) 일찍이 세종 때 주서(승정원의 정7품 벼슬)의 사초(실록 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를 보니, 상감께서 친히 양성(안성), 진위(평택), 용인, 여주, 이천, 광주까지 사냥을 다녔는데 때로는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오셨다가 이튿날 또 떠나곤 하였다." 

세종대왕이 경기도 일원에 수시로 나들이를

나갔던 모양입니다. 그곳에서 백성들이

바치는 거친 음식을 마다하지 않고 받았습니다. 

" 길가의 시골 백성들이 더러는 푸른 참외를 드리기도 하고 더러는 보리밥을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면 (상감께서는) 반드시 술과 음식으로 답례하였다."

그런데 세종대왕 일행은 흥에 취해서

자주 과음했던 모양입니다.

기재잡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사초 앞에 여섯 사람의 대언代言·승지)과 두 사람의 주서는 이름을 쓰지 않고 성만 써 놓았다. 좌대언(左代言·좌승지) 밑에 진한 먹으로 '종일토록 취해 누워서 인사불성이니 우습도다'라는 글씨를 크게 써 놓았다"

그러면서

"푸른 참외와 보리밥이라면 (농번기인) 봄가을인데 정상적으로 사냥할 때가 아니며, 중요한 정무를 맡은 승지가 취해서 일을 폐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태평성대라지만 군신 간에 서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할 것"

라고 강하게 비판하죠.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기재잡기 - 임금에 대한 뒷담화가 담겨있다

세종, 갑자기 분위기 마담뚜?

더 당황스러운 일도 있습니다.


죽천 이덕형(李德泂·1566~1645)은

<죽창한화>에서 세종대왕이 형

효령대군의 증손녀를 지방의 한미한

집안 선비와 강제로 결혼시킨

비화를 소개했는데요.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의 마담뚜 행적을 폭로한 이덕형

세종대왕은 여러 대군, 왕자들과 함께

제천정(한남동에 있었던 정자)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마침 전국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강을 건너느라

강어귀가 꽉 찼습니다.


세종은 그들 중

유독 의관이 남루하고 얼굴이 수척한

한 유생을 골라 불러오게 했습니다.


세종은 선비를 맞고 이름을 물었습니다.

선비는 "영남의 현석규"라고 답했습니다.

세종은 주위를 둘러보며


"여기 누가 혼기를 맞은 여식이 있소"

라고 물었습니다.


형인 효령대군이 나서

"제 손자 서원군에게 혼기가 찬 딸이 있다"

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세종은

"만일 사위를 얻으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효령대군은 "가문이 대등하지 못하다"고

거절했지만 세종은

"영웅이나 호걸인 선비들이 초야에서

많이 나왔으니, 이 선비집 아들과

정혼하도록 하시죠"라고 고집을 피워

결국 혼인은 성사됐습니다. 

나라에서 특별히 배려를 해서 인지는

모르나 다행스럽게 효령대군 손자의 사위

현석규는 세조 6년(1460) 별시문과에

을과(3등급 중 2등급)로 급제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벼슬이 정2품 우참찬에 이르렀죠.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했으며

공사처리도 명석했습니다.


<죽창한화>는


"세종은 백 보 밖에서 우연히 한번

바라본 것만으로도 통달한 사람과

귀한 손님을 알아봤으니, 대성인의 식견이란

남보다 훨씬 뛰어난 법이다.

효령은 바로 나의 외가의 선조이다" 고 했습니다.  


깔 건 까는 신하들

고전은 비록 왕일지라도

서슴없이 비판합니다.


김택영의 역사서 <한사경>

세종대왕에 대해 고루한 유교만

떠받들었을 뿐, 내세울 업적이 없다고

깎아내렸죠.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깔껀 까는 책 <한사경>

"(세종은 태종이 시행한) 서얼금지법을 풀지 못했고 군포법을 부활시킬 수도 없었다. 문무를 함께 양성하고 농상(農商)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지금 세종이 남긴 업적은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빈유(貧儒)를 편안히 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것은 모두 고루하고 고식적인 황희와 허조 같은 무리가 잘못한 까닭이다. 황희와 허조는 혁혁한 사업이 없고 옛 제도만 삼가 지켰을 뿐이다." 


때로는 풍류를 즐길줄 알았고,
때로는 백 보 밖에서도 인재를 알아봤던
세종대왕. 오늘따라 더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출처: 나무위키
관련기사 : 들판에서 신하들과 인사불성으로 취한 세종..성군의 황당한 모습1

[배한철 기자 / 임창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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