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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붐 세대의 취향을 저격한 차는?

미니밴, 시대와 세대를 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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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말, 그동안 미국에서 전혀 볼 수 없던 모습의 새로운 차가 캐나다 온타리오에 있는 크라이슬러 공장의 최종 조립라인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에는 플리머스 보이저, 나머지 차들에는 닷지 캐러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화물 운반을 비롯해 상용으로 주로 쓰이던 밴과 비슷한 모습이면서도, 일반 밴에 비해 작은 크기에 실내에는 6~7명이 탈 수 있는 좌석이 들어찬 이 차를 가리켜 사람들은 미니밴이라고 불렀다.

1983년 말에 선보인 미국의 첫 미니밴, 플리머스 보이저

이 낯선 장르의 차가 소비자들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한 번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미니밴은 순식간에 미국 주요 도시 외곽 주택단지의 차고를 점령해 나갔다. 그런 흐름은 1990년대 내내 이어졌고, 미국에서 차를 파는 거의 모든 브랜드가 크고 작은 미니밴을 쏟아냈다. 인기가 절정이던 2000년에 미국 소비자들이 산 미니밴은 약 133만 대에 이르렀다. 전체 승용차 판매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를 조금 넘긴 정도였지만,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장르의 차는 당당히 시장의 주류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1984년 유럽에 선보인 미니밴, 르노 에스파스

시장 규모가 큰 다른 지역에서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서 크라이슬러가 첫 미니밴을 선보인 직후인 1984년, 프랑스에서는 르노가 첫 유럽식 미니밴인 에스파스를 출시했다. 에스파스에 대한 유럽 소비자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초반 판매는 부진했지만, 오래지 않아 유럽 시장에는 미니밴 열풍이 몰아쳤다. 일본에서는 그보다 조금 이른 1982년에 닛산이 프레이리를 내놓으며 일본식 미니밴 시대가 열렸다. 미국이나 유럽과는 다른 접근방식으로 만들어졌을 뿐, 일본식 미니밴도 역할과 성장과정은 비슷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베이비 붐 세대가 도래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미니밴이라는 장르가 등장해 붐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라고 부르는 소비자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로, 20여 년 남짓한 시기에 걸쳐 세계 주요 지역에서는 경제발전과 전후복구가 활발했다. 그와 더불어 출산율이 크게 높아지며 인구도 크게 늘었다.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대거 가정을 꾸리기 시작한 시기가 1970~1990년대 중반이었다.

자동차는 베이비 붐 세대들의 필수품이었다

비록 석유파동과 같은 걸림돌이 있기는 했지만, 베이비 붐 세대는 전반적으로 물질적 풍요와 경제적 안정을 누렸다. 그와 더불어 교육과 생활수준이 높아졌고, 생활환경과 양식도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생활필수품이 된 자동차를 고르는 기준에도 달라진 라이프스타일이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가족과 함께 움직이며 소비와 여가에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차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런 사람들에게 미니밴은 더없이 편리하게 다가갔다.

폭스바겐 타입 2 마이크로버스

단순히 차 크기에 비해 공간 효율이 높은 차는 미니밴이 등장하기 전에도 있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이미 1940년대 후반부터 상자형 차체의 다인승 차들이 다양하게 나왔다. DKW 슈넬라스터를 필두로 마이크로버스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폭스바겐 타입 2, 피아트 물티플라, 시트로엥 타입 H, 르노 에스타페트 등을 유럽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960년대 들어서는 일본에서도 스바루 삼바, 스즈키 캐리, 다이하츠 하이제트와 같은 이른바 ‘원박스카’가 속속 등장했다.

1세대 플리머스 보이저와 형제차인 닷지 캐러밴

그러나 그런 차들은 대부분 상용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승용 성격의 차들도 사실상 미니버스 개념에 가까웠다. 1960년대 미국 히피 문화에 편입된 폭스바겐 타입 2가 유명세를 떨쳤을 뿐, 대부분 자동차 시장이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나온 미니밴은 승용차의 차체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어,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승용차처럼 ‘차고에 넣을 수 있는 다목적차’라는 개념부터 온전히 베이비 붐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했고, 그들의 요구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미니밴이 시대와 세대를 엮는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1세대 카니발

우리나라에서는 미니밴이 조금 늦게 빛을 보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을 겪은 탓에 베이비 붐이 10년 남짓 늦게 시작했고, 경제 발전에 따른 자동차 보급도 1980년대 중반 이후로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일본식 미니밴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고, 1998년에 기아차가 정통 미국식 미니밴인 카니발을 내놓으면서 우리나라의 미니밴 시대가 활짝 열릴 수 있었다.

1세대 카니발

왜건의 지붕을 높여 공간효율을 조금 높인 수준에 머물렀던 일본식 미니밴과 달리, 카니발은 승용차 플랫폼을 바탕으로 했으면서도 처음부터 거주성에 초점을 맞췄다. 1열부터 3열 좌석까지 평평하게 이어지는 바닥, 차체 양쪽에 단 대형 슬라이딩 도어, 안락한 독립식 2열 좌석을 갖춰, 국내 소비자들도 미니밴의 편리함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다.

2세대 그랜드 카니발

국내 법규와 시장 환경을 반영해 1세대 카니발은 9인승 모델, 2세대 그랜드 카니발은 11인승 모델이 주력이었지만, 부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돋보인 여러 장점은 카니발을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탄탄히 자리를 잡고 스테디셀러로 명맥을 이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아울러 카니발은 2001년부터 미니밴의 고향이라 할 미국 시장에 수출되기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 판매되고 있다.

크라이슬러 퍼시피카

세월이 흘러, 지금은 베이비 붐 세대가 노년에 접어들고 있고, 그들이 미니밴을 맞이했던 나이대는 X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차지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사회와 환경도 바뀌었고, 미니밴의 상황도 전성기 때와는 사뭇 다르다.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된 미니밴은 48만 대가 조금 넘었다. 전성기 때의 1/3 수준이며, 승용차 시장 점유율은 2.5%로 낮아졌다. 

미국에서 판매 중인 카니발(현지명 세도나)

판매 감소와 더불어 여러 브랜드가 미니밴 시장에서 발을 빼면서 현재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미니밴 모델 수는 다섯 가지로 줄었다. 이미 미국 빅 스리 가운데 GM과 포드가 2000년대 중반에 손을 뗐고, 적극적으로 시장에 뛰어들었던 일본 브랜드도 이제는 두 곳만 미니밴 시장에 남아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기아 카니발(수출명 세도나)이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카니발은 미국에서 선택할 수 있는 5개 미니밴 중 하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에도 여전히 미니밴의 절대적인 판매량은 무시할 수 없다. 다만 미니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그리고 미니밴의 이미지와 활용방식이 과거와 달라졌을 뿐이다. 1990년대 미국에서는 미니밴을 자녀와 친구들의 통학과 방과 후 활동에 활용하는 ‘사커 맘(soccer mom)’의 차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지금은 미니밴이 그런 용도로 널리 쓰이지도 않고, 그렇게 쓰려는 사람도 많지 않다.

카니발 하이리무진

국내 브랜드가 만들어 국내 시장에 팔고 있는 유일한 미국식 미니밴인 기아 카니발도 마찬가지다. 베이비 붐 세대의 나이대가 미국이나 유럽보다 낮은 우리나라에서는 여유 있는 가족용 차로 미니밴을 찾는 사람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유명 인사나 기업체의 의전용 차라는 이미지도 강해지고 있다. 

SUV 모하비와 미니밴 카니발

물론, 이전까지 미니밴이 하던 역할을 지금은 SUV가 넘겨받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SUV도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면서, 미니밴의 특징과 장점들을 참고해 꾸준히 개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SUV가 미니밴을 따라 하기 어려운 특성들은 분명히 있다. 넉넉한 공간 구성과 승하차 편의성, 자유로운 좌석 조절 및 배치 기능 등 기능적 특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SUV가 특유의 형태를 유지하는 한, 승차감과 주행특성에서 미니밴만큼 안정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웨이모는 미니밴 퍼시피카를 자율주행 테스트카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술 발전이 미니밴의 쓰임새에도 변화를 주리라는 예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자율주행 기술의 발전과 공유 모빌리티 개념의 결합이 새로운 미니밴의 중흥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구글의 자회사인 웨이모는 크라이슬러의 미니밴인 퍼시피카를 자율주행 기술 개발과 시험에 활용하고 있다. 자율주행 기술이 발전해 무인 택시가 실제로 구현된다면, 미니밴은 가장 이상적인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타다의 주력 모델인 카니발

출처타다

자율주행 실현에 앞서, 새로운 형식의 모빌리티 서비스로 각광받고 있는 라이드 헤일링(차량 호출 이용)이나 라이드 셰어링(승차 공유 또는 합승)에 쓰기에도 미니밴은 안성맞춤이다. 국내에서도 타다를 비롯해 소비자 중심의 이동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여러 업체가 가장 선호하는 장르의 차도 기아 카니발 같은 미니밴이다. 한마디로 여러 사람이 타고 내리고 이동하기에는 미니밴만큼 좋은 장르의 차가 드물다.

미니밴은 앞으로 어떻게 변신할까?

전성기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니밴의 장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니밴 역시 사회와 환경의 변화에 발맞춰 꾸준히 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니밴은 다가올 미래에 과연 어떤 기술과 매력을 담아 우리의 생활을 더 편리하고 즐겁게 해 줄까?

류청희(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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