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침침해 병원갔더니 더는 앞을 못 볼거라고 하더라고요

조회수 2020. 9. 24. 15: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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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아닌 노래로 세상을 바라보는 가수 '오하라'입니다
시각장애인 가수로 4년째 무대 서고 있어
36세 망막 색소변성증 진단 받아
희망과 미래에 대해 노래하는 가수로 남고 싶어

“시력을 잃은 뒤 기회가 닿아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섰던 적이 있어요. 무대에 오르기 전 진행자께서 ‘오하라씨 노래를 들으러 온 사람들이 저 멀리까지 서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떨렸지만 ‘일단 한번 나가보자’고 스스로 되뇌면서 무대에 올랐던 기억이 있네요. 이후 사람들 앞에서 희망에 대해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하라(50)씨는 나이 46세에 첫 앨범을 낸 ‘늦깎이’ 신인가수다. 2015년 앨범 ‘오하라의 행복한 이야기’를 낸 것을 시작으로 2018년엔 2집 앨범 ‘별빛인생’을 발매했다. 그는 여느 가수들처럼 앨범을 내고 공연도 다니지만 무대에 섰을 때 관객이나 현장을 눈으로 담아낼 수 없다. 대신 소리로 관객과 소통하고 피부로 현장의 분위기를 느낀다. 두 눈이 보이지 않는 1급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오른쪽 눈은 완전히 실명이 돼 앞을 볼 수 없다. 왼쪽 눈은 간신히 빛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36세에 갑자기 찾아온 칠흑 같은 어둠

출처: 오하라씨 제공
가수 오하라씨.

어둠은 갑자기 찾아왔다. 후천적 시각장애인으로서 36세에 시력을 잃었다.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던 여름의 어느 날, 평소처럼 딸아이와 함께 낮에 배드민턴을 치러 밖에 나갔다. 이상하게도 눈이 침침하고 어두워 배드민턴 채를 들고 그저 허공만 쳐다봤다. 피곤해서 시력이 떨어진 줄로만 알았지만 시야마저 점점 좁아지자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가자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 ‘망막 색소변성증’ 판정을 받았다. 망막의 기능이 저하돼 회복될 수 없는 난치병이었다.


“병명을 들었을 때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았어요. 끝없는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지는 느낌이었죠. 한평생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앞을 못 볼 걸 생각하니까 그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더라고요.”


평범한 주부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였던 오씨는 실명할 것이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아이들을 떠올렸다. 당시 자녀들은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2학년생.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앞을 볼 수 없는 엄마가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두 자녀 앞에서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고 아이들의 위로는 오히려 오씨에게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은 오히려 저를 위로했어요. ‘우리가 엄마의 눈이 되어줄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런데 제 존재 자체로 아이들의 족쇄를 채우는 느낌이었어요. 이렇게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겠다 싶었죠.”

출처: 오하라씨 제공
오하라씨는 36세에 시력을 잃었다. 오씨의 인생은 갑작스레 찾아온 망막 색소변성증으로 인해 크게 변했다.

망막 색소변성증 판정 이후 오씨의 인생 자체도 빛을 잃는 듯했다. 잇단 악재가 겹쳤다. 우울증이 찾아왔고 3번의 극단적 시도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남편과 이혼을 했다. 36년간 밝고 환한 세상 속에서 살아왔지만 갑자기 어둠 속에 갇혀 지낸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집 안을 걸어 다닐 때면 허구한 날 벽에 부딪혔고 밥을 먹을 때면 음식을 제대로 집지 못해 흘리는 일이 예사였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오씨는 가족한테 짐이 되기 싫다는 생각에 남편과 헤어졌다.


이렇게 계속 살 바엔 빨리 세상을 뜨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극단적 시도를 한 이후 병원에 실려갔다. 오씨의 상태를 본 의사는 이렇게까지 깊게 상처를 낸 것도 마음이 독해야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다시 독하게 살아보라는 권유의 말을 건넸다.


“제 몸에 상처를 입혀가면서까지 가족들과 부모님한테 큰 상처를 줬죠. 마음대로 태어난 것이 아닌 이상 마음대로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없더라고요.”


앞을 볼 수 없지만 내일을 꿋꿋하게 살아가자고 결심하게 된 건 머릿속을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 한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 내일 아침을 계획하기보단 또다시 삶의 끝을 기약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정말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됐을 때 가장 후회할 일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답은 ‘나 자신을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이나 아이들한테 잔소리하지 말고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해줄 걸 후회했어요. 그런데 마음에 가장 아프게 꽂힌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 자신이었죠.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고민했잖아요. 미안하다는 생각과 함께 스스로를 아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염없이 울면서 제 자신한테 약속했죠. 이제부턴 날 더 많이 사랑해주겠다고.”


◇’안마사’ 오하라에서 ‘가수’ 오하라로

출처: 오하라씨 제공
오씨는 전국노래자랑 참가 이후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스스로를 더 아껴주자고 마음먹은 오씨는 자신을 가둬 놓던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계획을 짰다. 직업을 가져야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다른 사람한테 의존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시각장애인의 재활을 돕는 수련원에 입학해 안마사 국가 자격증을 따기 위해 2년간 공부했다. 안마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후 취약계층 노인과 장애인의 건강증진을 돕고 시각장애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부가 일부 지원하는 ‘안마 바우처’ 사업장에 취업했다. ‘안마사 오하라’로 살면서 인생 2막이 시작된 셈이었다.


오씨는 안마사로 일하면서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줬을 뿐 아니라 마음까지 치유해줬다. 다름이 아니라 노래를 통해서였다. 오씨는 안마를 받으러 온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친해졌다. 마음이 외로운 사람들이 많았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오씨는 그들이 옛 추억이 묻어 있는 노래에 향수를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안마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손님과 소통하는 것에 가치를 뒀던 오씨는 노래를 직접 익혀 사람들에게 불러주곤 했다. 러시아에서 한국을 온 손님한테는 러시아어 노래를 불렀고 시를 읊어주는 날도 있었다.

출처: 오하라씨 제공
무대에 선 오하라씨.

사람들 사이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는 안마사이자 가수로 통했던 오씨에게 하루는 한 손님이 다가와 새로운 소식을 알려줬다. 2014년 초 경기도 오산시에서 송해씨가 진행하는 KBS ‘전국노래자랑’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손님은 노래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라며 오씨한테 대회에 참가해 보라고 제안했다.


“처음엔 전국노래자랑에 나갈 생각이 없었어요.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제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다른 손님들도 제가 대회에 참가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많은 분들께서 권유해주셔서 대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대회 당일 현장을 찾은 참가자들 수만 500명이 넘었다. 예심이 이뤄지는 장소였던 학교 체육관엔 약 1000명의 인파가 몰렸다. 본선에서는 15명만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오씨는 참가에 의의를 두며 무대에 올랐다. 참가 곡은 손님들의 추천을 받아 연습한 가수 조수미의 ‘나 가거든.’ 예상보다 사람들 반응이 좋았고 본선을 넘어 최종 15인 안에 들었다. 녹화 당일, 조씨는 상을 타고 싶다는 생각보다 방송을 볼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15팀의 무대가 모두 끝난 후 시상을 기다리는데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오하라씨가 최우수상을 탄 것이었다.

출처: 오하라씨 제공
오하라씨는 동기부여 강사로도 일하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삶의 희망을 전한다.

“운 좋게 예심을 통과하고 본선까지 나간 후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비록 앞이 보이진 않았지만 무대 위에서 노래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첫 순간이었죠.”


방송이 나간 후 오하라씨한테는 각종 관심이 쏟아졌다. 현장에서 공연을 봤던 오산 시민들뿐 아니라 텔레비전을 통해 무대를 접한 각지 사람들까지 ‘노래에 열정을 지닌 시각장애인’에 관심을 가졌다. 왜 앞을 보지 못하게 됐으며 어떻게 노래를 배운 것인지 등에 대해 궁금해했다. 오씨로부터 용기와 희망을 얻고 싶다는 사람들의 요청도 들어왔다. 이후 동기부여 강사로 여러 기관에 강연을 나가기 시작했다. 법무연수원, 인재개발원 등을 방문해 시각장애인이 됐을 때 몸과 마음이 아팠던 일,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일 등에 이야기하면서 이 모든 경험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냈다고 말했다.


“강연을 나갈 때마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살다보면 힘든 일이 생길 수 있지만 주저앉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폭풍우 같이 힘든 일이 찾아와도 이때 주저앉아 포기하면 안 돼요. 아름다운 무지개가 언젠간 꼭 뜨기 때문입니다.”

눈이 아닌 노래로 세상을 바라보는 가수 ‘오하라’입니다

◇희망에 대해서 노래하는 가수 되고 싶어


가수로서 앨범을 낼 수 있는 기회도 찾아왔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노래 강사 겸 작곡가는 오씨에게 자신이 만든 노래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학창시절 음악 시간에 노래를 배웠던 것 빼고는 음악을 전문적으로 접한 적이 없어 앨범을 내기엔 실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악보를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씨는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비용 부분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녹음할 때 공간 대여 비용이 많이 들었고 1집 앨범을 낸 직후에는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렸다. “앨범을 만드는 전 과정 내내 돈이 가장 큰 문제였어요. 작사, 작곡 비용도 큰 난관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추가 비용을 지급해야 했기에 부담이 됐습니다. 앨범을 내고 나서도 빚에 시달렸죠. 가수 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안마사 일을 해야 되나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출처: 오하라씨 제공
오하라씨는 노래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댜.

하지만 현실적인 고민 속에서 주변 사람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다. 재활 교육원에 다니면서 우연히 만나 친해진 한 남성은 오씨의 눈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오씨는 이 남성과 2014년에 재혼했다. 직장을 그만 두고 오씨의 매니저 역할을 담당하는 남편은 상황이 힘들 때면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당신 손을 잡고 고맙다며 나도 힘내겠다는 사람들을 생각해봐”라고 말해줬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가수 김선주씨는 아무 조건 없이 오씨에게 자신이 작곡한 곡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오씨가 어려운 형편임을 알고는 앨범 작업에 필요한 것들을 지인에게 부탁했다. 그 결과 오씨는 2018년에 2집 앨범 ‘별빛 인생’을 냈다. 이후 가수 오하라씨의 노래와 무대를 찾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신곡을 들고 방송에 출연하는 등 사람들 앞에 더 자주 설 수 있게 됐다. 가수 주현미씨와는 콜라보레이션 무대에 함께 서 가수로서 경험도 넓혀나갔다. "활동 초기엔 절 찾는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이 일을 포기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일이 점점 더 잘 풀렸죠. 더 많은 사람들한테 희망에 대해서 전할 수 있어 기쁩니다."


가수 오하라씨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단 하나다. “가수로 일하면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어요. 하지만 전 제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노래를 통해 희망을 전하는 가수로 남을 예정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는 라디오 DJ가 돼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 목소리를 전하고 싶어요. 이런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날 더 많이 사랑하고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하면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답을 찾고 싶습니다.”


글 jobsN 신재현 인턴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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