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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맞아 버스타고 떠나는 서울 독립운동 유적지

조회수 2021. 2. 26. 20: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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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삼일절이 다가오는데요.

삼일절에 더욱 의미있는 곳이 있죠. 바로 독립운동 유적지인데요, 서울에 위치한 독립운동 유적지, 버스타고 함께 떠나볼까요?


<<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 삼일독립선언유적지 >>

마을버스 종로 01번의 인사동들머리. 

3.1독립선언터 정류장 근처에 있는 태화빌딩에서는 3·1운동 100주년 기념비와 독립선언문을 만나볼 수 있어요.

종로 태화빌딩은 예전에 태화관으로 불렸는데요. 

태화관은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때 만들어진 것이 바로 기미 독립 선언문이라고 합니다.


<< 이회영 선생 >>


시내버스 100번, 103번, 151번, 162번 등 많은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남대문시장에는 이회영 활동터 정류장이 있는데요. 

우당 이회영 선생은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으로 명문가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약관 20세부터 신지식을 받아들여 평민적 사고와 행동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죠.

19세기 말,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탄압했을 당시 이회영과 이시영 선생을 포함한 6형제는 가문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고, 이회영 선생은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운영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는 독립군을 키우는 교육 시설로 1920년까지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독립투쟁 영웅들을 배출했고, 한국광복군의 토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곳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이동녕, 이동휘, 안창호, 김구, 김규식, 이시영 등과 함께 여러 방면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죠. 


우당 이회영 선생의 집터는 지금까지도 명동에 남아있는데요. 명동 성당을 지나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당 이회영 선생의 동상과 집터 표석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 강우규 의사 >>

시내버스 100번, 150번, 151번, 162번 등 많은 버스의 환승센터인 서울역버스환승센터는 서울역버스환승센터·강우규 의거터 정류장이 있는데요. 

강우규 의사는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는데요. 젊은 시절부터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했죠.

1910년 8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탄압했을 당시 강우규 의사는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만주로 넘어가 한인마을인 '신흥동'을 세우고, '광동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썼습니다.

3·1운동으로 물러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이어

부임해온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질 때 강우규 의사는 65세로 머리카락과 수염이 다 허옇게 센 백발노인이었는데요.


노령의 몸에도 불구하고 의거를 감행했던 강우규 의사의 용기는 일제 식민통치자들과 전 세계에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으며 동시에 의열 독립투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 김상옥 의사 >>

시내버스 100번, 102번, 104번, 140번 등 다양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종로 5가에는 김상옥 의거 터 정류장이 있는데요.

김상옥 의사는 효제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입니다. 김상옥 의사는 서울 동대문에서 영덕철물상점을 운영했습니다.

20세에 동흥야학교를 설립하는 등 사회계몽·민족교육에 헌신하였으며,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윤익중, 신화수, 정설교 선생 등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를 발행했습니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기 위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서울에 잠입해온 김상옥 의사는 효제동에서 삼중으로 포위한 일제 군경 1천여 명과 3시간 반에 걸친 '단독대첩'을 치르면서 16명을 거꾸러뜨린 뒤 마지막 한 발은 자기 몸에 발사하여 뜻을 꺾지 못하도록 했는데

김상옥 의사의 몸에는 총탄 자국 11발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 과거 종로경찰서가 있던 터(현재는 종각지하쇼핑센터 8번출구) -

1920년 11월 김상옥 의사는 김구, 이시영, 조소앙 선생 등 임시정부요인들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 입단했습니다.

1922년, 때가 다가왔다고 판단해 안홍한, 오복영 등과 함께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폭탄, 항일문서를 갖고 서울로 잠입하여 기회를 노리다가 1923년 1월 12일, 일제 탄압의 상징이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경찰 등 10여 명을 부상시켜 그를 잡기 위해 혈안 된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순국했습니다.


<< 김마리아 선생 >>

마을버스 종로 03번과 종로 08번에는 효제초교·연동교회.김마리아 활동 터 정류장이 있습니다.

김마리아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는데요. 명문 양반가였던 김마리아 선생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을 뿐만 아니라 독실한 개신교 집안이었습니다.

김마리아 아버지는 개신교에 입교한 후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헌신한 인물인데요, 김마리아 선생의 집안은 김마리아 선생 외에도 다수의 애국지사를 배출한 명문가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민족정신이 투철한 가문에서 성장한 김마리아 선생은 주변 어른들의 영향으로 교육 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을 지향하게 되었고, 모든 조선의 국민들이 상호의존하고, 여성들 역시 독립운동에 앞장서야 된다고 생각하여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2.8독립선언에 참여했습니다.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서를 숨긴 기모노를 입고 들어와

부산과 대구, 광주 등을 돌며 3·1운동을 사전에 준비했는데요. 그 이후 서울로 향한 김마리아는 이화학당 교사들을 만나 여성 독립운동을 촉구했죠. 

뒤이어 교육계, 기독교계, 천도교계 지도자를 만나 2.8독립선언의 성과를 알리고 국내에서도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촉구한 결과,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3·1운동에 큰 역할을 한 김마리아는 버스정류장인 연동교회에서 시작되는 김마리아 길도 있는데요. 연동교회는 김마리아 선생이 세례 받고 학생 시절 신앙생활을 한 장소라고 합니다.

연동교회는 김마리아 선생이 세례 받고 학생 시절 신앙생활을 한 장소라고 합니다.

그 다음 세브란스관은 김마리아 선생이 졸업한 모교인 옛 정신여자고등학교 본관으로 김마리아 선생을 포함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고 하네요.

세브란스관을 지나면 회화나무&김마리아 선생의 흉상이 나오죠. 회화나무는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품고, 비밀문서들을 감추는 역할을 한 유서 깊은 수목이라고 합니다.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에 위치한 선교사의 집은 독립운동의 거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전도회관에서는 김마리아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죠.



오는 3월 1일은 올해로 102주년을 맞이한 삼일절인데요.

코로나19로 인해 다양한 행사가 취소되었지만 삼일절을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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