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에 이어 흑백영화 만든 이유 밝힌 감독

조회수 2021. 3. 25. 1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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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이 전하는 흑백 미학의 쾌감

흑백이기에 담을 수 있었던 아름다움
“’자산어보’, 극장 살리기 위한 디딤돌 됐으면”

정약전과 <자산어보>, 이름만 들어도 생경한 인물과 책이다. 역사책 속에서 정약용의 형으로 얼핏 본 기억은 있으나, 그 이상은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정약전. 허나 이준익 감독은 정약전과 그가 집필한 <자산어보>야말로, 역사에 남은 근대성의 씨앗이라 힘줘 말한다. 그는 정약전과 <자산어보>에서 무엇을 엿본 것일까.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영화 ‘자산어보’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자산어보’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가 함께 어류학서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황산벌’(2003)부터 ‘왕의 남자’(2005), ‘라디오 스타’(2006), ‘사도’(2014), ‘동주’(2015)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색다른 캐릭터와 이야기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준익 감독인 만큼, ‘자산어보’는 주요 캐릭터의 설정부터 특별하다.

지난 사극 영화에서 정치와 문화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인물, 혹은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려갔다면, ‘자산어보’는 조선의 끝으로 유배간 사대부와 흔히 ‘상놈의 자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부를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진다.

역사책 속 정약용의 형으로, 몇 줄 등장하지도 않던 정약전과 그 이름조차 정약전의 책 <자산어보>에서만 찾을 수 있는 창대. 이준익 감독이 이 ‘비주류’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극 중 약전이 약용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는 뜻 모를 사람 공부보다, 사물 공부에 몰두하기로 했네’라고 적는다. 대학(大學)에는 ‘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는데,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면, 정약전은 ‘격물치지 성의정심’을 실천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격물치지는 사물에 대해 깊이 연구해 지식을 넓히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전근대성을 상징하는 성리학을 수정하는 것이었다면, 약전의 책은 자연과학 도서가 된다.

때문에 나는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조선 문명의 근대성을 품고 있던 씨앗이라 생각했다. 누군가는 갑오개혁으로, 누군가는 동학농민운동으로 근대의 시작을 보지만, 사실 전부 과거의 집단주의적 사고에서 바라본 인식이지 않나. 나는 역사를 개인주의 시대에 맞춰 개인에 초점을 두고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산어보>는 개인이 갖고 있던 근대성을 증명한 책이고, 약전의 그러한 파격적인 근대성을 영화로 그리고자 했다.”

정약전과 <자산어보>에 담긴 의미에 대해 자신만의 새로운 견해를 내비치며 영화를 기획한 계기를 밝힌 이준익 감독. 그렇다면 영화 ‘자산어보’를 흑백으로 그려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큰 스크린에 펼쳐지는 흑백 세상을 통해 섬세하고도 강렬하며, 생생한 이야기를 수놓았다.

“흑백과 칼라를 인식할 때 관객은 분명히 차이를 보인다. 영화를 보며 ‘흑백임에도 답답함이 없고 되려 세련됐다’는 말들을 자주 해주는데, 흑백만이 잡아낼 수 있는 디테일 덕분이다. 칼라는 이미지 전부가 관객을 향해 밀고 들어간다면, 흑백은 인물의 감정은 물론이고 여러 미장센까지 현미경으로 보듯 세세하게 볼 수 있다.

흑산도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 역시 흑백이기에 담을 수 있었다. 보통 칼라 영화라면 풍경에 색이 많다 보니 관객이 인물에 집중할 수 있게끔 카메라가 배우를 가까이서 잡는다. 그런데 흑백은 멀리서 배우를 찍어도 관객이 충분히 그를 볼 수 있다. 해서 익스트림 풀샷으로 찍을 수 있던 것이다. 칼라 영화에서 그렇게 넓게 잡아놓으면 인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여러 요소 중에서도 약전과 창대의 관계는 특이 인상적이다. 나이는 물론 신분의 격차가 극심한 두 사람이지만, 누구 하나가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닌, 서로의 스승이자 벗으로 변화하며, 각자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이유다.

“나는 세대차이는 그릇된 용어라고 생각한다. 개인차만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특정 세대와 구분 짓고 차이를 이야기하지만, 사실 사람마다 다른 것 아닌가. 나이가 들었어도 개방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 젊지만 ‘꼰대’인 사람도 있다.

그러니 이 영화도 세대 차이를 극복하는 영화라고 보지는 말아주었으면 한다. 개인주의라는 것은 사실 개인을 존중한다는 의미인데, 우리는 이제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주의로 많이 오지 않았나. 그러니 삶의 방식대로 역사와 사회를 개인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집단으로 묶어서 세대차이라는 말로 뭉뚱그리지 말고 개인차로 말을 바꿨으면 한다.”

그렇게 영화 ‘자산어보’는 이준익 감독의 확고한 가치관과 치밀한 미학적 계산을 바탕으로 완성됐다. 색채는 사라졌으나 자연 풍광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생생하고, 인물 사이 흐르는 감정선 역시 어느 것 하나 쉬이 사라지지 않은 채 진한 여운을 남긴다.

허나 영화는 관객이 찾아주지 않으면 의미가 퇴색되는 것. 코로나 시대, 관객이 극장을 찾기 어려운 시기임에도 영화의 개봉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가 극장을 살리는 디딤돌이 됐으면 한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영화는 많이 준비돼 있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극장을 살리는 것이다. 산술적으로 얼마 있지 않으면 극장들은 문을 닫아야 한다. 극장이 없으면 영화가 없어진다. 때문에 극장을 살리는 것이 절실하다는 생각에 영화의 개봉을 결심했다. 물론 감독의 입장에서 코로나 상황이 조금 더 안정된 후 개봉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하지만 당장 ‘자산어보’가 디딤돌이 되어서 뒤의 영화들이 개봉할 때 관객들이 안심하고 극장에 올 수 있으면 했다.”

영화 ‘자산어보’는 오는 31일 극장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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