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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레 손님들이 주인에게 '고맙다'고 하는 부활 빵집

조회수 2020. 8. 26. 0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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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성심당, 군산 이성당, 포항은 3대째 이곳
60년 넘게 운영한 포항 대표 빵집 시민제과
문 닫은지 13년 만에 손자가 다시 시작
추억 속 단팥빵·찹쌀떡 인기

요즘 아이들은 빵이나 케이크는 당연히 대기업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자주 가던 지역 대표 빵집이 하나쯤 있었다. 경북 포항 시민들에게는 시민제과가 그런 곳이다. 1950년대부터 포항 시내 한복판에서 빵을 팔아온 시민제과는 포항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2005년 돌연 문을 닫았다. 가족끼리 팥빙수를 시켜 먹고, 친구와 밀크셰이크에 단팥빵을 나눠먹던 시민제과는 그렇게 포항 시민들의 추억 속 한 페이지로 잊혀 가고 있었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2018년. 시민제과가 예전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창업주 고 진석률 대표의 손자 진정하(39) 대표가 다시 가게 문을 열었다.

출처: 시민제과 제공
과거 시민제과 모습(좌) 같은 자리에 다시 문을 연 시민제과(우)

-재오픈 소식 만으로도 화제였다고요.


“재오픈을 준비하면서 시민제과에 대한 시민분들의 애정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걸 느꼈습니다. SNS에 곧 다시 영업한다는 글을 올리자마자 지역 신문사에서 찾아오고 주위에서도 연락이 많이 왔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60년 가까이 쌓아오신 명성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습니다. 시민제과는 단순한 빵집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시민제과에 대한 추억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어요. 


다시 문을 열고난 뒤 가게에 있는 저를 찾아와 고맙다는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 70대 손님은 서울 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시민제과가 사라진 모습을 보고 마치 인생의 한 페이지가 사라진 것 같았다고 하시더군요. 90년대에 쓰던 시민제과 봉투를 들고 와서 저에게 악수를 청하는 할아버님도 계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시민분들의 소중한 추억이 바래지 않게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시민제과는 1949년 시민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팥을 다루는 기술을 배운 1대 진석률 대표가 단팥죽과 찐빵을 만들어 팔았다. 이후 단팥빵, 롤케익 등을 추가하면서 제과점으로 자리 잡았다. 아들인 2대 진상득 대표가 생산 공장을 짓고 가게를 키웠다. 80년대 초 당시 4층짜리 건물에 1층은 80평 규모인 대형 제과점으로 전국에 유명세를 떨쳤다. 직원도 100명에 달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시민제과가 자리한 구도심 상권이 쇠퇴하고 진 대표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결국 문을 닫았다.

출처: 본인 제공
진정하 대표(좌) 프랑스 유학시절 진 대표(우)

-원래 직장 생활을 했다고요.


“대학을 마치고 현대 글로비스 등 해운업계에서 일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제가 가업을 잇기를 바라셨어요. 재오픈 이야기를 계속 해오셨습니다. 아버지가 가게를 운영하실 때 성심당이나 이성당 같은 전국 유명 제과점과 함께 기술교류도 하시고 가깝게 지내셨어요. 이곳들은 예전처럼 계속 운영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쉬움을 느끼셨던 것 같아요. 사실 제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대기업 생활을 포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귀담아듣지 않았죠. 그런데 8년쯤 일하다 보니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에 대한 고민이 커졌어요. 무엇보다 저도 시민제과라는 브랜드가 사라지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 마음이 뜨고 나니 회사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었어요. 결국 35살에 회사를 나와 가업을 이어받을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준비 과정은요.  


“르 꼬르동 블루 한국 지점에서 제빵 과정을 수료하고 제과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습니다.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 학교인 에꼴 페랑디에서 제과 과정을 공부하고 대형 제과점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했습니다. 35살 나이에 20대 친구들과 경쟁하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5평짜리 원룸에서 지내며 매일 10시간 넘게 일했어요. 치열하게 공부한 덕분에 학교는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습니다. 2년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오픈을 준비했어요. 한국 제과점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우기 위해 6달 동안 전국 곳곳의 유명 제과점에서 연수도 받았습니다. 퇴사한지 3년 만인 2018년 원래 시민제과 건물을 리모델링해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출처: 시민제과 제공
시민제과에서 판매 중인 빵들

-시민제과에는 어떤 빵들이 있나요.


“단팥빵, 찹쌀떡 등 팥이 들어간 예전 시민제과 빵들이 가장 인기 있습니다. 여름철 베스트셀러였던 팥빙수와 밀크셰이크도 여전히 많이들 찾아주세요.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20년 넘게 일했던 베테랑 제과장인 2분이 다시 오셔서 예전 시민제과 빵들을 만들고 계십니다. 후배들에게 기술도 가르치고 계세요. 저와 젊은 제빵사들은 프랑스에서 배운 레시피를 바탕으로 요즘 유행하는 스콘·크루아상 등 새로운 빵을 개발하고 만듭니다. 현재 판매 중인 제품 종류만 100여 가지입니다."


-다른 빵집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예전 방식 그대로 빵을 만드는 것이 원칙입니다. 저희 주방에서는 항상 ‘수고로움을 당연하게 생각하자’고 이야기합니다. 공장에서 전처리한 재료는 쓰지 않아요. 국산 팥을 골라 씻고 불린 뒤 끓이는 작업을 직접 합니다. 빵에 들어갈 팥을 준비하는 데만 이틀 정도 걸립니다. 찹쌀떡 같은 경우도 직접 빻은 찹쌀을 손질해 100% 찹쌀로만 떡을 만듭니다.”

출처: 시민제과 제공
예전 방식으로 빵을 만들고 있는 장인들

-다시 시작하는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기대를 많이 해주신 만큼 실망도 크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13년 동안 고객들의 입맛과 눈높이가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특히 밀크셰이크를 기다리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아버지도 정확한 레시피를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오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밀크셰이크는 포기하려고 했어요. 그러던 중 방송사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서 예전 사진을 찾으려고 창고를 뒤지다가 아버지의 수첩을 발견했습니다. 정말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 수첩에 밀크셰이크 레시피가 적혀있었어요. 덕분에 밀크셰이크도 다시 팔 수 있었습니다. 가게 매출에 아주 효자 노릇을 하는 메뉴입니다.”

출처: 시민제과 제공
밀크쉐이크와 단팥빵(우) 과거 시민제과에서 케익을 만드는 모습(우)

-얼마나 팔리나.


“하루에 찹쌀떡은 1000개, 단팥빵은 500개 이상 팔립니다. 팥빙수는 일주일에 평균 500개는 나가는 편입니다. 시민제과가 다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에 계신 포항 출신 분들이 택배 배송 문의를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최근 온라인 판매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운영하셨던 90년대에는 팥빙수가 1달에 1만개씩 팔리곤 했어요. 그때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죠.”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민제과가 그랬듯이 제가 운영하는 시민제과도 고객분들께 소중한 추억을 선물하는 장소로 오랫동안 남고 싶습니다. 포항을 대표하는 빵을 개발하는 것도 목표 중 하나입니다. 포항을 더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고 시민분들께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시민제과를 포항의 문화유산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앞으로 더 노력해서 진짜 그렇게 불릴만한 자격을 갖춘 제과점이 되고 싶습니다."


글 jobsN 오서영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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