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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여신에게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세기의 연인, 오드리 헵번 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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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풍미한 세기의 연인, 영원한 대중 문화의 아이콘,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인 사회 활동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친 소셜테이너... 이 모든 것은 단 한 사람. 이제는 불멸의 이름이 된 오드리 헵번을 가리킵니다. 


외모 뿐만 아니라 연기력, 그리고 인성까지 흠잡을 곳 없었던 그녀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 20세기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미녀 배우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많은 이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배우 오드리 헵번은 ‘미의 화신’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미녀 타이틀을 놓고 늘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는 했습니다. 그녀가 입는 옷, 착용한 쥬얼리,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등 모든 것이 화제가 되었으며 ‘헵번 스타일’로 불리며 시대의 유행을 선도한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죠. 


당시 할리우드에는 마릴린 먼로, 소피아 로렌, 리타 헤이워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육감적인 매력을 지닌 여배우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호리호리 마른 체형의 오드리 헵번이 인기를 끌면서 일대 지각 변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54년 <사브리나> 출연 당시 지방시는 헵번에게 드레스를 협찬해 주었는데 지금이야 빈번한 일이지만 이때의 사례가 특정 브랜드가 배우에게 의상 협찬을 해준 첫 케이스였으며, 지방시는 그녀로 인한 광고 효과로 톡톡히 보면서 그 이후로도 협찬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우정을 평생 유지했다고 하네요.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주인공 ‘홀리’ 역을 맡아 이른 아침에 검은 선글라스와 옷을 입고 티파니 보석상 쇼윈도우 앞에서 커피를 들고 도넛을 먹는 그녀의 모습을 한번쯤 본 적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헵번 특유의 세련된 패션 감각과 청순하면서도 귀여운 면모가 새삼 화제가 되었는데, 극 중 그녀가 입었던 지방시의 '블랙 미니 드레스'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00만 달러에 낙찰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드레스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됩니다.


이처럼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녀와 관련된 전시회, 특별전, 패션쇼 등을 자주 만나볼 수 있을 정도로 그녀가 대중 문화에 남긴 족적은 상당하다 할 수 있겠네요.

정작 헵번 본인은 외모 컴플렉스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종종 지인들에게 "나는 피부도 좋지 않아 화장을 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얼굴이 각졌고 콧등도 매끄럽지 않다."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전해지며 "이런 얼굴로 영화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하네요. 상술했듯이 자신은 너무 말라서 당시 인기 있었던 글래머러스한 매력과는 거리가 멀어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뭔가 조금 억울한 느낌이 밀려오네요...

2. 미국 역사상 단 15명뿐인 그랜드 슬램 달성에 성공한 만능 엔터테이너

오드리 헵번은 미국 엔터테인먼트 각 분야를 대표하는 가장 권위있는 4개의 시상식인 에미(Emmy, TV), 그래미(Grammy, 음악/청각 매체), 아카데미(Academy-Oscar, 영화), 토니(Tony, 무대공연)를 모두 거머쥔, 소위 EGOT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15인 중 한 명입니다.

우선 본업인 영화 배우로서의 성취로 가장 유명한데요. 

AFI(미국영화협회)가 꼽은 가장 위대한 배우 3위에 선정되기도 할만큼 오드리 헵번은 외모 뿐만 아니라 연기력 역시 익히 인정 받았습니다.


1953년, 오드리 헵번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연출한 그녀의 대표작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발탁됩니다. 본래 앤 공주 역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진 시몬스’가 고려되었지만 오디션을 통해 와일러 감독이 당시 완전 무명에 가까웠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됐죠.


촬영이 끝나고 영화 개봉 당시, 이미 유명 스타였던 그레고리 펙에 비해 신인인 오드리 헵번의 이름값을 고려해 배급사인 파라마운트는 펙의 이름을 크게 써넣었는데요. 이를 본 펙은 "헵번은 분명 이 작품으로 오스카를 수상할텐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라면서 그녀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포스터에 넣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기 합을 맞춰봤던 그레고리 펙의 예상대로, 그녀는 <로마의 휴일>에서의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전설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4년에 많은 이들이 예상을 깨고 영화가 아닌 브로드웨이 연극 '운디네'에 주연인 물의 요정으로 출연해 당해 토니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그녀의 커리어가 본래 연극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연극배우로서의 재능과 가능성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네요. 


조금 독특하게도 아이들을 위한 동화 오디오북 녹음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는데 성공했으며, 마지막 에미상은 그녀가 결장암으로 타계한 이듬해인 1994년에 ‘오드리 헵번의 황홀한 이야기’를 통해 수상하면서 사후 'EGOT'를 달성하게 됩니다. 

3. 경험으로부터 온 전쟁 영화 출연 거부

1929년생인 오드리 헵번은 10대 시절 영국에서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수업을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심화되자 나치 독일 치하의 네덜란드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나치 독일의 탄압에 맞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지원하는 등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에 제대로 휘말린 유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귀족 가문이었던 외가는 전쟁 중에 몰락해 영애였던 어머니 엘라는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요리사와 가정부로 일하며 헵번의 발레 레슨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고 하네요. 나치 독일을 피해 피난 생활을 하던 중 살아남기 위해 산에서 튤립 구근을 캐먹고 반쯤 썩어가는 음식들도 닥치는 대로 먹으며 가까스로 견뎠던 경험이 있으며, 영양실조로 인한 갖가지 합병증에 시달렸습니다. 때문에 한국의 개고기 식용 문화를 강도 높게 비난했던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를 향해 "전쟁을 겪게 되면 개고기가 아니라 더한 것도 살아남기 위해 먹게 되는데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해 봤는데도 그런 말을 하냐” 라고 일침을 가한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전쟁으로 인해 뼈저린 고생을 한 탓에 그녀는 일생 동안 전쟁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정중히 고사해 왔다고 하네요.


4. 은퇴 후 노년에는 더 아름다웠던 미녀 스타

1989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혼은 그대 곁에>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며 인권 운동과 자선 활동에 앞장섰으며, 특히 빈민 구제와 아이들을 돕는 것에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헵번 스스로도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만큼 어려운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돕는 것을 중요하다 생각했겠죠.


특히나 결국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결장암 투병 중이던 92년에는 소말리아를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공개되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젊었을 때 만인을 사로잡았던 외면적인 아름다움은 세월의 흐름 앞에 천천히 사그러 들었지만, 내면의 아름다움 역시 늘 지켜온 그녀였기에 변함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듯 하네요.


헵번 타계 후에도 아들 션이 '오드리 헵번 어린이 재단'을 설립하여 전 세계의 아이들에 대한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하니 그녀의 뜻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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