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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4] 이승만 대통령의 카라이프

조회수 2020. 3. 9. 15: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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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4] 이승만 대통령의 카라이프
1984년 독점 인터뷰


‘대통령의 첫 운전사는 나, 프란체스카였다’


※ 본 내용은 월간 <자동차생활> 1984년 10월호 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84세의 프란체스카 여사는 낙엽 뒹구는 이화장 뜨락에서 10월 8일의 ‘결혼 50주년’을 앞두고 대통령과의 카라이프를 회고한다. “그이는 난폭에다 지독한 과속운전을 했죠. 그러나 나를 보고는 ‘당신은 실키 드라이버야’라고 칭찬을 했어요.”

인터뷰 당시의 프란체스카 여사


이화장 응접실에서 만난 프란체스카 여사는 84세의 고령으로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고왔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남편의 사진이 걸린 벽을 등지고 소파에 자리한 여사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연초록 한복에, 퍼스트레이디 시절의 기품을 더해 단아한 풍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와 함께 재미교포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던 1930년대를 떠올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부터의 카라이프를 들려주기까지는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진초록 카펫이 깔린 응접실은 우리네 한옥의 마루만한 크기였으나 2중창으로 하여 화창한 가을의 따가운 바깥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어두운 편이었다.


그는 소음이 싫다며 손을 저어 문을 닫게 하고는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켰다. 한복을 입은 대통령과 여사의 다정한 옛날 흑백사진 한 점이 있었다. 그는 아마도 기자의 방문으로 갑작스레 대통령과의 한 시절을 회상하고는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으리라.


창문 밖으로는 울창한 숲을 이룬 이화장 정원이 바로 내려다 보였다. 그 아래는 수림이 햇살을 차단, 몇 십 년 동안인지도 모를 사이에 자생한 이끼가 마치 페르시아 융단처럼 잘 깔려 ‘고색창연’한 느낌마저 주었다. 마당에는 빨간 고추가 말려지고 있어 한때, 한 세대의 풍운이, 역사가 소용돌이쳤던 이화장이 이제는 평범한 사람들의 조용한 저택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며느리인 조혜자 씨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소중하게 간직한 사진첩을 꺼내 펼치며 ‘난폭한 운전자’ 이승만 박사 스토리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1933년 9월 17일에 찍은 대통령과 그의 자동차. 이 차로 줄곧 과속운전을 하며 신혼여행도 다녔다


1933년 가을 미국 와이오밍 주 옐로스톤 파크에서 찍은 우남과 승용차 사진이 있었다. 나무숲을 배경으로 30년대 초반 올드카의 펜더 위에 모자를 벗어 쥔 오른손을 얹고 차에 기대선 58세 때의 이승만 박사(잘생긴 얼굴은 40대로밖에 안 보인다). 처음 공개한다는 사진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사진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워싱턴에서 과속운전을 했던 바로 그 차, 1년 뒤 결혼하고 나서도 과속운전을 즐기며 신혼여행을 다닌 추억어린 차이기 때문이다.

1933년 9월 16일에 찍은 뷰트 몬태나 농장에서의 모습. 왼쪽부터 대통령, 전인수 씨 부인, 장기영 전 서울시장


또 있었다. 옐로스톤에 가기 전날 뷰트 몬태나 농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같은 차 앞에 대통령과 나란히 전인수 씨 부인, 뒤에 서울시장을 지낸 장기영 씨와 함께 있는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밤낮없이 넓은 미국 땅을 돌아다닐 때였어요. 그이는 이곳저곳의 약속시간을 대느라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과속에다 난폭 드라이버로 돌변했어요. 시속 140km 이상은 예사였지요.”


“워싱턴의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기 위해 뉴욕을 출발했는데 정상적인 운전으로는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어요. 그의 무서운 과속은 보나마나 한 일이어서 처음부터 마음을 죄었으나 내가 옆에서 잔소리를 해야 덜 달릴 것 같아 동승했지요.”


시계를 보며 과속을 제지했지만 우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켠 채 신호 무시, 논스톱으로 마구 페달을 밟아댔다. 워싱턴으로 가는 길 내내 질주했으며 여기저기서 클랙슨 소리가 나며 황급히 우남의 차를 피하는 모습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는 2대의 기동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패트롤카가 나타났어요.” 


“걱정 말아요. 나는 잡히지 않아요.” 


우남은 스피드를 더욱 올리며 대로를 마구 질주했다. ‘따라오려면 따라와 보라’는 투였다.


“나는 등과 손에 땀이 나다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속도가 시속 160km도 넘었을 것 같았다.


“제발, 오 제발…….”


“여보, 뒤를 보지 말아요. 나를 믿으시오.”


“이때 순간적이지만 ‘이 분과는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차를 탈 때마다 간이 콩알만 해지니 살 수가 있어야죠.”


우남과 기동경찰과의 ‘백주의 레이스’는 우남의 승리. 덕분에 프레스클럽에는 정시에 도착했다.


우남은 연단에 서자 열변을 토하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외쳤다. 장내에서는 수십 번의 박수가 터졌다.


프레스 클럽 입구에서 “나오기만 해봐라. 당장 잡아가둬야지”라고 중얼거리며 벼르던 2명의 기동경찰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연설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연설이 끝나고 나오는 우남은 쳐다보지도 않고 경찰이 나를 향해 말했어요.” 

“기동경찰 20년에 내가 따라잡지 못한 단 한 명의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이오. 일찍 천당 안 가려거든 부인이 조심시키시오.” 


경찰은 우남을 향해 씩 웃고는 V자를 그려 보이며 총총히 되돌아갔다.


“여보, 오늘은 잘 되었지? 성공이야.”

대통령은 늘 과속을 즐겼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우남에게서 운전을 배웠다.


그가 연일 수천리 길을 달리는 것이 안타까워 우선은 자기가 운전을 배워야 그가 피로할 때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말하자면 나 프란체스카가 대통령의 첫 번째 운전사였던 셈이죠.”


그는 우남의 타자수 겸 운전사, 가정부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다.


우남은 1904년 독립 밀사로 도미하여 1934년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할 때까지 30년 동안 온갖 풍상에 시달리며 가난한 독립투사로 온갖 궂은일을 다했다. 그때 그를 옆에서 거들어 준 타자수, 운전사, 가정부가 바로 프란체스카다.


“그이는 내가 비단처럼 부드럽게 운전한다고 해서 나를 ‘실키 드라이버’라고 별명지어 주었어요. 그이는 붓글씨나 시(詩)를 쓸 때는 ‘잔잔한 물결’이지요. 낚시를 즐기실 때도 차분하기 그지없어요. 그런데 핸들만 잡으면 폭풍우처럼 돌변해서 목적지에 도착해야 ‘살았구나’ 했답니다. 귀국해서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 그런 증상이 더 심해졌어요.”

귀국한 다음 해인 1946년 10월 7일 대통령과 함께


이후에도 프란체스카 여사는 우남의 카라이프를 계속 들려주었다. 6·25 전쟁 당시 화가 나서 경호원도 없이 차를 급하게 몰고 무초 주미대사를 찾아가 호통을 친 게 손수운전의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75세 때의 일이다.


전쟁이 끝난 뒤 열화 같은 성미의 대통령이 차를 몰고 싶은 충동을 안 느꼈을 리 없지만 줄곧 운전사가 모는 캐딜락 뒷좌석에 앉은 채로 참아야만 했다.


~~~ 중략 ~~~

이화장 시절의 영부인과 대통령


※ 프란체스카 여사는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할 때 함께 떠났다 1965년 우남이 별세한 후 1970년 정부의 허가에 따라 귀국해 이화장에서 양자 내외와 함께 살고 있었다. (편집자 주)


“어머님의 검소와 간소함은 본받기 힘들 지경이에요. 70년 하와이에서 오셔서부터는 줄곧 나라에서 내준 크라운을 타셨어요. 차가 13년이 되어 82년 폐차를 하게 되었죠. 그때 정부에서 어떤 차를 원하느냐고 물어왔어요. 어머님은 ‘비용이 안 들어가는 국산차’를 부탁했고, 그래서 지금 타고 있는 차가 ‘현대 코티나 마크Ⅴ 이코노미’랍니다. 어머님은 늘 “지금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와이에서 고생하시며 돌아가신 그이에게 죄송하다”고 말하시며 하나에서 열까지 ‘내핍’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본받고 있습니다. 또한 늘 “내가 죽으면 화환이나 꽃들로 둘러싸지 말고 독립투사의 아내답게 간소하고 검소한 장례식을 치러 달라”고 말씀하신답니다.”(며느리 조혜자 씨)


~~~ 중략 ~~~ 

이화장 가족(아들, 며느리, 두 손자와 함께)


인터뷰를 마칠 때 여사는 기자의 손을 잡았다. 손은 작았지만 보드랍고 따뜻했다.


“고맙습니다. 미스터 리. 건강하시길.”


곡예운전으로 속깨나 썩였던 대통령, 그의 곁에서 운전했던 대통령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운전사였던 여사. 이제 그는 역사 속에서 온갖 영욕을 뛰어넘어 50회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있다. 8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 어느 결혼기념일에 우남이 슬며시 여사의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던 ‘한 알의 빨간 사과’를 그리워하고 있다.


※ 1984년 결혼 50주년 기념일을 코앞에 두고 인터뷰했던 84세의 프란체스카 여사는 1992년 3월 92세를 일기로 이화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1900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녀는 20세 때 독일 자동차 레이서 헬무트 뵈룅과 결혼했다 3년 만에 이혼했고, 1934년 나라를 잃은 이승만 박사와 재혼했다. 이후 독립운동가의 아내에서 대통령의 퍼스트레이디로, 6·25와 4·19, 뒤이은 망명과 타향에서의 병수발과 남편의 사망, 1970년 귀국해 1992년 눈을 감기까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함께 했다. 지금은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 옆에 잠들어 있다. (편집자 주)

1984년 10월호 자동차생활 목차


자동차생활 (CAR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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