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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분양사업에 뛰어들었다 노숙자 된 남자, 지금은..

조회수 2020. 7. 22. 0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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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실패 후 마포대교→노숙자..100명의 죽음 지켜본 이 남자

사업실패 후 삶을 포기하기로 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마포대교에 갔다. 두 시간 동안 강물을 응시했다. 누군가 불러 뒤돌아보니 경찰이 서 있었다. 죽지도 못하고 정처 없이 걷다 영등포까지 흘러갔다. 눈앞에 노숙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물어보니 ‘밥 줄’이라고 했다. 배가 너무 고팠다. 밥을 얻어먹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줄 맨 끝에 섰다. 


2010년 그렇게 1년 반 동안의 노숙자 생활을 시작했다. 10년이 지났다. 지금 그는 뜻밖에 요양보호사로 강원도 원주에서 치매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8년 차다. 얼마 전에는 그동안 100여 명의 치매 환자들을 떠나보내며 느낀 점들을 기록한 책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를 펴냈다. 고재욱 작가(49)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출처: 본인 제공
치매 환자들을 돌보며 쓴 글들을 모아 신간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를 펴낸 고재욱 작가

-힘들었던 시절, 당시의 상황과 심정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지.


“2006년 다니던 호텔을 그만두고 주변의 권유로 빌라를 지어 분양하는 일을 했다. 건축이 전공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돈도 제법 벌었다. 하지만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터졌다. 이전보다 큰 규모의 빌라를 짓던 중이었다. 빌라는 한 채도 팔리지 않았다.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큰 빚을 졌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삶도, 사업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노숙 생활은 어땠는지.


“다리에서 내려와 밥을 얻어먹은 곳이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홈리스 센터였다. 센터에서 지내면서 노숙인 자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식판을 닦거나 천막 무료급식소를 관리하고 보수를 받는 일이었다. 그때도 늘 떠나려고 했다. 죽지도 못하고 공짜 밥 얻어먹고 있는 내 모습이 비참했다. 첫 보수를 60만 원을 받고 ‘바다를 한 번 본 뒤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인사를 할 요량으로 사무실에 가다 다른 입소자와 부딪혔다. 하필 앞니가 부러졌다. 교회에서 소개해준 치과에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비를 갚기 위해 센터를 떠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마음을 내려놨다.”


-죽음을 생각하다 정착한 그곳에서 막상 목격한 죽음은 어땠나.


“노숙인은 아니었지만, 쪽방촌에서 초여름 죽은 아내의 시신과 일주일을 보낸 남자가 기억난다. 119구급대원이 아내의 시신을 옮긴 뒤에도 남자는 아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안고 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썩는 냄새를 처음 맡았다. 사람들이 코를 막고 구역질을 했지만 난 이상하게 견딜 만 했다. 방안 가득한 죽음의 흔적과 냄새가 잊히지 않는다. 센터에 입소해 함께 지내다 뇌출혈로 죽은 한 노숙인은 화장터 내 여러 사람의 뼛가루가 한데 섞이는 항아리에 뿌려졌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죽음이었다. 잘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도 좋은 죽음이 있다는 걸 느꼈다.” 

출처: 본인 제공
고재욱 작가가 문학 작품 공모전에서 1등상인 대상을 받는 모습

-노숙 생활을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파블로 네루다의 책 ‘시가 내게로 왔다’를 읽고 시를 써봤다. 순전한 헛소리였지만 첫 행을 썼을 때 비참하고 가치 없다고 여겼던 나 스스로가 존중받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다. 자존감이 조금씩 생겼다. 글을 쓰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해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 과정’이 개최한 문학 작품 공모전에 도전해 1등 상인 대상을 받았다. 더 열심히 글을 썼다.”


-일거리를 찾아 들어간 경기도 양평 산골에서 처음 요양원 봉사를 시작했다.


“2012년 폐교에서 야영객들을 대상으로 한 장사를 도우며 지내다가 마을 교회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에서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삶보다는 죽음에 시선을 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짐만 됐던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치매를 앓고 계신 분들은 내 외모나 돈을 보고 나를 판단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한 할머니께서 목욕하는 날이 아닌데도 목욕을 시켜달라 고집을 꺾지 않으셔서 바쁜 직원들 대신 목욕을 해드렸다. 목욕 후 할머니가 내 손을 한참 잡고 고맙다고 하셨다. 다음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분들과의 만남은 언제라도 마지막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할 형편은 아니었는데 요양원 원장님이 지원을 해주셔서 자격증을 땄고 2013년부터 요양보호사로 일했다.” 

출처: 조선DB
요양원에서 한 할머니가 휠체어를 탄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요양보호사 한 명이 어떨 때는 열 명도 넘는 노인들을 돌본다고 했다. 물리적으로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입소자들이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 위해선 무엇이 지금 가장 필요한가. 


“돌보는 인원이 부족한 요양원은 기상, 취침, 기저귀 교체 시간 등을 정해놓는다. 어르신들의 신체 리듬이나 의사를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게 이유다. 요양원은 입소자들의 집이어야 한다. 일본은 입소자들이 1인 1실을 쓰고, 기저귀를 쓰지 않는다. 휠체어를 탄 채 식사하거나 TV를 보지 않는다. 어르신 200명을 직원 180명, 상주 자원봉사자 수십 명이 돌보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규모 요양원은 사회복지 법인, 지자체만 운영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일일이 비교 할 수도 없지만 한 가지만 말하자면 우리는 요양보호사가 80명만 있으면 같은 규모의 요양원을 운영할 수 있다.”


-치매 환자들을 우리 사회가 격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핵가족화, 대다수 가족 구성원이 돈을 벌어야 하는 팍팍한 현실로 인해 가족 돌봄 기능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들을 돌볼 수 있을까.


“지역 커뮤니티 케어가 꼭 필요하다. ‘어리석고 우둔하다’는 뜻의 치매라는 용어 대신 ‘인지증’이라는 표현을 쓰는 일본은 인지증 환자를 돕는 서포터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유치원생부터 노인까지 전 연령을 대상으로 치매라는 병에 대해 교육한다. 치매 어르신을 격리하는 대신 지역 사회가 함께 보듬으려고 노력한다.” 

출처: 본인 제공
치매 환자들을 돌보며 쓴 글들을 모아 신간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를 펴낸 고재욱 작가

-치매 환자들을 돌보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은 책을 펴낸 계기는.


“보잘것없어 보일지도 모를 그분들의 하루를, 조각난 기억을 따라가다 보니 내 마음의 오랜 상처도 많이 아물었다. 그분들이 전해준 마음의 약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 이 책을 썼다. 꽃은 식물에게 씨앗을 뿌리는 수단이다. 내가 돌보는 어르신들도 곧 꽃잎을 떨구고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이 뿌린 씨앗은 우리 마음을 통해 이어지고 피어날 것이다. 결국 그분들이 꽃같이 돌아오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길 위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살다 보면 누구나 쓰러질 수 있다. 다만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희망은 늘 작은 들꽃처럼 저 귀퉁이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글 jobsN 고유선  

jobsn_book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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