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격투기선수이기 전에..38살 파이터의 본업은?

조회수 2020. 9. 24. 15:5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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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 앞둔 파이터가 우승소감으로 한 말 "소방관 여러분 힘내세요"
소방관 파이터 신동국
연 평균 2000번 출동…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앓아
충주서 원주로 격투기 배우러 다니며 상처 극복

"가족과 경기 준비를 위해 함께 땀 흘린 팀원들 그리고 전국에서 보고 있을 소방 동료를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한다. 패배할지언정 나약한 모습은 절대 보이지 말자. 나는 격투기 선수이기 전에 소방관이다."


케이지(로드FC 경기가 펼쳐지는 장)에 오를 때마다 속으로 외우는 주문입니다. 후회 없는 경기를 하기 위한 마음가짐으로 링 위에 오르길 4번. 3승 1패의 전적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제게 중요한 건 승리가 아닙니다. 수면제와 술에 의존하던 저를 밑바닥에서 일으키고 동료들에게도 자긍심을 줄 수 있게 하는 경기 자체가 소중하죠. 소방관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링 위에 오르는 저는 12년 차 소방관이자 로드FC 선수 '소방관 파이터' 신동국(38)입니다.

출처: 본인 제공
신동국 소방관이자 로드FC 파이터. 공무원의 스포츠 활동은 소속기관장 승인 하에 출전할 수 있다.

사고 현장 목격하고 소방관으로


제가 소방관을 꿈꾼 건 2007년입니다. 아버지와 시내를 가던 중 트럭 전복 사고를 목격했습니다. 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현장으로 달려가셨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끔찍한 사고가 벌어지자 발이 얼더군요. 결국 아버지를 도왔고 곧 소방관들이 도착해 사고자를 구조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 소방관 시험 준비를 시작했죠.


1년 동안 공부에 매진해 2008년 충북소방구조대에 합격했습니다. 충북 광역 119 특수 구조단 수난 구조팀 소속으로 화재 구조는 물론 수난 구조 특화 선박 조종, 실종자 수색 및 인양 등을 맡았죠. 소방관으로 임관 후 주변에 화재, 교통사고가 자주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하루 평균 5~6번 출동, 연평균 2000번 정도 나갑니다.


이렇게 많은 현장을 다녔지만 발령 후 첫 출동이 잊히지 않습니다. 당시 석산에서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던 작업자가 바위 더미에 기계와 함께 매몰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구조 작업을 통해 훼손된 시신을 직접 수습했죠. 생전 처음 보는 참혹한 사고 현장에 충격이 컸지만 소방관이 되는 관문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굳게 하였습니다.

출처: 본인 제공
평소 소방관으로의 모습. 신동국 소방관은 2009년 전국소방관경기대회 전신인 전국 소방관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약과 술에 의지


근무한 지 5년차가 됐을 때 몸에 이상을 느꼈습니다. 자려고 누우면 끔찍했던 사고 현장이 떠오르고 그 모습에 가족과 제 모습이 투영되어 나타났습니다. 잠을 설쳐 업무 능력도 떨어지고 예민해지더군요. 결국 신경정신과를 찾아갔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심신이 약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병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습니다. 그 후 약을 먹어야지만 잠들 수 있었죠. 갈수록 약이 듣지 않는 날도 많아져 술에 의지했습니다. 밥을 먹을 때, 잠들기 전 항상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 저를 지켜보는 아내도 같이 힘들어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며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라고 권했습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어릴 때부터 동경했던 종합격투기가 떠올랐습니다. 나이도 많고 해본 적도 없던 스포츠지만 술에서 벗어나고자 바로 원주에 있는 체육관을 찾아갔습니다. 소방훈련으로도 힘든데 충주에서 원주까지 운동하러 오니 관장님도 처음엔 미쳤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PTSD를 벗어나고자 하는 제 의지를 꺾을 순 없었습니다. 그렇게 2016년 36살 종합격투기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소방관은 3교대로 근무를 합니다. 체육관 등록하고 나서 퇴근 후 그리고 비번인 날에는 빠지지 않고 원주로 가서 3시간씩 운동합니다. 운동이 힘든 날도 있었지만 여기서 멈추면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생활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식단 관리를 위해 술도 끊고 격한 운동을 하니까 잠도 잘 잘 수 있었죠. 아마추어 대회에도 출전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아내에게 트로피를 가져다주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습니다.

출처: 본인 제공
로드FC 선수로 활동하는 모습.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소방관 파이터’ 신동국


운동한 지 1년 정도 되던 날 2017년 프로 대회를 앞두고 프로 대회 출전 제안을 받았습니다. 한 선수의 부상으로 공석이 생겼다고 나가보라는 거였죠. 프로를 꿈꾸면서 시작한 것도 아니고 불혹을 앞둔 나이에 젊은 선수들과 싸우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40세면 격투기 선수로는 은퇴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항상 찾아오는 기회가 아닌 만큼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도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소방관의 애환, 처우 등 메시지를 전할 기회였죠.


2017년 4월 장충체육관에서 임병하 선수와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죽기 살기로 경기에 임했고 그 결과 1라운드에서 TKO승을 거뒀습니다. 승리의 기쁨도 컸지만 인생에 오점을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는 기쁨이 더 컸습니다.


처음엔 혼자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경기를 거듭하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주위엔 목이 터지도록 응원한다는 동료, 소중한 응원과 선물을 보내준 국민이 있었죠. 세 번째 경기 때 헬기 추락으로 순직한 소방관 한 선배님의 아들이 선배님이 현장에서 쓰던 장갑과 선글라스를 보냈습니다. ‘부디 아버지의 정신이 신동국 소방관님을 지켜주고 저 많은 생명을 살리는 것에 일조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였습니다. 많은 응원 덕분에 링 위에서 외롭지 않게 싸울 수 있습니다.

출처: ROAD FIGHTING CHAMPIONSHIP 유튜브
순직한 소방 동료를 추모하는 퍼포먼스도 했다. 이뿐 아니라 지금까지 파이터 머니는 모두 기부했다. 고아원, 순직한 동료 유가족, 공무상 재해를 인정 받지 못한 동료 등에게 작지만 도움이 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를 지켜주세요


전적 4전 3승 1패. 아쉬움이 남는 경기도 있었지만 프로 데뷔를 하면서 다짐했던 걸 이루고 있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소방관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국민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우승 소감을 얘기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은 순간 가장 먼저 나온 말입니다. 현장에서 순직하는 소방관보다 자살로 목숨을 잃는 소방관들이 더욱더 많습니다. 아직도 생명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소방관을 분풀이 대상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방관들은 지금도 열악한 처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으로 힘겨워하지만 누군가 불구덩이 속에서 도움을 요청한다면 언제든 뛰어 들어갈 준비가 돼 있습니다. 위험한 순간, 꼭 필요한 순간 여러분은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저희를 지켜주세요.


저, 소방관 파이터 신동국은 현장에서는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는 소방관으로, 링 위에서는 메시지를 전하는 파이터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소방관을 향한 인식과 처우가 변하지 않을까요.


글 jobsN 이승아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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