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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클래식

자동차 세계를 빛낸 세 여인

자동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여성들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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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서울 북촌의 양반여성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인권 선언서인 여권통문(女權通文)을 내고 여성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과 남성과 평등하게 직업을 가질 권리, 그리고 교육을 받을 근대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권운동으로 이어졌고 여러 사회 분야에 진출하는 개화 여성들이 늘어갔다. 

매일신보 1919.12.06. 3면 5단 국내 최초의 여성 운전사 최인선

출처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이렇게 사회적 근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던 1919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에 ‘여자 운전수가 될 최인선’이란 제목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운전면허증을 가진 여성이 소개되었다. 이것은 개화 여성들의 진취성을 보여준 사례로 기록되었지만,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소식이기도 했다. 이제 최인선처럼 자동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세 여성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우선 첫 번째로 소개할 사람은 두 번 이상 궁지에 몰린 남편을 구출한 독일 만하임의 베르타 벤츠라는 여장부다. 그녀는 약혼자의 기계 공장이 파산할 지경으로 내몰리자, 사업 파트너의 주식을 모두 사들여 기사회생에 힘을 보탰다. 또한, 남편이 대학 때부터 꿈꿔왔던 원동기로 움직이는 자전거를 만드는 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1883 베르타 벤츠와 그녀의 세 자녀

출처Daimler

그런 도움으로 그녀의 남편은 결국 '자동차의 아버지'라는 위대한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가 바로 최초의 가솔린 내연기관 자동차이자 특허받은 첫 자동차라고 할 수 있는 페이턴트 모터바겐을 만든 카를 벤츠였다. 베르타 벤츠는 카를 벤츠의 아내로 내조만 한 것이 아니었다. 

1888년 자동차 역사 최초로 장거리 주행을 한 베르타 벤츠

출처Daimler

두 번째로 소개할 여성은 플로렌스 로렌스(이하 로렌스)라는 이름의 배우로, 영화 역사상 최초로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린 스타였다. '영화배우가 자동차 발전에 무슨 기여를 했겠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남긴 발명품은 지구상에 자동차가 존재하는 한 사라질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현대식 턴 시그널 일명 깜빡이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신호기였다. 

1912 Florence Lawrence

출처Wikimedia Commons

그녀는 1907년 다니엘 분(Daniel Boone)이란 제목의 영화를 시작으로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스타 배우였다. 또한 그녀는 자동차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마니아로, 20세기 초 일반 시민이 쉽게 살 수 없었던 자동차를 자가용으로 썼던 몇 안 되는 여성 드라이버이기도 했다. 그녀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동차는 매우 인간적이어서, 사람처럼 친절과 이해 그리고 관심에 반응한다"고 이야기할 만큼 자동차에 각별한 열정과 철학을 가진 여성이었다.

어떠한 종류의 신호등도 도로에 보이지 않는 1911년 뉴욕의 풍경

출처Wikimedia Commons

로렌스는 1914년에 다른 자동차 운전자와 마차의 마부에게 자신이 운전하는 차의 진행 방향을 미리 알리는 ‘신호를 주는 봉’(Signaling arm)이이라는 방향표시기를 발명했다. 이는 1929년에 오스카 존 심러(Oscar John Simler)가 특허를 받은 방향지시기보다 15년을 앞선 것이다. 


플로렌스 로렌스가 발명한 방향표시기의 작동 예

출처commons.wikimedia.org

턴 시그널의 기원이자 안전한 교통 문화에 꼭 필요한 발명품을 만든 로렌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특허를 내지 않았다. 아마도 운전을 좋아하던 로렌스가 타인과 더불어 안전하고 즐거운 드라이브를 즐기려는 배려 차원에서 만든 작품이 아니었을까 한다.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로렌스와 시민들의 삶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을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나치는 1940년부터 1년여 동안 쉴 새 없이 런던에 폭격과 공습을 가했다. 결국 1940년 9월 나치의 폭탄이 버킹엄 궁 일부를 심하게 파괴하면서 영국 왕실의 창문 앞까지 전쟁의 위험이 다가왔다. 영국 정부는 왕실에게 캐나다로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조지 6세와 왕대비(Queen Mother)는 영국이 가진 불굴의 의지를 내세우며 정중히 거절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 공습 후 런던 거리

출처Wikimedia Commons

귀청이 떨어질 듯한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국민을 위로하는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는 군 복무를 해야 하는 영국 왕실 전통에 따라 입대를 원했다. 그녀의 부모인 조지 6세와 왕대비는 왕족 중 어떤 여성도 군 복무를 한 적이 없다며 반대를 했지만,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결국, 1945년 2월에 18번째 생일을 맞이한 엘리자베스 공주는 군대 지원단(ATS)에 지원하였다. 

1942년 4형 보병전차 A22 처칠을 수리 중인 군대 지원단(ATS)

출처Wikimedia Commons

그 후 그녀는 군사 훈련소가 있는 햄프셔 주의 올더숏에서 6주간 자동차 정비를 배웠다. 그곳에서 자동차 엔진의 구성 부품을 완전히 분리하여 수리하고 다시 재조립하는 오버홀과 타이어 교체 그리고 지프, 트럭, 구급차 등 군에서 쓰는 대부분의 차를 운전하는 법을 습득했다.

1945년 5월 엘리자베스 공주

출처Wikimedia Commons

전쟁 중에서도 피어난 그녀의 헌신에 여러 언론에서 '자동차 정비 공주(Princess Auto Mechanic)'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전까지 입대를 반대하던 조지 6세와 왕대비는 그런 공주를 자랑스러워하며 그녀가 있는 훈련소에 수많은 취재진을 이끌고 방문하였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자동차 정비사로서의 군 복무는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제대 후 엘리자베스 공주는 대중지였던 콜리어스를 통해 노동의 흔적인 손톱 밑의 흙과 기름때를 친구들에게 보여줄 때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세 명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자동차 역사 속으로 들어온 이유가 분명했다. 또한 그들의 그런 참여는 자동차 문화와 기술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1769년에 니콜라스 조셉 퀴뇨가 최초의 증기자동차를 몰았을 때에는 지금의 여성들이 자동차 세계에 이렇게 엄청난 공헌을 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자동차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남성만의 몫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일도 존재할 자동차를 남녀 구분 없이 서로 즐기고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양성평등을 촉진을 위한 볼보의 사회 운동 ‘Equal Vehicles for All'

출처Volvo Cars

글 윤영준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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