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얼 | 한국영화 중흥기 이끌었던 故 최은희

조회수 2018. 4. 19. 19:0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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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던 배우 최은희가 4월 16일(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 일생 동안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이자 우리나라 세 번째 여성 감독이기도 했던 그는 이혼과 납북 등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갔다.

남편 신상옥 감독과 왕성한 영화 활동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약하던 고인은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한 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에 출연하며 김지미, 엄앵란과 시대를 주름잡았다. 다큐멘터리 ‘코리아’(1954)를 찍을 당시 신상옥 감독과 만나 사랑에 빠진 그는 그해 결혼식을 올리고 남편과 꾸준한 영화 활동에 나섰다.


고인은 신상옥 감독과 손 잡고 ‘꿈’(1955) ‘젊은 그들’(1955) ‘지옥화’(1958)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1959) ‘자매의 화원’(1959)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등 1976년까지 약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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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후학 양성까지 발 넓혔던 최은희


고인은 연기뿐만 아니라 직접 연출까지 나섰다.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을 직접 연출했으며, 감독이자 주연배우로 함께 나섰던 ‘민며느리’를 통해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해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북한 공작원에 납치 후에도 이북에서 영화 활동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고인은 1978년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다. 그리고 납북된지 6년 후인 1983년, 역시 납북된 신상옥 감독과 이북에서 재회했다. 두 사람은 김정일의 지원 아래 지속적으로 영화 활동을 이어갔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사랑 사랑 내 사랑’(1984) 등 다수의 영화를 함께 찍었으며,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두 사람은 1986년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에 성공했다. 이후 10년 이상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0년 우리나라로 무사히 귀국했다.

극단 이끌며 뮤지컬 기획, 제작


고인은 2001년부터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으며 2002년에는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 제작했다. 2007년에는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영화 같은 인생을 대중과 나눴다. 영국의 로스 아담, 로버트 캐넌 감독은 우리나라와 북한을 넘나들었던 고인과 신상옥 감독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로 만들어냈다. 이 다큐멘터리는 국내에서 2016년 개봉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9일 오전이다.


차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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