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회사에 빨간색 신고 오느냐"는 말에 말문이 턱
“정시퇴근, 당연한 권리” vs “책임감 부족”
회식·복장·업무수행 방식 두고 갈등 겪어
대한상의, “기업 문화 변해야 할 때”
오후 6시 10분. 한 중견기업 수출팀 막내인 정씨는 업무 일지를 쓰고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부장은 “저녁 먹고 와서 마저 합시다”라고 말한 뒤 식당으로 향했다. 그 말에 차장부터 대리·주임까지 따라나섰다. 퇴근하려던 정씨도 가방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4월8일 직장 내 세대 갈등과 기업문화 종합진단 보고서를 발표했다. 정시퇴근은 직장 내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 직장 윗세대인 40·50대는 정시퇴근 하는 젊은 직원들을 두고 “일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20·30대는 맡은 일을 다 했는데 야근을 하라는 건 비합리적이라고 여긴다. 보고서와 직장 내 갈등을 겪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직장 내 갈등 상황을 구성해봤다.
◇‘업무시간=책임감’, ‘회식=화합’에 동의할 수 없는 아랫세대
“야근을 강제하고, 출근도 일찍 시킬 거면 근로계약서는 왜 쓰는지 모르겠다.” 정씨는 매주 2~3일은 야근을 한다고 말했다. 팀 내에서 정시에 퇴근하면 할 일이 없다거나 일을 열심히 안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퇴근하려는 정씨에게 차장이 “요즘 한가한가 봐”라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다. 생각 자체가 다르다는 걸 깨달은 정씨는 그 후로 상사들이 많이 남아있는 날은 앉아서 시간을 때우다 온다.
퇴근뿐 아니라 출근 시간도 문제였다. 정씨의 상사는 출근 시간보다 40분 먼저 오는 다른 팀 사원을 언급하며 본받으라고 했다. 문제는 수당이다. 야근 수당과 달리 조기 출근 수당은 따로 없다. 또 일찍 온 만큼 먼저 퇴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윗세대는 “9시 출근은 9시까지 오라는 게 아니라 9시에 업무를 시작하라는 뜻”이라는 입장이다.
회식도 빼놓을 수 없는 갈등 소재다. 50대 최씨는 회식이라면 이제 질렸지만, 팀의 화합을 위해 회식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씨가 속한 부서는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에 회식한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편해졌다는 게 최씨 생각이다. 그는 “신입사원 때는 매주 회식 자리에 불려 다니느라 바빴다”고 말했다. 매주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참여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
20·30대는 ‘회식=화합’ 이란 공식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일방적으로 얘기를 듣기만 하는데 어떻게 화합의 자리냐는 것이다. 아랫세대는 회식 자리는 업무의 연장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씨는 “매일 점심도 같이 먹고, 얘기도 하는데 회식이 굳이 또 왜 필요한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했다.
◇“옷은 단정하게 입어야” vs “단정함에 기준이 어디 있냐”
강씨는 며칠 전 새로 산 빨간색 구두를 신고 갔다가 회사에서 하루 종일 눈치를 봤다. “한창 바쁠 시간에 차장님께서 부르셨어요. 시킬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따라 나갔더니 업무가 아닌 신발 얘기를 꺼내셨어요. 놀러 온 것도 아니고 회사 올 때는 단정하게 하고 오라고 하시는데 말문이 막혔어요. 구두, 그것도 하이힐도 아니고 단화를 신었는데 색이 튄다고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나 싶었죠.”
윗세대는 “복장만 봐도 마음가짐이 보인다”고 말한다. 옷차림도 꼼꼼하게 못 챙기는데 일을 잘 처리하겠냐는 것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다. 아랫세대는 단정한 옷차림을 하라는데 기준이 어디 있냐고 반발한다. 강주임은 “보는 사람 눈에 거슬리는지 아닌지가 단정함의 기준”이라고 꼬집었다. 집 앞 마실 가듯 편하게 입고 오는 동료·선배들도 있는데 단정함을 따지면 그게 더 문제라는 게 강씨 주장이다.
사무실에서 이어폰을 끼고 있다고 혼난 적도 있었다 노래를 들으면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게 팀장 생각이었다. 강씨는 “본인한테 맞는 업무수행 방식이 있는데 왜 자신의 기준에서만 판단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바뀌지 않는 조직 문화가 문제
대한상의는 직장 내 갈등의 표면적 이유가 성향 차이라고 봤다. 밀레니얼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태어난 세대)는 집단주의 성향이 약해지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졌다고 분석했다. 실제 대한상의가 직장인 약 1만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에서 세대 간 성향 차이가 드러났다.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할 수 있다’는 항목에 20·30대 35.2%만이 동의했지만, 40·50대는 66.7%가 동의했다. 대한상의는 성향 차이에 기초해 서로를 ‘꼰대’, ‘요즘 애들’로 본다고 했다.
근본적으로는 바뀌지 않는 조직 문화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조직 구성원과 조직을 둘러싼 외부 환경은 변화했는데, 기업문화는 그대로기 때문이다. 대한상의는 직장 내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가족 같은 회사에서 프로팀 같은 회사로 조직 전반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프로팀의 운영 공식인 ‘선수가 팀을 위해 뛸 때, 팀은 선수가 원하는 것을 준다’는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5R’을 제시했다. 가치 있는 헌신(Re-establish)·상호존중(Respect)·성과와 결과(Result)·보상과 인정(Reward)·훈련과 성장(Reboot)이다. 조직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에서 가치 있는 헌신 문화, 수직적 문화가 아닌 수평적 상호존중 문화, 관계와 서열이 아닌 성과와 결과로 말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보상과 인정 체계를 확실히 하고, 입사 후에도 훈련과 성장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글 jobsN 박아름
jobarajob@naver.com
잡스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