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대들이 유서까지 써가며 영정사진 찍는 사연

조회수 2020. 9. 24. 14: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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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영정사진 찍기 좋은 나이네요"

20~30대, 앞으로 나아갈 용기 얻으려 영정사진 찍어

래퍼 김하온, 방송인 유재석, 축구선수 안정환 등

‘젊은이’ 영정사진 찍는 24살 사진작가 홍산씨


“참으로 감사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왔던 것처럼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최근 한 방송에서 20살인 래퍼 김하온이 영정사진을 찍기 전 쓴 유서다. 방송인 유재석은 신인 시절 처음 샀던 양복을 입고 메뚜기 탈을 쓴 채 카메라 앞에 섰다. 축구선수 안정환은 유서를 쓰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끝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영정사진. 제사나 장례를 지낼 때 위패 대신 쓰는 사진을 말한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얼굴이 담겨 있다. 영정사진은 보통 죽음이 가깝다고 느껴질 때 찍는다. 그런데 최근에는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20~30대도 영정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영정사진을 찍는 청년들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고 한다.


청년들을 대상으로 영정사진을 찍는 사진작가가 있다. 김하온, 유재석, 안정환 등의 영정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진작가 홍산(24)씨를 서울 마포구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출처: 본인 제공
사진작가 홍산 씨.

-자기소개를 해달라.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 홍산이다. 20~30대 청년들의 영정사진을 찍고 있다.”


홍 작가는 고등학교 때부터 취미 삼아 사진을 찍었다. 미디어아트에 관심이 생겨 2014년 서강대학교 아트앤테크놀로지과에 들어갔다. 대학교 때 카메라 장비를 하나씩 사고 사진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진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2018년 초 프로젝트인 ‘생의 굴레를 내던져 자신을 마주하는 영정사진을 찍습니다’로 청년들의 영정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청년들의 영정사진을 찍게 된 이유가 있나.


“영정사진은 보통 죽음을 앞두고 찍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삶과 멀리 않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청년은 반복되는 일상을 산다. 매일 아침 일어나 학교에 가고, 회사에 간다. 공부와 일을 하고 권태로운 삶을 산다. 이러한 생활을 한 번쯤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장 내일 죽는다면 지금과 같은 삶을 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현실에 타협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사는 것 같았다.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해보는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 영정사진이라는 도구로 권태로운 삶의 굴레를 끊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에 대한 각성의 계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출처: 홍산 작가 제공
영정 사진을 찍기 전에 쓰는 유서.

-사진을 찍기 전에 손님들이 유서를 쓴다고. 이유가 있나. 


“사진만 드리고 끝나는 것보다 경험을 드리고 싶었다. 영정사진을 찍기 전에 자신을 되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사진을 찍기 전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상황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다.


빨리 쓰는 사람도 있고 1시간 정도를 쓰는 분도 있다. 유서를 쓰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각자 마음속에 응어리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영정사진의 배경이 다 검은색이다. 이유는.


“사람의 표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색인 것 같다. 오롯이 얼굴에만 집중할 수 있다.”


-사진을 찍으며 우는 사람도 있나.


“우시는 분도 간혹 있다.”

출처: 홍산 작가 제공
영정 사진을 찍는 청년들.

-청년들이 영정사진을 왜 찍는 것 같나.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동안 못 봤던 형식이니까 호기심을 가지는 것 같다. 또 영정사진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스스로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것 같다.


‘청년’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있다. 청년이라면 어떤 실패를 해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사회적인 인식이 있다. ‘나이도 어린데 뭐가 걱정이냐’ ‘실패해도 젊으니까 또 하면 된다’라는 식이다.


많은 청춘이 사회가 맞춰놓은 기준에 맞춰 살기 위해 애쓴다. 학점, 자격증, 학교와 회사의 사회적 인식 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좌절감, 박탈감, 무력감을 많이 느끼는 것 같다.


영정사진을 찍으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또 삶의 마지막을 마주한 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한다.”


-스스로 본인의 영정사진을 찍어본 적 있나.


“있다. 내가 찍고 보정해서 그런지 특별히 색다른 느낌은 없었다. 그래도 삶의 흔적을 남겨놓는 것 같아서 좋았다.”


-청년들의 영정사진만 찍나.


“아무래도 미디어나 SNS를 보고 찾아오는 20~30대가 많지만 요즘에는 중장년층분도 많이 오신다. 어머니를 모시고 온 분도 있다.


노인분들의 영정사진을 찍기도 한다. 작년 10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함께 진행한 어르신 문화프로그램인 문화로청춘 ‘당신의 지금, 우리의 얼굴’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도 했다. 서울시 문화센터를 돌아다니며 어르신의 영정사진을 찍어드렸다.”


-영정사진을 찍을 때 노인과 청년의 모습이 다른가.


“다르다. 어르신분들이 더 즐거워 하신다. 사진 찍혀본 경험이 많지 않다. 사진을 찍는 게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다. 집에서 가장 예쁜 옷을 가져오신다. 평소엔 안 하던 화장도 한다. 소품도 준비해 온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예쁘게 나오고 싶어 한다.


누군가 사진을 찍으면 뒤에서 사진 찍는 것을 지켜보신다. ‘옷깃 좀 올려봐’ ‘더 미소 지어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다들 신나하신다. ‘사진을 언제쯤 볼 수 있나’ ‘주름 좀 지워줘라’ 등의 말씀도 하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이 있나.


“문화로청춘 프로젝트 당시 서울시 서대문구 문화센터에서 영정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당시 한 할머니가 인형을 들고 영정사진을 찍는다고 하시더라.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생각하며 만든 인형이라고 하셨다. 인형을 안고 찍으시더니 펑펑 우셨다. 마음이 아팠다.”

출처: 홍산 작가 제공
래퍼 김하온, 방송인 유재석, 축구선수 안정환의 영정 사진.

-지금까지 몇 명의 영정사진을 찍었나. 비용이 궁금하다.

“프로젝트 ‘생의 굴레를 내던져 자신을 마주하는 영정사진을 찍습니다’를 진행하면서 20~30대 청년들 200명 이상의 영정사진을 찍었다. 문화로청춘 프로젝트 때 노인분들도 200명 이상 찍어드렸다.


영정사진 촬영 비용은 문의해오는 분께 개인적으로 알려드린다. 각기 다른 사진 4장을 드린다.”


-본인에게 영정사진이란.


“영정사진 프로젝트로 이름을 알렸다. 개인적인 커리어에 도움이 많이 됐다. 앞으로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도와주는 디딤돌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영정사진을 찍을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나.


“사진은 언어라고 생각한다. 소통이 중요하다. 친밀감이 있는 상태에서 찍는 것과 아닌 상태에서 찍는 것은 천지 차이다. 내면의 이야기를 끌어내 찰나의 순간을 잘 담아내고 싶다. 그래서 무겁지 않고 편한 분위기에서 찍으려고 한다. 

홍 작가는 올해 초부터 광고회사에 다니며 사진작가 일을 병행하고 있다. 영정사진 프로젝트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사진작가 일을 본업으로 삼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사진을 일로 하니까 스트레스가 되더라고요. 사진을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로 남겨 놓고 싶었습니다. 제가 사진을 즐겁게 찍어야 찍히는 분도 좋은 에너지를 받아 간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사진을 통해서 사회적 약자를 조명하고 싶습니다.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사람들에게 조명을 비춰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영정사진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때까지 계속 찍고 싶습니다.”


글 jobsN 임헌진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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