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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으로 시작해 개성의 계단을 오르다

세피아부터 K3까지, 기아 준중형 세단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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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중형 세단과 더불어 우리나라 승용차 시장을 떠받친 굵은 기둥 중 하나가 바로 준중형 세단이다. 한때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급에 올랐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폭넓은 소비자의 취향을 고루 충족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수 시장은 물론이고, 주요 수출 시장 중 하나였고 여전히 비중이 큰 북미에서도 오랫동안 수요가 많았던 차급이기도 하다. 그래서 국내 자동차 업체들이 공통적으로 이 시장에 내놓을 차에 많은 공을 들였고, 기아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국내 자동차 시장의 변화로 지금은 준중형 세단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던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만큼 경쟁이 치열하지는 않다. 또한, ‘승용차 = 세단’이라는 국내 소비자들의 전통적 혹은 보수적 취향은 최근 들어 SUV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조금씩 희석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준중형 세단은 국내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제는 동급 시장에 경쟁력 있는 모델이 많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기아 준중형 세단은 꾸준한 인기를 이어 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소비자와 호흡하며 숙성되고 시대 흐름에 발맞춰 발전을 거듭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지금까지 기아 준중형 세단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지금의 K3에 이르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캐피탈 (1989~1996)

기아차는 공식적으로 자사가 내놓은 첫 준중형 세단을 1992년에 선보인 세피아라고 이야기한다. 그보다 앞서 1989년에 나온 캐피탈도 준중형으로 분류할 수는 있다. 다만 캐피탈은 먼저 중형 세단으로 출시된 콩코드를 바탕으로 뼈대는 거의 그대로 둔 채 치장을 간소화하고 배기량이 작은 엔진을 얹은 정도에 그친 모델이다. 게다가 콩코드는 당시 기아의 기술 제휴선이던 일본 마쓰다의 설계에 뿌리를 두었고, 콩코드를 바탕으로 만든 캐피탈도 기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 배경 때문에 당시 적잖은 인기를 얻기는 했지만 캐피탈은 기아차의 ‘적자’는 아닌 셈이다. 캐피탈은 기아차의 첫 준중형 세단 세피아가 나온 후에도 한동안 병행해서 판매되었다.

세피아 (1992~1994)

세피아는 기아차에게 의미가 큰 모델이다. 마쓰다와의 협력관계가 느슨해지기 시작하면서 독립 필요성이 절실해진 기아가 처음으로 독자 개발한 승용차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행하던 부드러운 곡면 중심의 스타일과 운전자 중심의 인테리어 디자인, 안전성을 고려한 설계와 다양한 기본 및 선택장비 등은 첫 독자개발 차이면서도 높은 상품성을 갖는 바탕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세피아는 당시 국내에서 판매 중이던 동급 다른 차들보다 좀 더 스포티하게 조율한 주행특성이 돋보였다. 승차감이 다소 가볍고 움직임이 둔하던 경쟁차들과는 달리 탄탄한 승차감과 상대적으로 민첩한 느낌을 주는 핸들링은 호불호가 갈리는 평가를 낳았지만, 특히 1.5 DOHC 엔진을 얹은 모델은 운전을 즐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호평을 얻었다.

뉴 세피아 (1994~1997)

다만 아직 많은 소비자가 편안한 승차감을 선호한다는 판단으로, 1994년 말에 페이스리프트해 나온 뉴 세피아에서는 승차감이 약간 부드러운 쪽으로 조율되었다. 뉴 세피아는 실내외 디자인도 좀 더 부드럽게 바뀌어 한층 더 완성도 높은 차가 되었다. 엔진 등 동력계와 성능은 큰 차이가 없었지만, 중형 세단 크레도스에 처음 쓰인 1.8 DOHC 엔진이 1996년에 추가되어 스포츠 세단의 가능성을 열기도 했다.

세피아를 통해 독자 모델이라는 기아차의 새로운 도전은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고, 북미와 유럽에 처음으로 기아 엠블럼을 달고 수출된 모델로 기아차 역사에 큰 획을 긋기도 했다. 세피아에서 시작된(앞서 나온 마쓰다 계열 차들부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보편적 준중형 세단에 어울리는 승차감에 살짝 스포티한 맛을 더한 주행감각은 그 뒤로 나온 기아차 준중형 세단 고유의 색깔로 이어진다. 개인적으로는 뉴 세피아가 1세대 프라이드에 이어 가족이 구매한 두 번째 차로, 10년 이상 큰 탈 없이 잘 움직이며 가족의 대소사를 함께 해 아직도 좋은 기억이 남아 있다.

세피아 II (1997~2000)

그런 맥락에서 보면 기아의 두 번째 준중형 세단인 세피아 II는 아쉬움이 컸다. 한창 준중형 세단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던 상황 속에서 기아가 겪은 어려움 때문이었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기아차는 독자 모델 개발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 것과 더불어 경영난이 점차 심해졌고, 급기야 1997년 부도 유예협약을 맺는 등 회사가 위기에 빠졌다. 5년여 만에 세대교체한 세피아 II가 출시된 것은 부도 유예협약 직후의 일이었다.

세피아 II는 경쟁 모델을 의식해 세피아보다 덩치가 상당히 커졌지만, 엔진의 성능 개선은 그리 크지 않았고 전반적인 완성도 역시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회사의 위기뿐 아니라 IMF 구제금융 신청으로 시장여건도 좋지 않았다. ‘중형처럼 기분 좋은 차’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지만, 소비자들의 불안심리와 경기위축이 겹쳐 주목 받을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스펙트라 (2000~2003)

결국 세피아 II는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한 뒤에 페이스리프트와 더불어 많은 부분을 개선하면서 스펙트라로 이름을 바꿨다. 스펙트라는 날카롭게 달라진 모습에 어울리도록 주행감각을 조율했고, 보기보다 넉넉한 실내 공간에 힘입어 흔히 이야기하는 ‘뒷심’을 어느 정도 발휘했다. 아울러 세피아 레오, 슈마의 뒤를 잇는 해치백 모델인 스펙트라 윙도 스포티한 디자인으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호응을 얻었다.

쎄라토 (2003~2008)

스펙트라의 후속으로 나온 쎄라토는 기아 준중형 세단의 새로운 시대를 열며 개성을 추구하기 시작한 모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선 고전적인 3박스 스타일을 탈피해, 앞뒤 유리가 무척 비스듬히 기운 쐐기 모양의 차체가 돋보였다. 이는 날렵한 분위기를 띠면서도 실내 공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동급 세단 가운데에서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시도였다. 아울러 동급 최초로 커튼 에어백을 적용하는 등 안전성에 대한 소비자들의 의식변화를 반영하기도 했다.

쎄라토는 동력계의 다양화를 보여주는 모델이기도 했다. 가솔린 엔진은 세제 개편을 의식해 1.5L에 이어 1.6L로 배기량이 커졌고, 2005년에는 규제완화와 함께 기아 준중형차로는 처음으로 1.5L 디젤 엔진을 얹기 시작했다. 고유가가 지속되는 당시 상황에서 쎄라토 디젤은 탁월한 연비로 장거리 주행이 많은 운전자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 나중에는 1.5L 디젤 엔진도 1.6L 디젤 엔진으로 바뀌었다.

쎄라토는 언뜻 길이에 비해 차체가 높아 보였음에도 당시 기준으로는 의외로 안정감 있는 주행 특성이 인상적이었다. 2006년 페이스리프트 때에는 나중에 ‘강남 스타일’로 월드스타 반열에 오르는 가수 싸이가 CF 모델로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포르테 (2008~2012)

2008년에 선보인 포르테는 세계적 디자이너인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한 이후 시작된 ‘디자인 기아’의 신선함을 보여줬다. 중형 세단 로체 이노베이션부터 쓰기 시작한, 호랑이 얼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 새 라디에이터 그릴 디자인을 비롯해, 간결하면서도 역동적이고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디자인이 포르테의 특징이었다. 포르테는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과거 기아 준중형 세단과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모습으로 주목받았고, 이후 가지치기 모델로 나온 해치백과 쿠페(포르테 쿱)도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좋았다.

포르테가 국내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좋은 평을 얻은 또 하나의 특징은 풍부한 편의기능이었다. 동급 최초로 버튼 시동 스마트키를 쓴 것을 비롯해 경제운전 안내 시스템, 슈퍼비전 클러스터 등 상위 모델에 기본 또는 선택사항으로 들어가는 장비들은 당시 중형차에 주로 쓰이던 것이었다. 또한, 길어진 휠베이스와 더불어 뒷좌석 공간은 더 넉넉해졌다.

아울러 상대적으로 평범한 동력계 구성에 비해 답답함이 적은 가속감과 탄탄한 주행감각으로 기아 준중형 세단 특유의 개성을 이어 나갔다. LPi 하이브리드 모델을 비롯해 GDi 가솔린 직접분사 엔진, 에코 플러스 모델의 ISG(스톱/스타트) 기능 등 경제성을 높이는 기술을 꾸준히 반영해, 폭넓은 소비자의 요구를 고루 채울 수 있었다. 4도어 세단은 2012년 후속 모델인 K3가 나올 때 단종됐지만 해치백은 이듬해 초까지 나왔다.

K3 (1세대, 2012~2018)

2012년에 기아 준중형 세단은 K3로 세대교체하며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겪는다. 영어 단어 이름을 지켜왔던 이전과 달리, 알파벳 K와 숫자를 결합한 새로운 명명체계를 도입한 것이다. 포르테에 이어 더욱 발전된 형태의 기아차 패밀리 디자인을 반영한 것도 중요한 변화 중 하나다. 이른바 ‘다이내믹 머스큘래러티(Dynamic Muscularity)’를 콘셉트로 한 K3의 디자인은 이전보다 차체 양감이 더 강조되어 탄탄한 느낌을 주었고, 실내 분위기를 좌우하는 대시보드 디자인도 다른 차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개성을 담았다.

이전 세대인 포르테에 대한 소비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전반적인 내장재를 고급화하는 한편 호평을 얻었던 고급 편의장비도 풍부하게 갖췄다. 동급 최초로 신세대 텔레매틱스 시스템인 UVO를 선택사양으로 마련하고, 통풍시트, 주차보조 시스템 등 다양한 편의사양을 폭넓게 마련했다. 2015년에 이루어진 페이스리프트 이후로도 다양한 최신 편의 및 운전보조 시스템을 더해 높은 상품성을 유지했다. 차분하고 탄력 있는 주행감각은 이전 세대 모델인 포르테와 비교해도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숙성되었다.

K3 (2세대, 2018~현재)

그리고 2018년에 이르러 K3는 2세대로 거듭나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기아차의 스포티함을 다시 정의한 스팅어를 모티브로 삼은 디자인은 이전보다 한층 더 스포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날렵한 헤드램프에는 상위 모델에 LED 주간주행등 및 풀 LED 헤드램프를 적용해 첨단 느낌을 더했다. 커진 차체와 더불어 트렁크 공간을 동급 최대 크기로 확보한 것도 중요한 변화 중 하나다. 아울러 현대기아차 그룹으로는 처음으로 스마트스트림 G 엔진과 새로 개발한 IVT 무단변속기를 적용함으로써 효율과 환경, 성능의 균형이라는 새로운 세대의 기술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첨단 운전자 보조 기술인 ADAS가 본격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지금의 K3는 의미가 크다. K3를 통해 선보인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차선 이탈 방지 보조, 전방 충돌 방지 보조 등의 기술은 이후 아랫급 모델로도 전파되어 ADAS 대중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고성능 세단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는 2019년에 출시된 K3 GT로 대응했다. 한동안 기아 준중형 세단 라인업에서 빠져 있던 고성능 모델이 K3 GT로 부활하면서 스포티한 성격은 더욱 뚜렷해졌고, K3는 선택의 폭이 넓어져 소비자에게 즐거움과 만족을 다양한 모습으로 줄 수 있는 모델이 되었다.

이처럼 기아 준중형 세단은 세피아로부터 시작해 여섯 세대에 걸쳐 거의 사반세기 동안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동안 기아차가 내놓은 모델들을 살펴보면, 독자 모델 개발이라는 도전으로 시작해, 차별화된 디자인과 스포티한 주행특성이라는 개성을 지키며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세단의 위상이 과거와 같지 않은 지금, 전통적인 세단을 선호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개념의 세단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설득할 수 있도록 기아차가 앞으로도 준중형 세단을 더욱 갈고닦아 나가기를 기대한다.

류청희(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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