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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엔지니어들 - 단테 자코사 (1)

조회수 2021. 3. 19. 18: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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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 500의 설계자

과거에 비하면 카리스마가 많이 약해졌지만, 피아트는 지금도 이탈리아 최대의 자동차 브랜드다. 그리고 자동차 업계의 끊임없는 부침 속에서 살아남은 브랜드 가운데에서도 19세기로 그 뿌리가 거슬러 올라가는 극소수 중 하나다. 

그런 피아트의 오랜 역사에서 전성기를 꼽자면 당연히 20세기 중후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시기에 피아트가 내놓은 여러 명차의 개발 과정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단테 자코사(Dante Giacosa)다.

출처: Stellantis
단테 자코사

많은 사람이 피아트 역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차로 흔히 500 즉 친퀘첸토(Cinquecento)를 꼽는다. 친퀘첸토는 '토폴리노(Topolino)'라는 별명으로 불린 1세대와 1950년대 후반에 나온 2세대 누오바 500(Nuova 500)이 대표적이다. 두 차 모두 실용적인 소형차로서 이탈리아 모터리제이션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깜찍한 모습으로 세계인에게 사랑받았는데, 이들 모두 자코사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자코사는 친퀘첸토뿐 아니라 피아트 전성기에 나온 거의 모든 차의 개발을 이끌었다. 그리고 피아트의 여러 차에 반영된 그의 아이디어와 설계는 현대적 승용차에 폭넓게 영향을 주었다. 피아트도 브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언급할 만큼, 자코사는 피아트가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스스로 입증한 기술자

자코사는 1905년에 아버지가 카라비니에리(국가 헌병대) 복무 중이던 로마에서 태어났다. 이후 고향인 피에몬테의 주도면서 피아트 본사가 있었던 토리노의 폴리테크닉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1927년에 졸업한 뒤, 그는 자동차 회사인 SPA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지원을 했을 때는 면접에서 떨어졌지만, 아버지의 도움으로 당시 피아트에서 요직에 있던 비토리오 발레타(Vittorio Valletta)의 추천서를 받아 입사할 수 있었다.

출처: Stellantis
비토리오 발레타

언뜻 '낙하산 인사'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자코사는 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처음에는 딱히 주어진 일이 없었지만, 설계와 생산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해결했다. 덕분에 그는 경영진으로부터 능력을 인정을 받아 더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피아트가 SPA의 설계 부문을 흡수하면서 자코사는 자연스럽게 피아트에서 일하게 되었다.

자코사는 입사 후 다양한 부서에서 경험을 쌓았고, 오래지 않아 엔진 개발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재능은 피아트가 처한 상황과 맞물려 일찍 빛을 발하게 되었다. 당시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파시스트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무솔리니는 이미 이탈리아 최대 규모의 자동차 회사였던 피아트에 일종의 국민차 개발을 지시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1932년 피아트 공장을 방문한 베니토 무솔리니 (A자 앞)

피아트의 공동 창업자면서 상원의원이기도 했던 조반니 아녤리(Giovanni Agnelli)는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엔지니어들에게 무솔리니의 요구에 알맞은 차를 개발하도록 했다. 요구사항은 '5,000리라 정도의 값에 살 수 있으면서 어른 두 명과 어린이 두 명이 탈 수 있는 차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5,000리라는 당시 피아트가 내놓은 소형차인 508 바릴라(Balilla) 값의 절반 정도였다.

피아트 설계 부문에서는 몇 가지 제안을 내놓았는데, 당시 설계 책임자였던 오레스테 라르도네(Oreste Lardone)가 완성된 시제차에 아녤리를 태우고 시험 주행을 하다가 불이 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일로 라르도네는 해고되었고,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된 공랭식 엔진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피아트 차에 쓰이지 못했다. 그리고 라르도네의 빈자리는 자코사가 채우게 되었다.

첫 피아트 500, '토폴리노'의 탄생

자코사는 최대한 주어진 조건에 맞는 차를 개발하려 다양한 아이디어를 반영했다. 동력계는 앞 엔진 뒷바퀴 굴림 방식의 전통적 구성이었다. 4기통 569cc 사이드 밸브 엔진 역시 일반적인 수랭식이었는데, 차 크기를 줄이려 엔진 뒤쪽에 라디에이터를 달았다. 엔진 출력은 13마력으로 높지 않은 만큼 차 무게도 가벼워야 했는데, 그는 프레임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는 식으로 튼튼하면서도 가벼운 구조를 만들었다. 

출처: Stellantis
피아트 500 '토폴리노'

앞 서스펜션은 당대 소형차에 드물었던 독립식 구조를 썼다. 물론 구조는 무척 간단했는데, 이 역시 차 크기를 줄이면서 단순하고 값싼 차를 만들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4단 수동변속기는 엔진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데 도움을 줘 연비도 좋았다.

이와 같은 구조 위에 올라간 차체는 루돌포 샤페르(Rudolfo Schaffer)가 디자인했는데, 비스듬히 누운 그릴을 중심으로 둥근 모습의 독특한 앞모습이 특징이었다. 제로 아(Zero A)라는 이름으로 개발된 이 차는 곧 경영진의 승인을 받아, 1936년부터 500이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이 3m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차체와 귀여운 앞모습 덕분에 금세 생쥐를 뜻하는 토폴리노라는 별명을 얻었다. 

출처: Stellantis
피아트 500 '토폴리노'

토폴리노는 무솔리니가 요구한 값은 맞출 수 없었지만, 동급 차들보다는 저렴했고 비교적 튼튼하고 경제적이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개선되고 여러 파생 차종을 낳으며 1955년까지 약 52만 대가 생산되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대중차가 되었다. 엔진부터 섀시에 이르기까지 토폴리노의 거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 자코사는 1937년에 피아트 기술 부문 책임자에 오른 데 이어 1950년에는 기술 담당 이사에 올랐다.

1945년에 조반니 아녤리가 세상을 떠난 뒤, 피아트의 총수 자리는 비토리오 발레타가 넘겨받았다. 자코사가 처음 취직할 때 추천서를 써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후로 오랫동안 자코사와 발레타는 개발과 경영을 책임지며 피아트의 성장을 이끌었는데, 두 사람의 시너지는 1950년대에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글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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