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다가갈 수 없던 곳, 여긴 대표적 '홍등가'였습니다

조회수 2020. 9. 24. 15: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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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등가에 위치한 서점입니다"
청년 예술가 7명 전주 선미촌에 서점 물결서사 열어
문화예술 향유 공간이자 지역 사랑방으로 변신

전북 전주의 대표적인 홍등가인 선미촌이 변화하고 있다. 전주시가 선미촌을 문화예술마을로 바꾸는 재생사업인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다. 시는 2020년까지 성매매 업소가 밀집한 서노송동 일대를 문화예술복합공간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으로 옛 성매매 업소 5채를 사들였다. 그중 1채에 청년 예술가 7명이 서점 ‘물결서사’를 열었다. 물결서사 임주아(30) 대표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서점을 의인화해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해 소개한다.

출처: 물결서사 제공
서점 물결서사.

◇성매매 업소, 청년 예술가를 만나 다시 태어나다 


1960년대부터 나는 성매매 업소로 사용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았고 떠났다. 살 냄새, 땀 냄새가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러다 2018년 12월 모든게 바뀌었다. 시인, 한국화가, 서양화가, 성악가, 영상작가, 사진가 등 청년 예술가 7명이 새 주인이 됐다. 이들은 전주시에서 나를 임대받아 폐허같던 공간을 리모델링해 서점 ‘물결서사’로 바꿨다. 60여년 만에 새로 태어난 셈이다.

출처: 물결서사 제공
리모델링 전 모습.

사실 내가 있는 선미촌은 몇 년 전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2017년부터 전주시가 선미촌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바꾸는 기획전시를 시작하더니, 본격적으로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나섰다. 하지만 여전히 내 주변에는 약 20곳의 성매매 업소가 불을 밝히고 있다. “얼마냐?”고 물으며 외국인 노동자들이 찾아올 정도다. 시내 한복판에 있지만 홍등가라는 인식 때문에 많은 시민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곳이 바로 우리 동네, 선미촌이다.


그럼에도 나의 주인들은 다른 곳이 아닌, 선미촌을 택했다. 선미촌이라는 특수한 공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는 이 공간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곳을 기록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몇 명은 기획전시에 참여했던 작가들이고, 또 다른 몇 명은 전시를 적극적이고 관람했던 작가들이었기에 선미촌이라는 공간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공간에 예술가들이 가서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하자는 생각뿐이었다.

출처: 물결서사 제공
물왕멀팀원 중 한 명인 최은우 작가가 그린 물왕멀팀 캐릭터.

◇정기적으로 찾아와 책 기증하시는 분도 있어


나는 문학, 음악, 미술, 영화, 연극, 디자인 등 예술 관련 서적을 파는 서점이다. 처음 영업을 시작하고 나서 하루에 손님이 단 1명뿐인 날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를 찾는 손님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날마다 다르지만, 단체 견학을 오는 날에는 30~40명이 한 번에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또 감사하게도 거의 모든 분이 돌아갈 때 책을 한 권씩 손에 들고 가신다. 나처럼 작은 서점이나 대형 서점의 공통적인 고민이 있다면 바로 많은 사람이 책을 구경만 하고 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책은 사람들의 손을 타면 탈수록 닳을 수밖에 없어 결국 책은 안 팔리고, 상하기만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우리 서점을 찾은 사람들은 책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골목골목 어렵게 찾아온 만큼 나라는 공간을, 서점 물결서사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

출처: 물결서사 제공
서점 물결서사 내부.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꼭 나를 찾는 아주머니도 계신다. 다른 동네에 사시는 분인데 항상 빨간 헬멧을 쓴 채, 빨간 오토바이를 타고 나를 찾아오신다. 책 끈으로 묶은 책 꾸러미 두 묶음을 들고 와 나에게 기증하신다. 기증받은 책은 책방 내 조그만하게 마련된 공유 책방에 진열된다. 공유 책방에 있는 책들은 자유롭게 빌려갈 수 있고, 1000~4000원 대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도 있다.

출처: 물결서사 제공
빨간 오토바이 아주머니와 공유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주민들.

빨간 오토바이 아주머니 외에도 다행히 많은 주민이 나를, 서점 물결서사를 좋아해 주신다. 사실 이전부터 주민들이 동네에 책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서점이라는 공간을 원했었다. 그동안 선미촌에 살면서도 동네가 부끄러워 이곳에 산다고 말하지 못했던 분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런데 내가 생기고, 낭독회나 음악회를 하는 등 눈에 보이는 변화가 생기니 많은 분이 응원해주신다. 


그렇게 나는 서점이자,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거듭났다. 2019년 9월 30일에는 내 옆집에 사는 만신(여자 무당을 높여 이르는 말) 김오순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이 외에도 나는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공간으로도 쓰인다. 시인을 초청해 시 낭독회를 하거나, 예술을 주제로 워크숍과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한다. 앞서 6월에는 물왕멀길에서 나고 자란 젊은 성악가가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이처럼 나의 주인들은 내가 젊은 예술인들의 무대 같은 공간이 되어줬으면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서점 물결서사는 주민들에게, 책과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젊은 창작자들에게 항상 열려있는 공간이다.

출처: 물결서사 제공
물결서사에서 진행한 프로그램인 김오순의 인생 이야기와 박준 시인 낭독회.

◇선미촌에서 보고 느낀 것 토대로 연재물도 올려


물왕멀2길 9-6. 내 주소이자, 내 이름을 물결서사로 지은 이유이다. 한자로는 수왕촌인데, 물이 좋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선미촌은 물과 관련이 깊은 동네다. 많은 이야기가 구전돼 내려오는데, 마을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왕이 마시던 우물이 있던 마을이라는 이야기다. 주인들은 물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물결이라는 단어에 서점을 뜻하는 오래된 말인 ‘서적방사(書籍放肆)’의 줄임말인 서사를 붙여 내 이름을 지었다. 서사는 이야기라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해, 작품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예술가들이 차린 서점의 이름으로 물결서사가 확 와닿았다고 한다.

출처: 물결서사 제공
물결서사 주소와 멀리서 본 외관. 파란 지붕이 물결서사다.

나의 주인이자, 7명의 청년 예술가들은 사람들이 나를 “물결서사에 가면 남다른 책과 이야기가 있어”라고 기억할 수 있는 책방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또 물결서사를 단순한 서점이 아닌 선미촌이라는 공간을 기록할 수 있는 매개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이들은 돌아가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선미촌에 관한 연재물을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 SNS에 올리고 있다. 선미촌에서 서점을 운영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토대로 시, 그림, 사진 등 창작물을 매일 게재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이 같이 창작과 기록을 통해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과 여성들, 동네주민들의 인터뷰를 모아 책을 출간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출처: 물결서사 제공
물결서사 연재물.

“전주에서 30년 넘게 살면서 이 거리를 처음 걸어본다”, “물결서사를 보기 위해 서울에서 전주까지 내려왔다”고 말하던 손님들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성매매 업소들이 자리 잡았던 탓에 이곳은 그냥 올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로 인해 다른 지역 사람들, 타지의 젊은 사람들, 또 전주에 살면서도 이곳에 한 번도 발 딛지 못했던 사람들이 선미촌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뿌듯하다. 내가 오랫동안 이 공간을 이롭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서점으로,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길 바란다.


글 jobsN 박아름 인턴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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